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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게재 일자 : 2007년 11월 21일(水)
‘장항선 막차’ 타던 시골 간이역을 배웅하다
한달 뒤 사라지는 굽은 기찻길·정겨운 驛舍의 추억 페이스북트위터카카오톡밴드
3년 전부터 열차가 서지 않는 주산역. 역사는 허물어지고 없고, 낡은 역명판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 역명판에 적힌 전 역인 간치역도 지난해부터 열차가 서지 않는다. 철로변에 보이는 집은 20여년 전까지만 해도 열차 안에서 만난 주민들이 어른어른한 백열등 불빛 아래서 막걸리잔을 기울이던 주막 ‘풍년옥’이었다.
# 굽은 길이 더 아름답던 기찻길…장항선

장항선의 매력이라면 굽은 선로다. 철길은 나지막한 야산을 휘감으면서 마을과 마을을, 집과 집을 잇는다. 곡선의 길은 자연스럽다. 길이란 사람들이 사는 마을을 찾아 구부러지고 꺾어지는 법. 그렇다면 애초부터 길은 모두 곡선이지 않았을까. 장항선의 부드러운 선로는 마을과 마을을 잇는다. 철길 가의 집들을 아슬아슬 스쳐 지나면서 차창으로 담 너머가 들여다보이는 철길은 이제 장항선이 유일하지 싶다.

장항선 선로 위를 내달리는 열차도 특별하긴 마찬가지다. 경부선, 호남선은 물론 대부분의 철길을 달리는 열차들은 전기의 힘으로 움직이는 전동차 지만, 장항선을 오가는 열차는 아직도 디젤기관차다. 긴 기적소리와 함께 헐떡이며 오르막을 오르는 옛 모습 그대로다. 그래서일까. 장항선을 타면 규칙적으로 철커덕거리는 레일음이 유독 생생하다.

장항선 열차는 경부선 충남 천안역에서 온양온천을 지나고, 대천, 서천을 지나 종착역인 장항역까지 143.1㎞를 달린다. 장항선 철로가 놓여진 충청도 서쪽은 높은 산이라야 해발 200m 안팎. 그 구릉의 낮은 목을 골라 열차는 느릿느릿 달려간다. 시속 300㎞를 넘나드는 KTX의 시대에도, 장항선의 속도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앞으로는 사정이 다르다. 꼭 한달 뒤인 12월 21일 신창역 ~ 신례원역 구간과 주포역 ~ 남포역 구간이 직선화된다. 직선화되는 두 구간을 합치면 75.6㎞에 이른다. 전체 구간의 절반 정도가 쭉 뻗은 직선으로 이어지는 셈이다. 직선화의 대가로 열차는 속도를 얻겠지만, 대신 역전상회며, 역전다방이 있는 한적한 시골마을까지 열차가 찾아 들어가던 정겨운 모습은 잃게 될 터다.

# 장항선 열차에 잠겨 있는 오랜 추억들

도회지에서는 버스정류장이나 횡단보도를 옮기는 일에도 갖가지 이해관계가 난마처럼 얽힌다. 횡단보도를 옮기는 일쯤으로도 몇날 며칠 동안 인근 상인이나 주민들의 시위가 이어진다 해도 이상할 건 없다. 하지만 이쪽은 다르다.

장항선이 직선화되면서 문을 닫는 간이역이 생겨나고, 쭉 뻗은 선로를 따라 기차역이 이전해가지만, 마을은 조용하기만 하다. 하기야 시골 간이역 앞의 ‘역전상회’며 ‘역전다방’은 쇠락한 지 이미 오래고, 간이역들도 오래 전부터 하루 한 두사람이 이용하는 것이 고작이니 몇몇 기차역이 문을 닫거나, 선로를 걷어낸다고 해서 그닥 손해볼 일은 없는 탓이다.

하지만 느릿느릿 달리던 장항선의 추억이나 문닫는 간이역에 대한 아쉬움마저 없을까. 기차역 주변의 마을사람들에게 장항선은 아이들을 도회지로 유학을 보내던 길이기도 했고, 또 명절이면 밤이 이슥도록 도회지의 자식들을 기다리던 곳이기도 했다. 또 자식들에게 안겨줄 참기름병이며 고구마보따리를 이고 지고 가던 길이기도 했다.

이제 열차가 맹렬한 속도로 마을을 멀찌감치 돌아서 지나친다고 해도, 이들이 선장역이며 주산역, 기동역과 같이 선로를 따라 흐린 불이 켜져 있던 간이역을 열차의 속도만큼 빠르게 잊을 수 있을까.

