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현종 후궁처럼 아름다워 ‘양귀비’… 아편의 원료로 최면제 등 사용[박원순의 꽃의 문화사]

  • 문화일보
  • 입력 2023-04-10 09:01
  • 업데이트 2023-08-07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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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곱고 보드라우며 크고 화사한 꽃잎을 가진 양귀비는 시대를 초월한 아우라를 뿜어낸다. 오랜 신화와 전설에서 시작해, 중세와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독보적인 상징성과 의미를 지녀 왔다. 박원순 제공



■지식카페 - 박원순의 꽃의 문화사 - (25) 양귀비

16세기 유럽에 관상용으로 전해져 19세기 영국서 널리 재배…
중국에 아편 무역 강요하며 전쟁 발발
개양귀비 씨앗, 1차세계대전으로 땅 파헤쳐지자 발아해
붉은 꽃바다 이뤄… 전쟁 희생자 추모 상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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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만으로도 매우 선명하고 아름다운 붉은색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양귀비꽃은 고대 여러 문화권의 오랜 신화와 전설, 그리고 중세와 근현대에 이르는 역사 속에서 독보적인 상징성과 의미를 지녀 왔다. 곱고 보드라운 질감의 크고 화사한 꽃잎은 종이처럼 얇지만 시대를 초월하는 마법과도 같은 매우 강한 아우라를 뿜어낸다. 양귀비(楊貴妃)라는 이름은 중국 당 현종의 후궁으로 중국 4대 미녀 중 한 명으로 손꼽혔던 양귀비에서 유래했다. 왕을 미혹시켜 나라를 기울게 한다는 뜻의 경국지색(傾國之色)으로 불리기도 했던 양귀비의 빼어난 미모에 비할 정도의 꽃이라는 의미다.

주로 북반구에 걸쳐 70여 종의 양귀비 종류가 분포하는데, 아편과 식용 씨앗을 생산하는 양귀비, 선홍색 꽃으로 아름다운 개양귀비, 알록달록 화단을 밝히는 아이슬란드포피, 관상용으로 인기가 많은 여러해살이 오리엔탈양귀비 등 저마다 잎과 꽃의 크기와 색깔, 질감도 다양하다. 양귀비는 종에 따라 유럽 중부와 남부, 아시아 온대 지역, 호주와 남아프리카공화국, 북아메리카, 심지어 아한대 지방까지 폭넓은 기후대에 걸쳐 자라며, 한해살이, 두해살이, 여러해살이 등 생육 주기도 다르다. 양귀비의 속명인 파파베르(Papaver)는 양귀비꽃 종류를 일컫는 고대 라틴어로, 여기서 포피(poppy)라는 영명이 파생되었다.

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미국의 인상주의 화가 로버트 본노(1858~1933)의 ‘양귀비’.



고대 문명으로부터 전해진 기록을 통해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종류는 양귀비와 개양귀비 두 종류다. 먼저 모르핀, 코데인을 비롯한 20가지 이상의 알칼로이드가 들어 있는 아편을 생산하는 양귀비는 파파베르 솜니페룸(Papaver somniferum)이라는 학명을 가졌다. 종명 ‘솜니페룸’은 ‘최면’을 뜻하며 식물체 성분에 환각성이 있음을 나타낸다. 붉은색, 자주색, 흰색으로 피는 양귀비꽃의 암술 부분이 캡슐 형태의 삭과로 성숙하는데, 뚜껑이 있는 작은 단지 혹은 후추통처럼 생긴 청록색의 덜 익은 열매껍질 속 유액을 굳혀 만든 것이 아편(opium)이다. 아편은 진통제, 마취제, 최면제 등 의약용으로 중요하게 쓰이지만 중독성이 강한 향정신성 마약류여서 우리나라를 비롯한 많은 국가에서 약용 이외 사용을 법으로 금하고 있다.

