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면 다시 못 올 내 청춘… 어느 누가 알아봐주려나[주철환의 음악동네]

  • 문화일보
  • 입력 2023-09-04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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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철환의 음악동네 - 윤일로 ‘기분파 인생’

쉬는 시간 복도에서 가끔 얼굴만 마주치던 분이 교실에 들어오더니 갑자기 내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다. 그전까진 말 한마디 안 나누던 사이다. 무슨 일일까. 교무실로 데리고 가서야 답을 주셨다. 얼마 전 국어 시간에 ‘자화상’이란 제목으로 과제물을 냈는데 내 작품이 눈에 띄었던 모양이다. 그분은 다른 반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청년 교사였다.

당시엔 학교마다 ‘문학의 밤’이라는 행사가 있었다. 이웃 학교 학생들까지 구경 올 정도로 인기 있는 축제였다. 아날로그 스타 탄생의 무대에 담당 교사(신철수 선생님)가 ‘문학소년’을 발탁하여 기회를 주신 거다. 중학교 1학년 2학기 어느 멋진 가을날이었다. 깜짝 데뷔(?) 이후로 학교 주변에선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늘었다.

교단에서 선생님은 가장 젊은 축에 속했고 이런저런 잡무를 도맡으셨다. 나는 선생님의 권유로 교지 편집에도 관여했다. 소풍날 교사 대표로(아마 젊다는 이유로) 그분이 노래를 열창했는데 가사가 얄궂었다. ‘인생이란 무엇인지 청춘은 즐거워’ 원곡 가수는 윤일로(1935∼2019·본명 윤승경), 노래 제목은 ‘기타 부기’다. 부기는 부기우기(Boogie-Woogie)의 준말로 흥겨운 리듬이 반복되는 음악 양식이다. 들으면 몸이 들썩이는데 가사는 점입가경이다.

‘한번 가면 다시 못 올 허무한 내 청춘 마시고 또 마시어 취하고 또 취해서 이 밤이 새기 전에 춤을 춥시다.’ 청소년에게 유해하다고 누군가 시비를 걸 만도 한데 다행히(?) 금지곡 목록에 든 적은 없다. 하지만 제자가 지켜본 선생님의 시간표는 정확하고 건실했다. 놀 땐 놀고 일할 땐 일하는 알뜰한 분이셨고 머무를 때와 떠나야 할 때를 아는 슬기로운 분이셨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자격 없는 사람이 무대에 오르면 객석이 소란해진다. 무대엔 아무나 서나. 그러니 누군가 무대에 설 사람을 가려줘야 한다. 발견은 눈으로 하지만 발탁은 힘으로 한다. 영향력 있는 인물이 문을 열어주면 무대가 가까워진다. 윤일로는 해군 복무 시절 장기자랑에서 당대의 실력자인 두 작곡가(나화랑·손석우)의 명함을 받는다. “제대하면 찾아와.” 유튜브(‘대한늬우스와 함께하는 리사이틀 인생쇼’)에서 본인이 웃으며 밝힌 얘기다. “그때 손석우(‘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 작곡) 선생을 찾아갔으면 또 다른 길을 걸었을 텐데.” 그러나 숲속에 난 두 길 중 선택할 수 있는 건 결국 하나다. ‘한 가지 길’이라는 뜻의 일로(一路)도 나화랑(‘청포도 사랑’ 작곡)과 백년설(‘나그네 설움’ 가수)이 지어준 예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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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일로의 히트곡 중에 요즘 내가 즐겨 듣는 노래는 ‘기분파 인생’이다. 말 많고 탈 많은 동네 입구에 하루에 한 번 정도 틀어줄 만한 가사인데 다소 직설적이다. ‘여보소 그런 말씀 행여 하지 마시오 여보소 남의 말을 너무 하지 마시오 이래 봬도 내 기분엔 저 잘난 맛에 사는 게 인생인데 남의 말을 이러쿵저러쿵하지 맙시다.’ 천 냥 빚을 갚게도 하고 지게도 하는 게 바로 말이다. 툭 던진 한마디로 당사자는 물론 주변인들의 기분도 얼마나 달라지는지 본인은 모를까. 혹시 모르는 척하는 건 아닐까.

살다 보면 기분 좋은 날도 있고 나쁜 날도 있다. 그까짓 기분이 뭐 그리 중요하냐고? 기분 나쁘다고 노려보고 기분 나쁘게 쳐다본다고 위력을 행사한다면 그 사람이 가야 할 곳은 하나다. 이 가을엔 모음 하나 바꿔보자. 풍경화만 그리지 말고 자화상도 그려보자. 기분보다 중요한 건 기본이다.

작가·프로듀서·노래채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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