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 표본 1만8000점의 드라마틱한 사연

박물관의 나비 트렁크 / 한나 체카우·한스 치슐러 지음, 유영미 옮김 / 프로네시스

“만 일곱 살 이후, 네모 반듯한 창으로 햇살이 비쳐 들 때마다 나를 지배한 것은 단 하나의 열망이었다. 아침 햇살을 보자마자 내가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은 나비였다.”

러시아의 위대한 낭만주의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자전적 회고록 ‘말하라, 기억이여’(1966년)에서 한 말이다. 이 책 ‘박물관의 나비 트렁크’는 나보고프처럼 나비에 미친 한 연구자의 이야기다. 바로 독일 학자 아르놀트 슐체(1875∼1948)가 그 주인공이다.

나비 수집은 19세기 중반에서 20세기 중반까지 유럽에서 상당히 유행하던 취미활동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채집한 나비의 날개를 펴서 트로피처럼 유리 덮개가 달린 나무 상자에 보관했다.

그러나 슐체는 그런 평범한 나비 수집가가 아니었다. 아프리카와 중남미에 서식하는 나비를 연구하는 일에 소명의식을 느껴 나비 연구에 많은 시간을 들였고 1906년부터 70여 편의 학술 저작물을 내놓았다.

독일 본대학에서 지리학과 자연과학을 공부한 슐체는 1910년대 초반 아프리카 탐험을 거쳐 1920∼1930년대에는 중남미 지역을 누비며 나비 채집에 몰두했다. 1939년 슐체는 수십 년간 채집한 결과물을 안고 콜롬비아에서 독일로 떠났지만, 영국의 대서양 봉쇄에 걸려 배가 침몰하고 말았다. 귀한 연구 성과는 바닷속으로 가라앉았고 살아남은 슐체는 마데이라라는 곳에 마지막 둥지를 틀었다가 1948년 생을 마감한다.

하지만 미리 부친 나비 트렁크는 무사히 베를린에 도착했다. 이 트렁크는 2006년 베를린 자연사박물관에서 자료 조사 중이던 동물 일러스트레이터인 한나 체카우와 작가 겸 배우인 한스 치슐러에 의해 우연히 발견된다.

이 책은 바다를 건너온 이 트렁크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책에 따르면 ‘트렁크 41번/건조 물질’이라는 이름으로 등록된 트렁크에는 100여 개의 담뱃갑에 나눠 담은 1만8000여 점의 나비 표본이 잠들어 있었다. 이 책은 이처럼 드라마틱한 사연으로 시작한다. 나비에 미친 한 연구자와 그가 남긴 트렁크 하나 그리고 80여 년 만의 우연한 발견….

체카우와 치슐러는 박물관 직원의 도움을 얻어 종이봉투 안에 날개가 접힌 채 보관된 아름다운 나비를 복원하는 한편, 이 나비들을 수집한 인물의 생애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체카우는 이와 함께 87종의 나비를 골라 일러스트로 나비의 아름다운 색상을 생생하게 되살렸다.

슐체의 생애는 1950년 ‘식물분류학 연감’에 실린 추도사와 그가 학술지에 발표한 글, 일기 등을 토대로 생동감 있게 이야기를 풀어간다. 특히 슐체의 일기들은 낯선 곳에서의 아름답거나 위험한 순간들, 나비 채집의 행복과 어려움, 원시 자연과 접한 인간의 내면 등을 살펴볼 수 있다. 산뜻한 색감으로 다양한 나비의 모습을 세밀하게 담은 그림은 읽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한다.

김도연 기자 kdych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