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병합은 애초부터 무효”… 日 학자들, 日 꾸짖다

일본, 한국 병합을 말하다 / 미야지마 히로시, 와다 하루키 등 지음, 최덕수 옮김 / 열린책들

일본의 민초들은 도쿠가와(德川) 막부가 정권을 잡은 에도 시대(1603~1867)에 조선에 대한 동경을 강하게 품었다. 조선 통신사의 화려한 복장과 함께 처음 듣는 이국의 음악에 매혹됐기 때문이다. 마쓰리 등 일본의 각종 축제는 조선 통신사의 행렬과 춤을 모방한 것이 많다.

그러나 근대 이후 일본 민중의 조선인관은 멸시로 선회한다. 한국 강제 병합에 열광하며 조선인들에게 무차별 폭력을 휘둘렀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스다 쓰토무(일본 근세사) 메이지(明治)대 교수는 18세기 전반에 인기를 끌었던 공연인 ‘조루리’에서 그 답을 찾는다. 당시 일본의 인기 작가들은 음악 반주에 맞춰 이야기를 읊는 형식인 조루리 작품에 조선과 조선인을 등장시켰다. 조선이 일본에 복속되며 조선왕이 목숨을 구걸하는 내용이 나타났으며, 이는 각종 공연 작품에 전승돼 시간이 흐를수록 퍼져 갔다.

18세기 후반에 조선 통신사의 일본행은 격감했고, 일본에 의해 멸망한 조선인이 원한을 갖고 반역을 꾀하다가 실패하는 이야기가 재생산됐다. 이로써 일본 민중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조선인 멸시관은 20세기 초 한국 강제 병합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심리적 바탕이 된다. 스다 교수는 “‘한국 병합’으로부터 100년, 역사학도는 민중이라는 입장·위치에서 한일관계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스다 교수의 논문이 실려 있는 이 책은 일본의 역사학자 16명이 한국 강제 병합의 의미를 천착한 글을 모으고, 관련 사료를 첨가한 것이다. 현재 성균관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미야지마 히로시(조선사회·경제사) 교수가 2010년에 일본 이와나미 서점에서 간행하는 학술잡지 ‘사상(思想)’에 제안했던 특집 기획과 그에 따른 심포지엄의 결과물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여기에 참여한 학자들은 그동안 일본 우익의 패권 중심적 사고를 비판해 왔다. 이른바 ‘일본 내 소수의 양심적 지식인들’인 셈이다.

미야지마 교수는 “한국 병합이 낙후된 조선을 근대화시키는 계기가 됐다는 일본의 침략론은 일본이 ‘동아시아의 중심’이라는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해 생긴 역사 인식의 오류”라고 지적한다.

일본이 조선의 근대화를 촉진했다는 침략론은, 유교 모델을 수용한 조선이 정체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에는 근대적 소유권과 매우 유사한 토지 소유권 개념이 수백년 전부터 존재했고, 일본에는 없는 인쇄 기술과 서적의 보급 등 고도의 사회 문화적 기반이 있었다.

오가와라 히로유키(조일 관계사) 도시샤(同志社)대 교수와 재일한국인 학자인 조경달(조선 근대사) 지바(千葉)대 교수는 일본의 한국 병합이 조선의 유교적 민본주의를 파괴한 점에 주목했다. 오가와라 교수는 “조선 왕조에서는 원칙적으로 백성이 임금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는 유교적 민본주의 바탕이 강했다”고 봤으며, 조 교수는 “조선이 500년 이상 존속했던 것은 유교적 민본주의에 따른 지배 시스템이 구축돼 있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일본의 식민지배는 위로부터 아래를 찍어 누르는 폭력성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조선의 고유한 정치문화를 송두리째 말살시켰다는 것이다.

미즈노 나오키(조선근대사) 교토(京都)대 교수는 “일본의 지배를 받았던 조선인이 극심한 피해를 입었고, 불행을 맛보아야 했던 점, 그것이 현재까지 여러 분야에 걸쳐 아픔을 남기고 있다는 점을 뼈저리게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한반도 분단의 배경에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있었다는 점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와다 하루키(러시아사·현대 조선 연구) 도쿄(東京)대 명예교수는 “병합 조약은 애초부터 무효(null and void)였다고 주장하는 한국 측 주장을 인정하고, 국가적 합의(national consensus)로 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그는 19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총리가 ‘반성과 사죄’를 표명한다는 담화를 발표한 이후 일본은 과거 식민지 지배에 대한 책임 문제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보수 정권이 들어서면서 오히려 반동의 길을 걸어왔다는 점을 비판한다.

장재선기자 jeije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