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民主 의지’도 선도한 이승만[포럼]

  • 문화일보
  • 입력 2024-02-29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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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섭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105년 전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과 연이은 만세운동을 통해 대한(大韓)의 민주적 독립 의지가 국제적으로 천명됐다. 3·1독립선언서에는 손병희·이승훈·한용운 등 33인의 민족대표가 서명했다. 해외에 있던 여러 독립운동가와 마찬가지로 이승만은 서명하지 못했지만, 3·1운동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첫째, 이승만은 3·1운동이 일어나기 이전 미국에서 비슷한 독립운동 집회를 서재필·안창호 등과 함께 준비했다. 1919년 1월 프랑스 파리에서 제1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를 위한 평화회의가 개최되자 이승만은 그곳으로 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저서 ‘독립정신’에서 주장했던 대로,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지 않았던 이승만은 자유롭게 미국을 떠나 프랑스로 갈 수가 없었다.

파리평화회의 의장으로서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웠던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이승만이 박사 학위를 받은 프린스턴대 총장 재임 시절부터 이승만과 개인적 인연이 있었다. 윌슨 대통령이 파리평화회의 중간에 일시 귀국하자 이승만은 백악관에서 윌슨 대통령을 만나려고 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대신 이승만이 생각했던 것이 그가 참여했던 만민공동회와 같은 독립운동 집회였다. 이승만은 필라델피아에 살던 갑신정변 주역이자 배재학당 은사였던 서재필 등과 함께 1919년 4월 필라델피아 대한인총대표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를 개최했다. 미국 대한인국민회의 안창호는 상하이 프랑스조계로 가서 임시정부를 조직하느라 참석할 수 없었지만, 회의 준비에 협조했다.

둘째, 이승만은 3·1운동 결과 1919년 상하이 프랑스조계지에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 됐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프랑스 제국주의의 산물이던 프랑스조계지에 수립된 것은 프랑스대혁명 정신에 따라 제한적이나마 자유가 보장되던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이 조계지에 깔아놓은 도로망·통신망·금융망으로 대표되는 ‘상하이 모던’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에 활용됐다.

셋째, 이승만은 고종 황제 장례식에 즈음해서 일어났던 3·1운동의 민주적 의지를 선도하고 대변했다. 이승만은 군주를 다시 복원(복벽·腹壁)함으로써 대한독립을 이루려고 했던 일부 지도자들과는 생각이 달랐다. 그는 전주이씨 양녕대군의 16대손이었지만 “할 수만 있다면 성을 바꾸고 싶다”고 했을 정도로 군주의 회복이 아니라 민주의 실현으로서 대한독립을 이루려 했다.

넷째, 이승만은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현재 대한민국의 연결성을 가장 잘 상징하는 인물이다. 이승만은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과 구미위원부 위원장, 김구가 이끌던 중경(重慶)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겸 주(駐)워싱턴 전권대표, 해방 이후 김구에 이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마지막 주석, 그리고 대한민국 대통령에 선출됐다.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이승만과 김구가 합심해서 끝까지 지켜내지 못했다면 1945년 해방 직후 경성(서울)에서 선포됐던 ‘조선인민공화국’의 위세나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들이 합의했던 신탁통치 압력을 막을 수 없었다.

2024년 독립 대한민국에서 105년 전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과 함께 이승만을 생각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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