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위장과 의태 입체파 회화와 닮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자연의 세계는 다양한 의태 사례를 보여준다. 독이 없으면서도 독사의 색띠를 의태한 소노란사막왕뱀(위)과 너도밤나무 잎, 거미 등 무려 5종을 흉내내는 재주나방 모충(아래).

현혹과 기만 / 피터 포브스 지음 / 이한음 옮김 / 까치

놀라운 책이다. 학문의 경계를 넘나드는 저자의 박학다식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과학과 예술, 역사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친 저자의 방대한 지식이 한 줄로 꿰어져 전개된다. 영롱한 구슬들을 꿰는 주제는 ‘의태(擬態)와 위장’이다. ‘의태’란 간단하게 말하자면, 동물이 몸을 보호하거나 쉽게 사냥하기 위해 주위의 물체나 다른 동물과 매우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당연히 생물학의 영역이다.

그런데 저자는 의태의 개념에서 시작해 미술과 문학, 역사를 넘나들며 인간 사회에서의 위장 개념까지 한눈에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펼쳐지는 인물들의 활약상과 그들의 학설은 흥미진진하기 그지없다. 학제 간 통섭에 기여한 책과 저자에게 주는 영국 ‘워릭 저술상’을 받을 만하다.

저자는 우선, 자연선택에 대한 찰스 다윈의 끈질긴 연구, 프리츠 뮐러의 새로운 의태 유형에 대한 연구 등을 소개하면서 책을 시작한다. 생물들은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온갖 수단을 강구한다. 눈에 잘 띄면 포식자에게 잡아먹힐 가능성이 그만큼 더 커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무줄기에 앉는 나방은 줄기와 비슷하게 짙은 색깔을 띠기 쉽고, 나뭇잎을 먹는 애벌레는 나뭇잎과 비슷한 녹색을 띠기 쉽다. 하지만 환경과 닮는 생존전략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위험하다’고 광고하는 치들도 있다. 독을 품고 있는 동물들이 으레 그런 전략을 쓴다. 치명적인 독을 품은 뱀, 맛이 없어서 새가 내뱉고 마는 무당벌레들이 그렇다. 이들은 눈에 잘 띄는 화려하고 선명한 색깔로 자신이 위험하다고 과시한다. 이를 무시하고 접근하는 포식자는 된통 당한 뒤에 다시는 그런 동물을 집적거리지 않는다. 이처럼 맹독을 지닌 동물들을 따라 하는 치들도 있다. 의태로 자신을 위험하다고 광고하는 것이다. 독이 없으면서도 독이 있는 곤충과 똑같은 화려한 무늬와 색깔로 자신을 드러낸다. ‘나도 위험하니 건드리지 말라’고 엄포를 놓는 것이다.

저자는 자연계와 과학자들의 실험실을 넘어 세계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졌던 의태에 대해 고찰한다. 이미 1890년대에 화가 애벗 세이어는 모든 생물이 완벽하게 위장돼 있다고 주장했다. 숨기거나 드러내는 전략은 화가들도 계속 써왔던 전략이다. 생물이 3차원의 몸을 캔버스 삼아 무늬와 색깔을 입힌다면 화가는 2차원의 캔버스를 3차원처럼 보이게 하는 색칠 기법을 만들어 냈다. 이때부터 자연계의 의태와 위장을 이용하려는 인간들의 노력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 시기엔 위장 전함, 은폐된 포, 나무 감시초소, 모조 철도 종점 등 다양한 장치들이 개발됐다. 심지어 전쟁에 쓰이는 위장술을 책임질 인물이 생물학자인지 화가인지를 놓고 영역 다툼이 벌어질 정도였다. 전장에서 활용됐던 위장 도색은 패션계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입체파 회화와 맞물려 발전하기도 했다. 의태에 관한 연구는 구체적인 사례들을 모으는 것에 그치지 않고 패턴 형성 전반을 이해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이후로도 의태 연구는 다양한 방향으로 전개됐다. 생태학과 유전학을 결합한 의태 연구가 진행됐으며, 나비 날개무늬의 유전과 사람 혈액형의 유전 사이에 놀라운 유사성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이는 곧 RH 혈액형으로 인한 유아 사망 문제를 해결하는 의료기술의 개발로 이어졌다. 또한 의태 문어, 새롭게 밝혀진 카멜레온의 채색 변화 등 의태에 관한 연구는 계속되고 있다.

한마디로 이 책은 의태와 위장을 20세기의 미술, 문학, 군사전술, 치료법과 연관지으면서 다양한 각도에서 살피고 있는 일종의 문화사 저작이다.

저자는 “위장과 의태는 기호의 거대한 제국에 속한 비언어적 의사소통 수단”이라며 “지구에 생물이 존재하는 한, 그들은 숨거나 위협하는 척하거나 놀라게 하거나 단순히 남이 만든 다소 멋진 무늬를 모방하는 새로운 방법을 계속 찾아낼 것”이라고 결론내리고 있다.

김영번기자 zeroki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