타지사람들에게도 장항선은 추억을 환기시키는 이름이다. 중년 쯤의 나이라면 까까머리 학창시절에 낡은 교련복을 입고 통기타를 멘 채 장항선 완행열차를 타고 대천 바닷가를 향했던 경험이 한번쯤은 있지 않을까. 철 지난 겨울바다를 찾으려 장항선에 훌쩍 몸을 실었던 경험도 있으리라. 부산 해운대는 엄두도 못냈고, 동해안도 멀었던 시절. 그때는 해수욕장이라면 당연히 ‘대천’을 먼저 떠올렸다. 기억하시는가, 지금 장항선은 용산역에서 출발하지만, 그때는 서울역 뒤편 낡고 초라한 역사의 서부역에서 출발했었다.

# 소박한 간이역의 이정표 앞에서 역 이름을 불러보다

장항선에는 간이역이 유독 많이 남아 있다. 사실 말이 간이역이지 주산, 기동, 삼산, 오가, 주교, 간치역은 열차가 한번도 서지 않아 이미 역으로의 기능을 상실했다. 가로수가 아름다운 선장역과 학성역의 경우는, 한달 뒤에는 아예 역 앞을 지나는 선로가 폐선이 돼 기찻길마저 걷히게 된다. 비록 역의 기능은 오래 전에 잃었다지만, 이곳에는 간이역의 쓸쓸한 정취가 듬뿍 묻어난다.

한때 번듯한 역사까지 있었다던 주산역은 이제 건물은 자취도 없고, 역의 이름을 알리는 녹슨 이정표와 시멘트로 지은 자그마한 대합실만 남아 있다. 기찻길 옆으로 달리는 기차에 닿을 듯 함석으로 지붕을 올린 집이 서있다. 마을사람들에게 물어 알아낸 이 집의 유래는 이렇다.

“그 집 이름이 ‘풍년옥’이었지, 아마. 부근에서는 가장 손님이 많던 술집이었는데, 작부들도 몇명 거느리고 있었어. 양은 주전자에 담겨 나오던 막걸리 맛이 기가 막혔는데…. 그때는 시계도 필요없었어. 기적소리가 길게 울리면 그게 몇시 차인지도 모르고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곤 했지.” 20여년도 훨씬 더 지난 기억. 기차 안에서 만난 사람들과 술잔을 권커니 잣거니 했던 주막 ‘풍년옥’을 떠올리던 김시재(71)씨는 장항선이 ‘개량’되는 것이 못내 아쉽다고 했다.

장항에서 멈춰서던 기차가 내년 1월1일부터는 금강하구언을 넘어서 군산까지, 또 익산까지 이어진다지만, 그는 그것마저도 마땅찮다. 김씨는 “무어 그리 바쁘게 갈 것이 있느냐”며 “큰 길은 큰 길대로, 작은 길은 작은 길대로 남겨둘 줄도 알아야 한다”고 했다.

기찻길 옆에서 만난 마을 주민들은 모두 김씨와 같았다. 선장역의 가로수 길에서 만난 길문자(70)씨도, 간치역 부근의 건널목에 서있던 서용순(74)씨도 그랬다. 석유난로가 이글이글 지펴진 청소역에서 손을 녹이며 막차를 기다린다던 노부부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여러 사람들의 아쉬움 속에서 장항선의 간이역은 사라져가고 있다.

# 추억을 찾아가는 장항선 여정

이제 꼭 한달이 남았다. 굽이굽이 기찻길을 달려보는 것도, 작은 간이역에 내려서 보는 것도, 대천역과 장항역의 낡은 대합실 나무의자에 앉아보는 것도…. 한달 뒤면 공항을 닮은 번듯한 대천역에서 지하철을 타듯, 기계장치에 표를 밀어 넣고 기차를 타야 하고, 새로 지은 장항역에서 새것으로 번쩍거리는 대합실에서 열차를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열흘쯤 더 지난 내년 1월1일부터 기차는 장항에서 금강하구언에 놓인 철로를 따라 바다를 바라보며 군산으로 건너가고, 익산까지 거침없이 달려갈 것이다.

더 늦기 전에 ‘개량되기 전’의 쉬엄쉬엄 달리는 장항선을 타보자. 속도로는 결코 그려낼 수 없는 곡선의 부드러움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이제는 기차가 서지 않는 선장역을 찾아가 가로수길을 걸어보거나, 장항선의 역 중에서 가장 정취가 빼어나다는 청소역에 내려서 하릴없이 역 주변을 돌아보는 것도 권할 만하다. 장항선을 타고 종착역 부근쯤 가보겠다면, 그 여정의 목적지로 군산항과 신성리 갈대밭, 또 무창포해수욕장쯤을 택해 보면 어떨까.

보령·장항·군산=글·사진 박경일기자 parking@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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