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지·욕망 표현하는 ‘음악’ 들으며… 내 ‘본성’을 마주하다[서동욱의 세계의 산책자]

  • 문화일보
  • 입력 2024-03-29 09:12
  • 업데이트 2024-03-29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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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동욱의 세계의 산책자 - (46) 음악의 철학

플라톤 “음악은 신이 준 선물”
쇼펜하우어 “마음에 큰 영향”
음악의 탁월성에 ‘찬사’ 보내

이상적 형상에 대한 모사 아닌
슬픔·기쁨 등 직접적 욕망 표현
내 마음을 음악에 비춰 알게돼


일상에서 음악만큼 우리에게 가까운 예술이 있을까? 지하철과 버스에서 눈 감고 졸며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는 사람들은 직접적으로 그가 사랑하는 음악과 연결되어 있다. 그가 잠을 자고 있건 다른 생각을 하고 있건 예술은 그의 정신에 스며든다. 우리는 이런 직접성을 회화나 연극 같은 다른 예술에서는 기대할 수 없다. 물론 우리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또 다른 예술이 있다. 춤이 그렇다. 마음이 움직이면 언제 어디서든 우리는 손과 발을 움직여 춤을 출 수 있다. 우리는 길을 가다 말고 갑자기 다른 사람들을 놀래며 멋진 춤동작을 시작할 수도 있다. 그러나 춤을 추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음악이다. 음악이 우리에게 와닿아 우리의 마음을 움직일 때 우리는 춤을 추게 된다. 춤의 경우도 역시 근본에 있는 것은 음악인 것이다.

이런 음악의 직접성을 가령 플라톤은 ‘법률’에서 이렇게 표현한 적 있다. “우리의 술잔치에서 우리의 동반자인 신들은 리듬과 선율을 알아듣고 즐길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주었다. … 신들은 우리가 노래하고 춤추게 한다.” 우리 마음에 근본적으로 직접적으로 깃들어 있는 음악을 바로 플라톤은 신화적인 표현을 동원해 ‘신들이 우리에게 준 선물’이라 기술하고 있다. 신들이 애초부터 우리 마음에 심어놓은 것이 바로 음악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음악이 우리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우리 마음의 비밀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 볼 수 있을까?

그런데 우리가 계속 얘기해 온 우리 마음의 본성은 무엇일까?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가 얘기했듯 ‘이성(理性)’일까? 한번 생각해 보자. 가령 학생 또는 정치가의 본질은 무엇일까? 그것은 학생을 학생이게끔 만드는 것, 또는 정치가를 정치가이게끔 만드는 것이다. 학생을 학생이게끔 하는 것은 바로 학생 됨을 열망하는 ‘의지’ 또는 ‘욕망’이다. 마찬가지로 누가 정치가가 되는가? 바로 정치를 욕망하고 의지하는 자일 것이다. 즉 모든 것의 배후에는 바로 욕망 내지 의지가 있다. 선생은 왜 선생이 되었는가? 기업인은 왜 기업인이 되었는가? 바로 선생이 되는 것을 의지했기 때문일 것이며, 기업인이 되는 것을 의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현재의 우리로 있도록 하는 본성은 바로 ‘의지(Wille)’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이 의지를 탐구하는 데, 그리고 의지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음악의 비밀을 알아내는 데에 안내자가 되어 준다. 의지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쇼펜하우어의 대표작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가령 의지의 한 강렬한 표현인 사랑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악극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지대한 영향을 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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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의 본질인 의지와 음악은 어떤 직접적인 연관을 가지는 것일까? 그리고 어떤 점에서 음악은 우리의 본질과 관련하여 다른 예술보다 우월한 측면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쇼펜하우어는 음악의 탁월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음악은 다른 모든 예술과는 완전히 다르다. 우리는 음악이 세계 속에 있는 존재의 어떠한 이념을 모사하거나 재현한 것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음악은 아주 위대하고 대단히 근사한 예술이며,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참으로 커다란 영향을 미쳐, 거기서 전적으로 보편적인 하나의 언어로서 인간에 의해 너무나 완전하고 심오하게 이해된다.”(홍성광 역) 음악에 대한 이러한 최대의 찬사는 어떻게 가능한가?

인용된 구절에 있는 “이념을 모사하거나 재현하지 않는다”는 말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여기에서 쇼펜하우어는 음악이 이념, 즉 플라톤적인 이데아(idea) 같은 것을 모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다른 예술은 어떨까? 가령 그림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림 속에는 하나의 사과가 등장하고 한 그루의 나무가 등장하며 한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그림을 통해 화가가 가닿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화가의 욕망은 어디에 가닿는 것일까? 화가의 욕망은 사과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데, 나무 한 그루 내지 한 인간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데 가닿는다. 이 욕망은 무엇을 매개로 실현되는 것일까? 바로 사과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 즉 사과의 이데아에 근접하려는 소망 속에서 실현된다. 하나의 사과를 그릴 때 사실 화가는 사과의 이데아를 그리고자 한다. 한 인물을 그릴 때, 가령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의 모습을 그릴 때, 화가는 한 개별적인 인간을 그리는 데에서 멈추어 서고자 하지 않는다. 그가 그리는 것은 바로, 소크라테스를 통해서 혹은 플라톤을 통해서 내보이는 ‘이상적인 철학자’의 ‘보편적인 모습’이다. 즉 화가의 시선은 인물을 경유하여 바로 그 인물의 이상적인 모범, 이데아를 그려내고자 하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예술의 초점은 하나의 이념을 모사하고 재현하는 데 맞춰져 있다.

