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여담]신순범의 귀거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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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입력 2023-05-26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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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종 논설위원

정치 일선에서 떠난 지 오래됐지만, 신순범(91) 전 의원의 특별한 재능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제11대 국회(1981년)부터 14대(1992년)까지 내리 4선을 하며 전남 여수가 지역구였던 신 전 의원은 ‘암기의 달인’ 얘기를 들었다. 여수 지역 300여 개 섬 이름은 물론 원주율, 국회 주요 전화 번호, 언론사, 관공서, 그리고 에베레스트 14개 봉의 높이도 줄줄 외웠다. 당시 출입기자를 만나 명함을 받으면 이름과 소속사는 물론 전화 번호까지 외워 다음에 만날 때 이름과 전화 번호까지 얘기하는 것을 보고는 감탄하기도 했다. 동교동계 좌장인 권노갑 전 의원도 수첩을 들고 다니지 않고 모든 전화 번호를 외우고 다녔다. 군사독재 시절 탄압을 피하기 위해선 흔적을 남기지 말아야 했고 그래서 외우는 것이 습관이 됐다고 한다.

또 하나의 장기는 웅변 실력이다. 당시만 해도 TV토론 같은 것이 없었고 유세 실력으로 평가받을 때인데 전국 영어웅변대회, 우리말 웅변대회 등에 출전해 대통령상을 탈 정도로 탁월한 언변을 가지고 있었다.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신 전 의원의 정계 진출은 고난의 길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대학을 졸업한 뒤 정치에 뜻을 두고 9, 10대 국회의원에 출마했지만, 연거푸 낙선한 뒤 서울 서대문에서 라면 장사를 했던 신 전 의원은 11대 총선 합동 유세 때 군소정당인 안민당 후보로 나서 여수 앞바다 섬 300개를 모조리 외워 청중을 압도, 당시 신군부 여당을 물리치는 기적을 만들었다.

가난의 뼈저린 경험을 한 신 전 의원은 아들 결혼식 축의금 1억 원 전액으로 만광장학회를 만들어 지금까지 1200여 명이 혜택을 봤다. 정계 은퇴한 뒤에도 신 전 의원은 자신의 성공 경험담을 5가지 ‘ㄲ’이 들어가는 ‘꿈 깡 꾀 끼 끈’으로 정리해 책도 내고 강연도 하고 있다. 최근까지 아코디언을 메고 지하도 등에서 공연을 하며 학생들의 장학금을 모금했다. 이제 구순을 넘은 신 전 의원은 자신이 나고 국회의원을 했던 여수로 귀향, 작은 집을 얻어 여생을 마무리하겠다고 한다.

초선의 무소속 김남국 의원이 가난한 척 쇼를 하면서 뒤로는 100억 원대의 가상화폐를 보유한 사건이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이런 때 ‘진짜 가난’을 꿈과 용기로 승화시켰던 신 전 의원의 귀거래사가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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