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러고도 正常국가라고 할 순 없다

김종호/논설위원

‘죄송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런 유서와 함께 집주인에게 줄 70만 원을 5만원권 14장으로 봉투에 넣어 남기고, 서울 송파구의 반(半)지하 셋방에서 지난 2월 26일 자살한 세 모녀(母女)의 가계부가 긴 여운을 남기고 있다. 12년 전에 남편이 세상을 떠난 이래 올해 60세인 여성이 식당에서 일하고 받은 적은 돈으로 병마에 시달리는 두 딸과 함께 이어온 고단한 삶의 눈물겨운 흔적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수도 요금 2만600원, 콩나물 1000원 등 세세하게 적은 생활비 지출 항목 중에 ‘고양이 사료 2만6950원’만 해도 그렇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만큼 가난한 형편에 애완동물의 사료값으로 돈을 허비한 것부터 이해할 수 없는 처사라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복지 제도를 최대한 이용할 시도조차 하지 못한 무지(無知)를 탓하는 사람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유일한 소득원이던 여성 가장이 팔을 다쳐 더 일할 수 없게 됨으로써 수입이 완전히 끊긴 세 모녀가 죽는 순간까지도 이웃과 사회에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했던 사실에 가슴 아파한 사람이 대다수였다. 이웃과 사회와 국가에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삶의 고단함에 대한 위로(慰勞)를 고양이로부터 받으며 살았던 것으로 보여서 더 그랬다. 사회와 국가기관이 해야 할 역할을 고양이가 한 셈이어서, 세 모녀의 가계부가 국가의 존재 이유에 대해 새삼 되새겨 보게도 한 것이다.

이러고도 정상(正常)국가라고 할 수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게 할 만큼 제 역할을 못하는 무능(無能) 국가기관이 한둘이 아니다. 심지어 국가 안보의 중추기관까지 그렇다. 지난해에 이어 또 검찰의 압수수색 대상이 되기까지 한 국가정보원이 적나라한 예다. ‘탈북 화교(華僑) 출신의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 피의자에 대한 증거 위조 혐의다. 국정원은 검찰을 거쳐 법원에 제출한 간첩 피의자의 북한 출·입경(出入境) 기록이 중국 현지 정보원을 통해 중국 공안 당국으로부터 발급받은 것이라고 주장해왔지만, 자살을 시도한 해당 정보원은 자신이 위조했다면서 국정원도 이를 알고 있었다는 식으로 밝히고 있다. 국정원이 자신들의 주장과 달리 위조를 지시하거나 묵인했더라도 큰 문제지만, 일개 정보원의 거짓말에 속았을지라도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어느 경우에도 국가 최고 정보기관에 대한 국민 신뢰를 스스로 붕괴시키며 국제사회에서 웃음거리를 자청한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문화일보가 지난 7일 단독 입수·보도한 그 정보원의 유서는 국정원에 대해 ‘국가조작원’이라고 비아냥거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간첩 피의자에 대해선 ‘간첩이 분명하다’면서, 야당 지도자들에게 자신의 사건을 정치에 악용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과연 자살하려고 한 것인지부터 석연찮다. 하지만 국정원은 모든 국가의 정보기관이 철저히 신분을 감추는 비밀 정보원까지 노출시켰다. 간첩 피의자가 실제로 간첩 행위를 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지만, 억울하게 누명을 쓴 피해자인 것으로 둔갑시키는 어이없는 결과를 만든 것일 수도 있다. 정보원 세계에서는 이쪽저쪽에 두루 발을 걸친 사실을 숨긴 채, 때로는 이쪽을 위해 때로는 저쪽을 위해 정보활동을 벌이는 사람이 수두룩하다는 것은 정보 수집과 거리가 먼 일반인들에게도 상식이다. 다른 나라의 정보원이나 간첩인 사실을 알면서 더러는 역(逆)이용하기도 한다. 이중 또는 삼중 간첩까지도 있을 수 있다. 대한민국과 북한·중국을 사이에 두고 그럴 개연성은 더 크다. 간첩 피의자, 자신이 서류를 위조했다고 주장한 정보원 등이 중국 국적이어서 중국 정부가 국익 보호 차원에서 진실을 끝까지 감추고 있을 개연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때로는 공식적으로는 모르는 척하며 역량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은 국정원이 다른 어떤 국가기관보다 더 잘 알 것이다. 그런데도 국정원은 그러지 못하고 있다.

공작이 필수인 첩보·정보전쟁 한복판에서 치밀하고 은밀한 활동으로 국가 안보를 비롯한 국익을 지켜내야 할 국정원은 명백한 위법(違法)뿐 아니라 무능과 기강 해이도 죄악(罪惡)에 해당한다. 국가의 위기를 자초하기 때문에 더 그렇다. 국정원을 전면 재정비하면서 역량을 획기적으로 강화하는 일이 절실하고 시급하다. 박근혜 대통령이 결연히, 그러나 조용하게 나서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