그러나 음악은 도대체 무엇을 모사하는 것일까? 음악은 사과를 사과이게끔 하는 하나의 모범적인 형상에, 즉 이데아에 가닿으려 하지 않는다. 도대체 음악은 모사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음악이 나타내는 것은 하나의 대상, 예컨대 사과가 되었건 다른 그 무엇이 되었건 어떤 사물 내지 그러한 사물 배후에 있는 이상적인 형상이 아니다. 음악이 나타내는 것은 그것에 가닿고자 하는 우리의 의지와 욕망이다. 음악은 우리의 의지와 욕망을 직접적으로 표현할 뿐, 그 무엇도 모사하지 않는다. 모사하는 예술은 늘 이데아를 매개로 할 수밖에 없다. 즉 모사하려는 욕망은 늘 이데아를 매개로 자신을 표현한다. 그러나 음악 속에서 매개 없이 직접적으로 표현되는 것은 우리의 의지이며 욕망이다. 한번 생각해 보라. 우리가 깊은 슬픔 혹은 넘치는 기쁨을 느낄 때, 우리는 신음하고 울부짖는 듯한 소리 혹은 너무도 흥에 겨워 비명을 지르는 것과 같은 소리를 낸다. 그러한 소리가 바로 음악의 기원적인 형태일 것이다. 울부짖는 소리와 기뻐서 웃는 소리는 직접적으로 우리의 욕망을 표현한다. 음악은 바로 우리의 욕망을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이러한 소리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다시 앞서 언급한 ‘트리스탄과 이졸데’로 돌아가 보자. 그 악극에는 정념에 빠진 두 남녀의 애욕, 비탄과 같은 의지의 직접적 표현이 있을 뿐, 사랑의 이데아를 조형적(造形的)으로 모방하는 일 같은 것은 없다. 애욕과 비탄은 사랑의 욕망이 변형된 모습들이고, 그것들은 요동치는 음들을 통해 표현될 뿐이지, 결코 어떤 모방할 만한 조형적 형태를 갖추지 않는다. 즉 ‘고정되어 있는’ 조형적 모범이라는 매개 없이, 의지가 ‘변화하는’ 음을 통해 직접적으로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보자. 알반 베르크의 위대한 오페라 ‘룰루’의 마지막 장면에서 여주인공은 처참하게 살해당하며 비명을 지른다. 거기에는 오로지 마지막으로 삶을 희구하는 의지, 공포, 절망 등이 어떤 질서도 갖추지 않은 무시무시한 음을 통해 표현될 뿐이지, 절망의 모범적인 이데아 또는 절망의 원형이 조형적으로 묘사되는 일 같은 것은 없다. 음은 늘 우리의 감정, 욕망, 의지를 직접적으로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하철에서 또는 버스에서 졸며 또는 걸으며 이어폰을 통해 음악을 가장 친숙한 예술로서 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음악을 들을 때 일어나는 일은 무엇일까? 바로 우리 자신의 본성과 마주하는 일이다. 우리는 우리 마음이 어떻게 활동하는지를 음악에 비추어 보고 안다. 이것이 우리가 음악을 듣는 이유 아닐까? 흥겨운 음악은 우리 본성의 흥겨운 모습을 나타내며, 슬픈 음악은 우리 본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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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에 젖어 있음을 보여준다. 색깔 없는 우리의 마음은, 음악 속에서 비로소 활동하며 자신이 누구인지 나타내 보이는 선명한 색깔을 얻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속삭이는 음악과 함께 한평생을 살아간다.

서강대 철학과 교수

■ 용어설명 - 플라톤 ‘법률’, 쇼펜하우어 ‘의지와…’

‘법률’은 플라톤이 자신의 철학을 현실의 삶에 구현하기 위해 고심한 결과가 담긴 플라톤의 마지막 대작이다. 플라톤의 또 다른 대표작인 ‘국가’에서 예술이 비판적으로 논의된 것과 달리 ‘법률’에서는 예술의 장점이 부각된다.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1818)는 독일관념론의 문제를 주정주의(主情主義)적 입장에서 해결하려 한 저작이다. 한편으로 이 저작은 비관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서이며, 예술과 관련된 내용은 바그너를 비롯한 많은 예술가에게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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