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골프 이야기>정환만 “8번 캐디, 88번 로커… 8번홀 8번 아이언으로 생애 첫 홀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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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퍼들마다 나름 ‘홀인원 무용담’을 갖고 있다. 하지만 공직 생활을 접고 지난해 세무사로 ‘인생 2막’을 시작한 정환만(60) 세무법인 오늘 부회장의 ‘홀인원 스토리’는 다소 엉뚱하다.

지난해 12월10일 경기 수원의 태광골프장에서 기록한 생애 첫 홀인원은 지각이 가져다 준 행운이었다. 이날 일행 모두가 티 타임에 늦어 자칫 ‘노 쇼(No show·부킹 시간에 나타나지 않음)’로 골프도 못 치고 그냥 집으로 돌아갈 뻔했다.

그는 이날 오전 11시58분에 티오프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일행들에게 휴대전화 문자로 티 타임 시간을 ‘12시48분’으로 잘못 찍어 보냈다. 호스트였던 그는 이날따라 평소보다 빠른 1시간30분 전 골프장에 먼저 도착했다. 그런데 프런트에서 티 타임이 30분도 안 남았다며 곧바로 준비하라고 했다. 그제야 자신이 동반자들에게 시간을 잘못 전한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는 동반자들에게 연락했지만 3명이 차량 한 대로 ‘카풀’을 하는 바람에 12시가 넘어야 골프장에 도착할 것 같다고 했다. 그는 프런트에 사정한 끝에 출발 시간을 늦췄다. 허겁지겁 달려온 일행과 티 샷을 마치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날 그는 북코스 8번홀(파3·125m)에서 8번 아이언을 잡았다. 당시 빨간색 공으로 쳤는데 그린에 올라간 공이 뒤 핀 쪽으로 굴러 홀로 들어가는 게 또렷이 보였다. 홀인원 기념품으로 골프공을 하려다 자신의 이름이 적힌 공을 ‘때리는 게’ 싫다는 생각에서 골프 양말 세트를 400명의 지인에게 돌렸다.

그에겐 이날 ‘8’이란 숫자가 유난히 많이 겹쳤다. 8번홀에서 8번 아이언으로 친 것 외에도 로커 번호가 88번이었고 자신의 팀에 배치됐던 캐디 번호도 8번이었다. 그는 홀인원 덕에 이날 83타를 쳐 자신의 베스트 스코어를 작성했다. 특히 후반 8번홀(파3·160m)에서도 홀인원을 할 뻔했다. 티 샷한 공이 홀로 향하더니 홀을 스치면서 홀 30㎝ 뒤에 멈춰 섰다. 지금도 그날 동반자들을 만날 때마다 “잘하면 홀인원을 하루에 두 번 구경할 수 있었을 텐데”라며 자신보다 더 아쉬워하고 있다. 이후 ‘8’이란 숫자만 보면 마음이 설렌다고 한다.

그는 옛 동료들과 지난달 태광골프장에서 홀인원 기념 라운드를 했는데 이번엔 동반자가 ‘릴레이 홀인원’ 사고를 쳤다. 일행 중 김영근 전 대전지방국세청장이 자신이 기록했던 북코스 8번홀에서 홀인원을 기록한 것.

그는 공무원 시절이던 2001년, 40대 후반에 남몰래 골프를 배웠다. 40년 공직 생활 중 국세청에서만 33년을 보낸 그로선 드러내 놓고 골프를 치는 게 어려웠다. 그는 “은퇴 후 골프와는 떨어질 수 없는 삶이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서 열심히 배웠다. 서울 종로구 안국역 근처 연습장을 끊었다. 이후 군대 동기가 보내 준 ‘골프입문’이라는 책을 달달 외우다시피 했다. 연습장에서 딱 한 달 배우고 이후에는 독학으로 골프를 쳤다. 당시만 해도 공무원 신분에서 골프를 배운다고 내세울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남들 눈에 안 띄는 지하연습장을 택했고, 출근 2시간 전에 연습장에서 골프를 쳤다.

골퍼들은 대개 생애 첫 라운드 때 지인들을 통해 ‘머리를 얹는’ 편이지만 그는 특이하게도 스스로 머리를 얹었다. 골프를 시작하고 1년 후에는 경기 고양의 벽제 쪽에 있는 올림픽골프장으로 갔다. 매주 휴일마다 갔다. 캐디에게 사정을 얘기하며 ‘팁을 더 줄 테니 잘 봐 달라’고 부탁해 처음 라운드를 했다. 캐디의 도움으로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조인’을 했다. 남들에게 골프 친다는 애기도 꺼내지 않았던 그는 이후 주말이면 늘 혼자서 이곳을 찾았다. 처음엔 모르는 사람들과의 라운드가 어색했던 그도 차츰 새로운 사람을 사귈 수 있다는 점이 더 좋았다.

그러다 2005년 충북 제천 세무서장으로 발령받고 난 후부터 지역의 지청장, 지원장, 경찰서장, 소방서장 등 ‘객지 생활’을 하고 있던 기관장들과 자주 어울렸다. 기관장들 역시 보는 눈이 많아 퇴근하고 6시 이후에 즐기는 ‘올빼미 골프’였다.

그는 요즘 80대 중반을 너끈히 친다. 공직에 있다 보니 필드에 나가는 건 부담스러워 연습을 많이 해 왔다. 퇴근 후 스윙 연습기와 퍼터를 늘 손에 잡고 필드에 나가지 못하는 한을 풀었다. 공직에서 물러나기 전에는 한 달에 한두 차례 꼽기도 힘들었지만 요즘엔 물 만난 고기처럼 ‘주 3회’ 필드를 누빈다. 골프 인생도 2막을 열며 뒤늦게 원 없이 골프를 치러 다닌다. 그동안 못 다녔던 한이라도 풀듯, 거래처를 비롯해 초등학교부터 중·고·대학·대학원별로 모두 골프 모임을 구성했다. 그는 “공직자들도 능력껏 자기 책임하에 골프를 떳떳이 즐길 수 있는 시대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3년 전 영하 10도의 매서운 추위 속에 골프를 치러 갔다가 세 차례나 미끄러져 ‘황천길’ 직전까지 다녀왔다고 한다. 라운드를 포기하고 싶었던 그는 열성적인 동반자들 때문에 싫은 내색도 못하다가 얼음 위에서 세 번이나 넘어져 손목 관절과 엉치뼈에 금이 가는 중상을 입고 6개월 동안 연습조차 할 수 없었다.

그는 “공무원 시절 안 보였던 납세자의 억울함을 알고 어려운 처지에 놓인 그들을 도와줄 수 있는 게 보람”이라면서 “큰돈은 아니지만 소년소녀 가장 등 주위의 어려운 이웃들을 돌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도 골프와 함께 ‘인생 2막’을 즐겁게 하는 힘이 되고 있다”고 전했다.

글=최명식기자 mschoi@munhwa.com
사진=심만수기자 panfocus@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