외교문서 담당 조선文科 ‘최애’ 관직… 오탈자 땐 태형·하옥·파직 당하기도[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 문화일보
  • 입력 2023-04-07 08:55
  • 업데이트 2023-08-07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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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일러스트 = 김유종 기자



■ 지식카페- 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 (17) 외교문서 전담기관 승문원

3정승 머무는 관청으로 ‘괴원’ 별칭… 한문 통달해도 중국 속어 혼용한 吏文 알아야 맡을 수 있어
명필 한석봉도 문서 베껴 쓰는 사자관 출신… 어느 부서보다 꼼꼼해 날짜만 틀려도 의금부 옥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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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문원(承文院)은 중국이나 일본 등 이웃 나라와의 외교문서를 맡아보는 곳으로 홍문관, 예문관 등과 함께 문과 출신의 관리들이 가장 선호하는 관청이다. 또한 성균관, 교서관과 함께 삼관(三館)이라 불리었으며, 괴원(槐院)이라는 별칭이 있었다.

괴원은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 이른바 삼정승을 지칭하는 삼공이 머무르는 관청이라는 뜻인데, 이는 홰나무를 지칭하는 ‘괴(槐)’라는 한자가 ‘삼공의 자리’를 의미하는 데서 비롯됐다. 승문원이 외교를 담당하기 때문에 다른 관청과 달리 특별히 삼정승이 모두 도제조를 겸임한 까닭에 승문원에 ‘삼공의 자리’가 모두 놓이게 됐고, 그래서 괴원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삼정승이 모두 승문원의 도제조로 있었던 것은 조선 왕조가 외교를 그만큼 중요하게 했다는 뜻이다. 특히 당시 외교는 국왕들이 직접 만나기보다는 문서를 오가는 형태로 이뤄졌기 때문에 외교 문서 작성 업무를 맡은 승문원은 외교의 최전선에 있었던 관청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의 외교는 흔히 사대교린(事大交隣)이라는 말로 대변되었는데, 이 말의 뜻은 ‘큰 나라를 섬기고(事大)’ ‘이웃 나라와 사귄다(交隣)’는 뜻이다. 곧, 중국은 섬기면서 외교하고, 일본과는 사이좋게 사귄다는 뜻으로서, 조선의 외교정책을 보여주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막중한 임무를 맡은 승문원의 소속 관원을 살펴보면, 우선 의정부의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 모두 이곳의 도제조를 겸임하였고, 전임관으로 가장 높은 직책은 정3품 판교 1명이 있었으며, 그 아래로 종3품 참교 1명, 종4품 교감 1명, 정5품 교리 2명, 정6품 교검 2명, 정7품 박사 2명, 정8품 저작 2명, 정9품 정자 2명, 종9품 부정자 2명이 있었다.

승문원의 본래 명칭은 문서응봉사였으나 태종 대인 1411년에 승문원으로 개칭되었다. 승문원 판교는 원래 판사라고 불렀으나 세조 때에 개칭되었고, 참교도 원래는 지사, 교감도 원래는 부지사였으나 역시 세조 때 개칭되었다. 저작은 본래 저작랑으로 불리었으나 저작으로 개칭되었으며, 교검도 부교리였다가 개칭되었다. 승문원의 관원 중 참교 이하는 대개 홍문관과 예문관, 성균관 등의 관원이 겸임하였다. 그리고 중종 시대에 참교, 교감, 교리 직제가 사라지고 교검은 1인으로 축소되었는데, 대개 교검은 승문원에 장기간 근무하는 직책이었다.

이렇듯 승문원 관원은 모두 문관으로 이뤄져 있는데, 이들 말고도 많은 관원이 더 있었다. 이문습독관이라는 직책이 있었는데, 이들의 수는 무려 20명이나 되었다. 그렇다면 이문습독관이 무엇일까? 승문원에서 만드는 외교문서는 단순히 한자로 작성되지 않고 이문(吏文)이라는 독특한 문체로 서술되었다. 중국과 외교문서를 주고받을 때는 일반적인 한문 문장이 아니라 한문의 골격에 중국의 속어나 특수한 용어를 섞어 썼는데, 이러한 공식 서식을 이문이라고 했다. 따라서 한문을 통달했다고 해서 외교문서를 작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문을 모르면 외교 문서를 작성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이해할 수도 없었다. 이 때문에 승문원에서는 이문을 강습시키기 위한 관원을 뒀는데, 이들이 바로 이문습독관이다.

이문습독관 외에도 승문원에는 사자관(寫字官)이 수십 명 배치되어 있었다. 사자관이란 글자를 베껴 쓰는 관원을 일컫는다. 당시엔 외교문서는 모두 손으로 직접 써서 작성했는데, 이때 필체가 좋고 글자 크기를 일정하게 쓰는 사자관의 역할이 반드시 필요했다. 또한 외교문서를 작성할 땐 원본 외에도 여러 부의 부본을 필사하여 만들어 뒀는데, 필사본 역시 이들에 의해 작성되었다. 필사 업무는 국내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꼭 필요했기 때문에 중국이나 일본에 파견되는 사절단에도 이 사자관이 반드시 동행했다.

