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기 어렵지만 그래도 믿고 싶은… 부를수록 더 슬픈 ‘앵두’[주철환의 음악동네]

  • 문화일보
  • 입력 2023-08-21 09:09
  • 업데이트 2023-08-21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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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철환의 음악동네 - 최헌 ‘앵두’

‘어쩌다 한번 오는 저 배는 무슨 사연 싣고 오길래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마음마다 설레게 하나’(김트리오 ‘연안부두’).

류승완 감독의 ‘밀수’는 1970년대 가요들을 세트나 소품처럼 적재적소에 활용했다. 장르상 범죄물이지만 내겐 음악 로드무비 같았다. 보는 내내 다음 장면에선 (누가 속을까 아니면 누가 속일까 보다) 어떤 노래가 나올까 궁금했고 속으로 전곡을 거의 따라불렀다. ‘설마 노래 전부를’ 하겠지만 내가 좀 ‘옛날 사람’이고 자칭 노래채집가여서 가능한 일이다. 기억은 뇌 속에 보관되고 추억은 심장에 저장된다. 영화 상영 두 시간 동안 나는 바닷가 마을 CCTV를 통해 김혜수, 염정아, 박정민, 조인성뿐 아니라 잊어버린 친구도 찾았고 잃어버린 나도 만났다.

눈앞의 돈은 사람을 갈라놓아도 오래된 노래는 우리를 만나게 한다. 극장 가기 전에 읽은 사전정보에서 천 년 묵은 속담 하나가 비수처럼 꽂혔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실제로 카메라는 물속 풍경을 샅샅이 비춰주면서도 인간들의 마음속은 도통 담아내지 못한다.

결국은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는 얘긴가. 아니나 다를까 영화 시작하자마자 노래 하나가 무방비 상태의 관객을 기습 공격한다. ‘믿어도 되나요 당신의 마음을 흘러가는 구름은 아니겠지요 (중략) 철없이 믿어버린 당신의 그 입술 떨어지는 앵두는 아니겠지요.’ 그래서 믿겠다는 것인지 그래도 못 믿겠다는 말인지. 하지만 자꾸만 들을수록 믿음보다는 소망에 기운 노래라는 게 처연히 드러난다. 믿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믿고 싶다는 간곡함이 배어 있다. 그래서 오히려 부르면 부를수록 더 슬픈 노래가 되고 말았다.

‘앵두’를 부른 최헌(1948~2012)은 가을에 어울리는 가수다. 대표곡이 ‘오동잎’이고 ‘가을비 우산 속’도 그의 히트곡이다. ‘정다웠던 그 눈길 목소리 어디 갔나’ 추적추적 가을비에 오동잎이 날리는데 그런 분위기에서 선곡하지 않을 디제이가 있겠는가. 그리고 그는 어느 가을날(9월 10일) 세상을 떠났다. ‘어디로 가는 걸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부는 바람 새 소리에 고개 너머 님 찾으러’(최헌 ‘구름 나그네’).

가수가 세상을 떠났다는 말이 실감 나지 않을 때가 있다. ‘머무는 곳 그 어딜지 몰라도’(‘밀수’에서 옥분이 뉴-종로다방에서 흘러나오던 노래 제목) 그들은 언제건 부활할 준비가 돼 있다. ‘머무는 곳 그 어딜지 몰라도 나 외롭지 않다네 언젠가는 떠나야 할 그날이 빨리 왔을 뿐이네.’ 이 노래를 부른 가수 박경희(1951~2004)는 씩씩한 목소리로 영화 속에서 외로운 가슴들을 어루만져준다. 그러니 전국노래교실의 급훈은 이것 하나로 족하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가수로서 최헌 최고의 해는 1978년이다. 당시 KBS, TBC 가수상을 휩쓸고 그해 12월 31일 MBC 10대가수 가요제에선 최고인기가수상(속칭 가수왕)까지 받았다. 불과 30세의 그를 정상에 올린 곡이 바로 ‘앵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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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을 살펴보니 최헌은 유난히 나비를 사랑했다. 대학생 때 전설의 록밴드 히식스에서 기타연주자로 처음 무대에 섰는데 나중에 자신이 주도한 밴드 이름은 ‘검은 나비’(1974) ‘호랑나비’(1976) ‘불나비’(1984)였다. 심지어 그가 만든 기획사 이름도 ‘서울나비’였다. 이쯤 되면 나비에 홀린 가수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요절한 가수 김정호(1952~1985)의 ‘하얀 나비’가 오늘따라 앵두나무, 오동나무 사이를 이리저리 날아다닌다. ‘꽃잎은 시들어요 슬퍼하지 말아요 때가 되면 다시 필 걸 서러워 말아요.’

작가·프로듀서·노래채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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