한편 봄에 넓은 들판을 수놓으며 화려하게 꽃 피는 관상용 꽃으로 우리에게 익숙하게 널리 알려진 종은 개양귀비(P. rhoeas)다. 주로 붉은색이나 분홍색으로 피는데, 로이아스(rhoeas)라는 종명은 그리스어로 붉은색을 뜻한다. 이 종류는 양귀비와 닮았지만 아편을 만들어 내지 않아 개양귀비라 부른다. 양귀비는 기원전 3400년 전 무렵 재배된 기록이 있는데, 현재 이라크 바그다드 남동부에 위치한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도시 니푸르에서 발견된 의약 처방전에서 ‘기쁨의 식물(hul-gil)’로 묘사되었다. 기원전 14세기 후반 고대 그리스 크레타섬의 한 사원에는 ‘포피 여신(poppy goddess)’이라는 이름의 테라코타 조각상이 만들어졌는데, 머리 부분은 ‘영원한 잠’을 상징하는 양귀비 씨앗 꼬투리 모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양귀비 씨앗 꼬투리. ⓒ 박원순



그리스인들에게 양귀비는 종교 의식에 필요한 마법의 식물이자, 수면 유도제, 최면제, 진통제 등으로 사용했던 약초이기도 했다. 그리스 신화 속에서도 밤의 여신 닉스(Nyx)와 죽음의 신 타나토스(Thanatos), 수면의 신 히프노스(Hypnos), 그리고 꿈의 신인 모르페우스(Morpheus)를 상징하는 꽃이다. 또한 경작지에서 잘 자라며 수많은 씨앗을 뿌려 풍요와 다산의 상징이기도 했던 양귀비는 곡물과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시인 테오크리토스(Theocritus, 기원전 310∼250)는 곡식 단과 양귀비를 들고 있는 데메테르의 모습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 양귀비가 북부 유럽에 관상용으로 전해진 시기는 16세기 후반 무렵인 중세 후기였다. 그 후 19세기 영국에서 아편 팅크 생산을 위해 양귀비를 널리 재배했는데, 1840년엔 영국 정부가 강제로 중국에 아편 무역을 강요하여 전쟁이 발발하기도 했다. 당시 영국은 중국으로부터 고가의 차(茶)를 대량 수입하는 상황이었지만 이를 상쇄할 만큼 수출 실적이 좋지 않아 무역 적자가 심각했다. 그래서 아편을 더 많이 수출하고자 했던 것이고, 중국이 자국 내에서 아편 단속을 하자 이에 반발하여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독일의 식물학자 제이콥 스텀이 1796년 그린 개양귀비 세밀화.



개양귀비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폐허가 된 전쟁터에 피처럼 붉게 피어난 꽃으로도 유명하다. 개양귀비 씨앗은 80년 동안 땅속에 생존하며 잠을 잘 수 있는데 언제든 조건이 맞으면 싹을 틔울 수 있다. 한 개체당 수만 개의 씨앗이 뿌려지니 엄청난 양의 후손들이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전쟁으로 인해 땅이 파헤쳐지면서 땅속에 있던 상당한 양의 양귀비 씨앗들이 발아하여 붉은 꽃의 바다를 이뤘다. 이 때문에 개양귀비는 전쟁 희생자를 추모하는 중요한 상징성을 갖게 되었다. 영국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1월 11일을 전쟁에서 죽은 군인들의 넋을 기리는 영령 기념일(Remembrance Day)로 지정했는데, ‘포피 데이(Poppy Day)’라고도 하는 이날 오전 11시를 기해 전 국민이 2분간 묵념을 한다. 11월은 개양귀비의 개화 시기가 아니므로, 대신 개양귀비 꽃 모양의 조화나 브로치를 가슴에 단다.

이렇게 개양귀비를 전쟁 희생자에 대한 추모의 꽃으로 사용하게 된 것은 캐나다의 시인이자 군의관이었던 존 매크레이(John McCrae, 1872∼1918)가 전쟁의 아픔을 그리며 쓴 ‘개양귀비 들판에서(In Flanders Field)’라는 시의 영향이 컸다. 그로부터 백 년쯤 후인 2014년 영국의 예술가 폴 커민스(Paul Cummins)가 런던 타워에 설치한 작품(Blood Swept Lands and Seas of Red)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희생된 참전용사 88만8246명의 수만큼 제작한 세라믹 개양귀비꽃들과 함께 매우 감동적인 광경을 연출했다.

