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영국의 화가이자 판화가인 윌리엄 호가스의 대표적인 작품인 ‘진의 거리(Gin Lane)’(1751). 진으로 인한 당시 영국 사회의 폐해를 풍자하고 있다. 어젠다 제공
선술집의 모든 역사/시모다 준 지음,김지형 옮김 /어젠다
16세기에 일어난 독일농민전쟁과 18세기에 일어난 프랑스혁명이 모두 ‘이곳’에서 시작됐다. 당시의 농민과 혁명가들은 이곳에 모여 계획을 짜고, 민중에게 동참을 호소했다. 이곳은 또 돈을 빌려주는 은행이 되기도 했으며, 지역의 크고 작은 사건들을 판결하는 재판소, 공동체의 의견을 논의하는 집회소의 기능도 했다. 그런가 하면 외과 의사가 수술을 하는 병원이 되기도 했다. 이곳은 이밖에 도박, 연예, 매춘, 범죄 등이 공공연히 행해지는 장소이기도 했다.
이처럼 ‘복합 기능’을 가진 ‘이곳’은 도대체 어디였을까.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바로 선술집이었다. 이 책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한 선술집의 역사를 흥미롭게 소개한다. 일본 우쓰노미야(宇都宮)대 교수로 유럽 문화에 천착해온 저자는 유럽과 이슬람, 한국과 중국 등 동양의 역사를 넘나들며 선술집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낸다. 세계 선술집의 역사를 키워드와 함께 짤막하게 소개해 부담 없이 읽어내려 갈 수 있다.
선술집은 통상 ‘선 채로 간단하게 술을 마실 수 있는 술집’을 뜻한다. ‘일본국어대사전’도 선술집을 ‘가게 앞에서 편하게 술을 마실 수 있는 술집’으로 설명한다. 저자는 그러나 선술집을 좀 더 엄밀하게 정의한다. ‘금전(곡물, 조개껍데기, 금속 등 현물화폐도 포함)을 담보로 주류를 제공하는 영업 공간’으로 말이다. 이 같은 정의에 따라 본래 커피를 주로 팔았던 카페가 주류도 취급했다면 선술집의 범주에 넣었다. ‘금전과 바꿔 술을 마시는 곳’이 저자가 말하는 선술집인 것이다.
그렇다면 선술집은 언제부터 존재했을까. 책에 따르면 문헌 자료에 선술집이 등장한 것은 기원전 18세기 무렵이다. 기원전 1750년 무렵 바빌로니아 왕국 함무라비 왕이 제정한 ‘함무라비 법전’엔 ▲선술집 여주인은 맥줏값을 은이 아닌 보리로 받을 것 ▲선술집에서 모의할 때는 사전에 통보할 것 ▲여자는 선술집에 가지 말 것 등의 규정이 들어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3800년 전인 고대 문명 시대부터 선술집이 집회 장소이자 매춘 장소였음을 엿볼 수 있다. 람세스 2세가 통치하던 기원전 1300년경 고대 이집트 왕도(王都)에도 선술집이 있었다. 의자를 갖춘 가게에서는 맥주, 와인, 대추야자의 증류주 등 다양한 종류의 술을 팔았다. 특히 맥주는 고대 이집트에서 ‘국민 음료’였다. 음료라기보다는 영양분을 얻는 음식에 가까웠던 것.
중세와 근세의 영국 선술집은 커뮤니티 센터로서의 기능을 톡톡히 했다. 비즈니스 모임과 각종 주민 모임의 장소였으며 심지어 투표소, 연설 장소, 은행, 재판소, 극장, 음악 공연장, 우체국, 이발소, 직업소개소의 기능도 있었다. 또 식료품, 의류, 소금, 양초, 담배의 유통 장소이기도 했고 닭싸움, 복싱, 볼링 등 다양한 엔터테인먼트도 행해졌다. 유럽의 중·근세는 선술집의 전성기로 선술집의 ‘복합 기능’ 역시 가장 활발하게 전개됐던 시기였던 것. 하지만 선술집의 복합기능은 프랑스 혁명 이후 도시에서 서서히 쇠퇴해갔다. 공업화와 더불어 가속화된 복합기능의 쇠퇴는 19세기에 등장한 빅토리안 펍, 뮤직홀, 음악 카페, 카바레 등 새로운 타입의 도시 선술집의 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들 공간은 도시 대중의 욕구에 맞춰 오락 위주의 쇼 비즈니스가 중심이 되면서 복합기능의 선술집은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됐다.한국의 선술집 역사를 언급한 대목도 눈길을 끈다. 저자는 “한국에 오래전부터 있었던 선술집은 주막”이라며 주막 외에도 서서 마시는 곳이었던 목로주점, 서울의 귀족 미망인이 경영했던 내외주점, 젊은 여성이 술을 따르고 손님을 즐겁게 하는 색주가라는 세 가지 형태의 선술집이 있었다고 소개했다.
저자는 그러나 “한국에서 선술집은 거의 발달하지 않았다”며 그 이유는 무상 접대의 정신이 뿌리 깊게 자리 잡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책의 두드러진 미덕은 무엇보다 선술집의 역사를 통해 유럽 등 세계사의 이면을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는 점이다. 선술집이 걸어온 발자취에 얽히고설킨 당대의 다양한 사회상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선술집의 ‘창’으로 엿본다면 유럽 역사의 살아있는 현장과 그 특징이 보일 것이다”고 말했다.
김도연 기자 kdychi@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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