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수처럼 날아온 이별통보… ‘내가 바랐던 건 달콤한 밤양갱 뿐인데’[주철환의 음악동네]

  • 문화일보
  • 입력 2024-03-11 08:57
  • 업데이트 2024-03-11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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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철환의 음악동네 - 비비 ‘밤양갱’

개학이 닥쳐올 즈음에서야 아이는 몰아서 일기를 썼다. 기억나지 않는 건 상상으로 채웠다. 일기가 아니라 소설을 쓴 셈이다. 방학 숙제 중엔 곤충채집도 있었다. 들판에 나가 햇볕의 세례와 바람의 습격을 받는 대신 친구에게 일기를 ‘대여’해주면 돌아온 일기장 갈피 속엔 잠자리와 나비가 포개져 있었다. 게으른 겁쟁이 소년의 뒤늦은 고해성사다. 과제물을 챙기며 아이는 상상했다. 곤충들끼리 밤새 어떤 대화를 나눴을까. “너는 어디서 잡혔니?” “너는 어쩌다 잡혔니?” “거긴 가지 말아야 했는데.” “거긴 앉지 말아야 했는데.”

소년은 곤충 대신 노래를 모았다. 곤충 채집은 곤충을 죽이지만 노래 채집은 노래를 살린다. 앞자락에 소설이 나왔으니 오늘은 ‘소설 속의 연인’(원곡 도시 아이들)을 부활시키자. ‘소설 속에 나오는 연인들처럼 붉은 장미와 같은 정열로 보랏빛 무지개 같은 환상으로 그대와 나의 사랑은 시작되었고 소설 속에 나오는 연인들처럼 폭풍처럼 몰아치는 아픔으로 구슬프게 내리는 빗물 같은 슬픔으로 그대와 나의 사랑은 끝나 버렸네’ 사랑과 이별을 소재로 한 천편일률의 가사 같지만 평범한 ‘낭만 가요’로 가두어선 곤란하다.

말이건 노래건 끝까지 들어 봐야 한다.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은 대체로 맨 뒤에 나오니까. ‘아, 그대와 나는 소설 속의 연인이 아니오, 현실의 연인이오’ 싱어송라이터(김창남)는 소설과 현실을 여러 차례 대비하여 강조한다. 자칫하면 노래 제목이 ‘현실의 연인’이 될 수도 있었겠다. 이젠 확인할 길이 없다. 김창남은 2005년에 별세했다.

부르지 않는 노래는 표본실의 박제 곤충일 뿐이다. 노래는 불러야 노래가 된다. 현실에서 잃어버렸지만 되찾고 싶은 꿈이 있으니 누구는 노래를 만들고 누구는 노래를 부르는 거다. 어허 그런데 이 사람, 이런 노래는 부르지 말란다. ‘오늘 밤 우연히 라디오를 켤 때 당신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잊은 줄 알았었는데 잊혀졌다 했는데 당신은 노래를 만들었네요’(김목경 ‘부르지 마’) 마치 오랜만에 날아온 한 줄 SNS같이 섬뜩하지 않은가. 헤어진 연인의 예술적 집착일까. 하지만 대응하는 언어 온도는 침착하다. ‘부르지 마 부르지 마 옛노래를 하고픈 말이 있어도 부르지 마 부르지 마 옛사랑을’

오늘 채집망에 걸린 ‘당신’은 ‘싸구려 커피’로 데뷔한 장기하다. 그가 만든 노래를 비비가 불렀는데 이번 소재 역시 처음 등판할 때랑 비슷한 식품(밤양갱)이다. ‘소설 속의 연인’에 나오는 장미, 무지개, 폭풍, 빗물이 ‘객관적 상관물’이라면 이번 노래에서 ‘밤양갱’은 둘 사이의 암호 같은 물체다. 핵심은 과자의 성분이 아니라 이별의 언사다. ‘떠나는 길에 니가 내게 말했지 너는 바라는 게 너무나 많아’

음악동네의 이별 풍속도 많이 달라졌다. ‘두고두고 못다 한 말 가슴에 삭이면서 떠날 때는 말없이 말없이 가오리다’(원곡 현미) 하지만 ‘떠날 때는 말없이’(1964)는 이미 60년 전 다짐이다. 할 말 못 할 말 다 내뱉고 떠난 지는 꽤 됐다. 가슴에 삭이지 않고 내던진 이 말. ‘너는 바라는 게 너무나 많아’ 비수 같은 이 말에 베인 사람들이 아프고 억울해서 노래를 만드는 거 아닐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바라는 건 그냥 달콤한 밤양갱 한 개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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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에게 소설 쓰냐고 물으면 대화가 제법 풀리지만 일반 사람에게 소설 쓰냐고 물으면 다툼이 시작된다. 이유가 뭘까. 소설가에게 소설은 자작곡이지만 일반인에게 소설은 자작극이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 2행시 3행시 짓기가 일상이던 나는 소설을 ‘소금과 설탕’이라고 풀어낸 적이 있다. 짠맛을 내야 소금이고 단맛을 내야 설탕이다. 소금의 짠맛과 설탕의 단맛이 잘 어우러지면 제법 근사한 소설이 되지만 뒤죽박죽 엉기면 실패한 소설이 된다.

작가·프로듀서· 노래채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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