양귀비는 꽃이 매우 인상적인 만큼 많은 유명 화가가 캔버스에 담았다. 시대와 배경이 다른 작품들 속에서 양귀비는 저마다 다른 의미와 분위기를 보여 주고 있다.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 클로드 모네는 ‘아르장퇴유의 양귀비밭’(1873)이라는 작품을 통해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이 함께 있는 찬란한 행복을 묘사한 반면, 영국의 화가 토마스 쿠퍼 고치는 ‘신부의 죽음’에서 양귀비를 죽음의 상징으로 표현한다. 미국의 인상주의 화가 로버트 본노의 ‘양귀비’(1888)는 화사한 빛을 드러내고, 영국의 화가 제임스 인스킵의 ‘양귀비 연구’(1832)는 사라져 가는 자연의 모습을 담았다. 영국의 화가 존 밀레이가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나오는 한 장면을 그린 작품 ‘오필리아’(1852)에도 양귀비꽃이 등장한다. 비록 원작엔 양귀비가 등장하지 않았지만 화가는 강에 몸을 던져 수면에 떠 있는 오필리아의 죽음을 강조하기 위해 그녀의 손 가까이에 붉은색 양귀비꽃을 그려 넣었다. 우리나라에도 양귀비를 그린 화가가 있다. 16세기 초 여러 꽃과 곤충을 함께 그린 신사임당의 초충도 작품 중 하나인 ‘양귀비와 도마뱀’ 속에서 양귀비꽃은 다산의 상징으로 씨앗이 가득한 꼬투리와 함께 그려져 있다.

양귀비는 약용뿐 아니라 식용으로도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와인을 더 붉게 하기 위해 진홍색 꽃잎을 첨가하기도 했고, 씨앗에서 짜낸 기름은 요리와 샐러드 드레싱으로 사용해 왔다. 또한 꽃봉오리가 생기기 전에 채취한 어린잎은 샐러드에 넣어 먹기도 하고, 잘 익은 양귀비 씨앗은 빵과 요리에 고급 재료로 쓰인다. 타르트 반죽에 양귀비 씨앗을 넣고 오븐에 구워 먹는 몬쿠헨이라는 요리도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마약류 관리법에 의해 ‘파파베르 솜니페룸’이라는 학명을 가진 양귀비를 재배하거나 씨앗을 소지하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으며, 따라서 식용으로도 이용할 수 없다.

양귀비는 오랜 역사 속에서 인간들의 삶과 함께하며 수많은 사연과 자취를 남겨 왔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약을 비롯한 여러 실용적 가치를 지닌 매우 중요한 식물이다. 또한 개양귀비, 아이슬란드포피, 오리엔탈양귀비 등 관상용으로 육종된 재배품종은 봄 정원에서 매혹적인 색감의 섬세한 꽃을 선보이며 색다른 즐거움을 줄 수 있다.

국립세종수목원 전시기획운영실장

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 박원순



■개양귀비(Papaver rhoeas)

아주 오래전부터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 등 온대 지방에 널리 퍼져 자란다. 아편 성분이 들어 있지 않아 개양귀비 혹은 꽃양귀비라고 부르며 늦봄부터 초여름에 걸쳐 진홍색과 분홍색 꽃이 핀다. 햇빛과 양분이 풍부하고 배수가 잘되는 토양을 좋아하는데, 재배가 쉽고 관리를 거의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전년도 가을에 씨를 뿌리면 늦봄에 개화하고 당해 봄에 씨를 뿌리면 초여름에 개화한다. 영국의 육종가 윌리엄 윌크스(William Wilks)가 개발한 ‘셜리 포피(Shirley Poppy)’ 등 정원에서 인기가 많은 재배품종이 많이 육종되었다. 시든 꽃을 따 주면 새로운 꽃이 피어 개화기를 연장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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