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밈’의 시대에 ‘유행어’를 묻다[안진용 기자의 엔터 톡]

  • 문화일보
  • 입력 2023-11-17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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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2TV ‘개그 콘서트’(개콘)가 3년여 만에 돌아왔습니다. 20% 안팎의 시청률을 구가하던 시절, 이 프로그램은 유행어의 산실이었죠. 일요일 밤에 ‘개콘’을 보고 한 주를 마감하지 않으면 다음 날 출근해 대화가 원활하지 않았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현실이 되던 때였는데요. ‘개콘’이 재개됐지만 다시금 유행어의 창구가 될 것 같진 않습니다. 유행어 탄생의 주체가 더 이상 연예인이나 미디어가 아니기 때문이죠.

요즘 유행어는 근원을 찾기 어려운데요. SNS를 기반으로 숱한 신조어, 축약어들이 오가는 과정 중 자연스럽게 특정 표현이 두루 쓰이게 되죠. 하지만 전 세대를 아우르기보다는 특정 세대들이 소구하는 표현이라 ‘유행어’라 부르기 애매하기도 합니다.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서 기성 세대를 대상으로 ‘신조어 테스트’를 하는 것 역시 세대 간 표현의 단절을 알 수 있는 대목이죠.

씁쓸한 점은, 요즘 유행어들의 문법 파괴가 심각합니다. 심의 기능이 작동하는 미디어 속 유행어는 언어유희, 어투에 초점을 맞출 뿐 문법을 훼손하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올해 자주 쓰인 ‘그 잡채’(그 자체), ‘내또출’(내일 또 출근), ‘억텐’(억지 텐션·억지로 즐거운 척한다) 등은 문법에 어긋나고, 설명 없이는 이해하기 어렵죠.

또한 가장 유행한 표현은 ‘I am∼’인데요. 각종 사기사건에 연루돼 구속된 전청조가 외국 유학파인 척 행사하며 ‘I am 신뢰예요’라는 비문을 쓴 후, 관련 패러디가 쏟아졌습니다. 여러 연예인이나 예능을 비롯해 각종 기업들이 상업 광고에서도 이를 차용했죠. 그런데 많은 피해자를 양산한 범죄 피의자의 말투를 사용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는 비판 여론이 쏟아지자 불과 며칠 사이 이 표현을 쓰는 사례가 크게 줄었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지난 1988년 탈옥수 지강헌이 인질극을 벌이며 외친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지금도 쓰이고 있는데요. 비록 범죄자가 내뱉은 말이지만 곱씹을 만한 메시지가 담겼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무런 맥락 없이, 누군가를 향한 조롱의 의미까지 포함한 비문인 ‘I am∼’은 유행어의 조건을 갖추지 못한 셈이죠.

주위에 “올해의 유행어가 무엇인 것 같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다 핀잔을 들었죠. “누가 요즘 유행어라고 해요? 밈(meme)이죠.” 타당한 지적이었습니다. 시대의 흐름 속에서 유행어라는 표현조차 점차 잊히고 있는데요. 밈의 시대에 유행어의 문법 파괴를 우려하는 저, 꼰대일까요?
안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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