사자관들은 필체가 뛰어나야 했기 때문에 그들 중에는 명필도 많았다. 조선 중기에 명필로 이름을 떨쳤던 석봉 한호도 바로 사자관 출신이다. 이렇듯 승문원은 외교문서 작성을 맡은 매우 중요한 관청이었지만, 조선 태종 때까지만 하더라도 궁궐 바깥에 있었다. 태종 당시 승문원은 한양 북부 양덕방(지금의 종로구 계동)에 있었는데, 세종 때에 이르러 업무의 편리를 도모하는 차원에서 경복궁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이후로 줄곧 궐내각사의 위상을 유지하게 되었다.

승문원의 관원들은 그 어떤 부서보다도 꼼꼼하고 치밀해야만 했다. 승문원은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곳이기 때문에 단어 하나, 글자 하나, 토씨 하나, 숫자 하나만 틀려도 큰 벌을 받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태종 15년(1415년) 6월 4일에 승문원 지사 윤회와 부교리 정인을 의금부에 가뒀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사역원 판관 강유경을 보내어 도망해 온 군사 박몽사 등 23명을 압령(押領)하여 요동으로 가게 하였다. 승문원에서 요동으로 보낼 자문(咨文)과 안인(安印)한 것을 올렸는데, 지신사 유사눌이 그 자문(咨文) 속의 일월이 잘못된 것을 발견하였다.’

사건의 내막을 설명하자면 명나라 요동에서 23명의 군사가 조선으로 도주해 왔기에 이들을 붙잡아 요동으로 보냈는데, 이 사안에 대해 설명한 외교문서에 날짜가 잘못 적혔던 것이다. 명나라 요동의 관부에 보내는 문서의 날짜가 틀렸으니 징계를 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 일로 의금부에 갇히기까지 했다는 것은 조선시대의 외교 문서가 얼마나 깐깐하게 작성되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사실, 명나라에 보내는 자문을 잘못 작성하여 승문원 관리들이 파직된 것은 이 사건 이전에도 있었다. 이 사건으로부터 10개월 전에 승문원 부교리 최흥효와 정자 구강이 의금부에 갇히고 파직까지 당했는데, 그 이유는 당시 정승이었던 하륜이 그들을 다음과 같이 꾸짖는 내용에 잘 담겨 있다. “이제 예부(禮部)에 정장(呈狀)하는 자문(咨文) 안에, ‘정윤후(鄭允厚)가 경사(京師, 북경)에 가지 못하는 사유에 대해 환병(患病)이라는 두 자를 없애고 다만 연로(年老)하여 능히 걸어갈 수가 없다’고 쓰는 것이 가하다.”

이때 하륜이 명나라 예부에 보내는 문서를 읽고 그 문서 내용 속에 정윤후가 연경에 가지 못하는 이유를 병환 때문이라고 쓴 것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병 때문에 못 가는 것이 아니라 연로해서 못 간다고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하륜은 그들 두 사람이 사연을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정윤후가 병 때문에 명나라 조정에 가지 못하다고 쓴 것은 명백한 직무유기라고 다그쳤다. 그리고 그 실수는 하옥과 파직이라는 엄청난 결과를 낳았다.

승문원 관원이 오탈자 때문에 벌을 받은 사건은 이 외에도 부지기수였다. 얼핏 보기엔 아주 작은 실수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는 일도 매우 엄격하게 처벌했다. 다음 사건을 보면 조선 왕조가 외교 문서의 오탈자를 얼마나 엄중하게 처벌했는지 잘 알 수 있다. 때는 문종 즉위년(1450년) 8월 25일이었다. 의금부에서 문종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승문원의 관리가 사은 방물표에 ‘근상표(謹上表)’ 3자(字)를 잘못하여 빠뜨렸으니, 저작랑 안초는 형률을 적용하면 장 70에 해당하고, 부교리 이한겸, 부지사 김득례, 판사 임효인은 장 60에 해당하고, 제조 이변, 김청, 허후는 태 50에 해당합니다.”

이에 문종은 안초 등에게는 각기 2등을 감하여 태형에 처하고, 이변과 김청은 관직을 파면시키고, 허후는 봐주라고 했다. 방물표라는 것은 당시 조선의 특산물을 중국의 황제에게 선물할 때 함께 보냈던 물품 목록표를 말한다. 이 물품 목록표를 작성하면서 형식상으로 쓰는 단어를 빠트려 명나라 황제에게 불경죄를 저지른 격이 된 것이다.

얼핏 생각하기엔 대수롭지 않은 일 같은데, 이 일로 승문원 고위직들은 파면되고 하위직들은 모두 태형을 수십 대씩 맞았던 것이다. 당시 허후는 예조판서였고, 이변은 예조참판, 김청은 동지중추원사였다. 그래서 장관급인 예조판서는 실무자가 아니라고 용서했지만, 실무를 관장하던 차관급 두 사람은 파직되고 나머지 실무자들은 전부 태형에 처했던 것이다. 이렇듯 승문원은 아주 엄격하고 깐깐한 관청이었다.

작가

■ 용어설명 - 삼관(三館)

조선 시대 학술·문필 기관인 성균관·교서관·승문원을 총칭하는 용어다. 성균관은 인재 양성을 위해 서울에 설치한 국립대학 격의 유학 교육 기관이었고, 홍문관은 궁중 사적과 문서를 관리하는 한편 왕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았다. 승문원은 ‘사대교린’에 관한 외교 문서를 관장한 기관으로 중국과 문서로 소통할 때 쓰는 이문(吏文) 교육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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