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이면 더욱 그리운 유재하… ‘그대여 힘이 돼주오, 길을 터주오’[주철환의 음악동네]

  • 문화일보
  • 입력 2023-10-30 08:59
  • 업데이트 2023-10-30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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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철환의 음악동네 - 유재하 ‘가리워진 길’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 한마디 변명도 못 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 내일(10월 31일)은 어디선가 이 음악과 마주칠 가능성이 다분하다. 노랫말이 시의적절하기 때문이다. 한때는 10월의 마지막 날 도시 전체가 이 노래에 포위됐던 적도 있다. 진실과 변명 그리고 망각의 파노라마는 노래의 수명도 늘려준다.

피아노 연주에 실려 출발하는 가사는 경건하면서 처연하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제목까지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계절 중에서도 가을, 가을 중에서도 10월, 10월 중에서도 마지막 날이 존재하는 한 사라지기 힘든 노래라고 힌트를 주면 그제야 어렴풋이 유추해 낸다. 정답은 ‘사라진 계절’이 아니고 ‘잊혀진 계절’이다.

원곡 가수 이용이 토크쇼에서 이날이 일 년 중 가장 바쁜 날이라고 농반진반으로 말할 때 내 기억의 뜰에선 김영랑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이 피어올랐다.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그러나 이용은 섭섭해 울 이유가 없다. 그는 누가 뭐래도 선택받은 가수다. 365일 중 하루라도 확실히 ‘나의 날’이라고 외칠 가수가 몇 명이나 될까.

‘잊혀진 계절’은 에스컬레이터처럼 서서히 올라가다 마지막 계단(‘나를 울려요’)에서 걸음을 멈춘다. 과연 무엇이 나(서정적 자아)를 울게 했을까. 내리기 직전에야 해답을 찾는다.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모든 예술 창작의 동기는 이 한 문장에 압축돼 있다. 주저앉지 않고 슬픔을 승화시켜 작품으로 빚어내는 그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예술가다.

희망의 표어(‘꿈은 이루어진다’)를 전복시키는 비정한 탄식(‘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앞에서 잠깐만 숨을 돌리자. 누군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이루어질 수없는(countless) 사랑’이라고 읽는다. 보라. 10월의 마지막 밤이 지나면 11월의 첫날이 오지 않던가.

11월 1일은 음악동네의 메모리얼 데이(추념일)다. 기억해야 할 3명의 가수(유재하·김현식·함중아)가 이날 세상을 떠났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중략)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김소월의 시 ‘초혼’) 그럴싸 그러한지 이들의 대표곡엔 ‘사랑’이 촘촘히 박혀 있다. 유재하(‘사랑하기 때문에’)·김현식(‘내 사랑 내 곁에’)·함중아(‘내게도 사랑이’).

초혼제에서 망자의 이름을 부른다. 불러도 불러도 대답을 안 하니 그때부턴 이름 대신 노래를 부른다. 오늘 제주(祭主)가 고른 노래는 유재하의 ‘가리워진 길’이다. ‘보일 듯 말 듯 가물거리는 안개 속에 싸인 길. 잡힐 듯 말 듯 멀어져 가는 무지개와 같은 길.’ 여기서 노래가 끝나버리면 그 길은 벼랑이 될 텐데 다행히 길에서 조력자를 만나 손을 내민다. ‘그대여 힘이 돼 주오. 나에게 주어진 길 찾을 수 있도록. 그대여 길을 터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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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길어서 길이다. 짧으면 줄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줄을 서고, 타고, 댄다. 날 새는 줄 모르고 그 줄만 따라가다 가끔은 오랏줄, 포승줄에 묶이기도 한다.

인생길을 운전하다 보면 가끔 이런 경고음이 들린다. ‘전방에 과속방지턱이 있습니다.’ 오늘도 유재하는 가리워진 길 숲에서 우리를 부른다. 그가 떠나지 않았기에 추도사의 마지막은 올해도 그대로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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