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럼>한·미FTA ‘以後(이후)’를 두려워할 이유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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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호/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 교수·농업경제학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의 10월 국회 처리는 야당의 합의 번복과 물리적 저지로 끝내 무산됐다. 민주당은 한·미FTA의 후유증만 집중 부각하며 반대 공세를 이어가고 있어 향후 전망도 불투명하다.

시장 개방은 한국이 비교우위를 가지고 있는 상품을 수출하고 필요로 하는 식량과 자원 수입을 쉽게 하여 한국경제의 성장·발전에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일단 시장이 개방되면 손해를 보는 산업과 이익을 보는 산업이 필연적으로 생겨나게 된다. 시장 개방은 이들 산업 간의 이익 상충으로 인한 복잡한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고 조정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므로 그 자체가 성숙한 사회로 가는 길에 겪는 통과의례적 성격을 띤다.

이번 한·미FTA에서 여야 정치인들이 보여주는 행태는 성숙한 사회와는 거리가 멀다. 과거에 반대하던 사람들이 찬성하고, 또 과거에 협상을 시작했던 사람들이 비준을 반대하고 있으니 이는 정치가 갈등을 해결하고 조정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조장하고 증폭시키는 격이다. 국제협상마저 시민운동에 내주는 사태가 올지도 모르겠다.

한·미FTA는 미국에 비해 국제경쟁력이 낮은 산업, 특히 농업에 심각한 영향을 초래한다. 한국의 농업에 있어 한·미FTA는 정부의 보조금을 받아 연명하는 산업이 될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이익을 창출하고 확대 재생산하는 산업이 될 것인지를 가름하는 중요한 분수령이 될 수 있다. 단기적으로는 농업이 개방의 충격 속에서도 유지될 수 있는 조치가 있어야 하고 장기적으로는 농업·농촌·농민이 스스로 새로운 여건에 적응해 나가는 노력이 있어야 시장 개방에 따른 갈등을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시장 개방은 협상보다는 적응력과 신뢰의 싸움이다. 협상으로 유리한 조건을 얻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 FTA의 결과 어떤 나라의 어떤 산업이 이익을 얻을 것인가 하는 것은 각각의 나라와 산업의 적응력과 신뢰도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시장 개방으로 인해 넓어진 시장에서 외국 제품과 국산품 생산자들은 서로 새로운 상품에 대항하기 위해 어떻게 생산 기술을 선택하고 생산 품목을 조정할 것인지, 어떻게 상품을 개발하고 유통 방법을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고 결단을 내려야 한다.

일단 결단을 내린 다음에는 신속하게 자신을 새로운 환경에 맞도록 적응시켜야 한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과 1990년대 초반 세계무역기구(WTO) 출범 이후의 격심한 구조조정 과정을 통해 한국의 농업과 정부는 이미 상당한 적응능력을 보여줬다. 장기적으로는 적응력 있는 한국 농업이 시장 개방에 잘 적응할 수 있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국산 농산물이 시장 개방으로 인해 쏟아져 들어오는 외국 농산물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신뢰가 필요하다. 농산물은 겉으로 보아 그 품질을 판단하기 어렵고, 심지어 먹어 봐도 그 진실한 가치를 알기 어렵기 때문에 믿고 소비해야 하는 상품, 즉 신뢰재(credence goods)다.

한·미FTA 협상 과정에서 국내 농업과 농업인은 이미 상당한 자제심을 발휘해 많은 국민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이제는 지나친 주장과 극단적 시위를 그만두고 국민의 신뢰를 지키는 것이 농업을 위하는 길이다. 과격한 주장을 하는 농업인이 생산하는 농산물을 먹는 것은 내키지 않는 일이고, 극단적인 시위를 하는 농업인이 버티고 있는 농촌에 관광을 갈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인들도 농업은 협상으로 지킬 수 있는 게 아니라, 농업인 스스로의 적응력과 국민의 신뢰로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