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 파괴하는 ‘독버섯’…‘모멸감’을 해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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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멸감 / 김찬호 지음, 유주환 작곡 /문학과지성사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김지운 감독의 영화 ‘달콤한 인생’(2005)이 탄생시킨 명대사다. 강 사장(김영철 분)의 신임을 받던 선우(이병헌 분)는 어느 날 조직의 배신을 맛본다. “정말 날 죽이려고 했느냐”며 총을 겨눈 선우에게 강 사장이 던진 이 한마디는 한 이동통신 광고와 개그 프로그램에서 패러디되며 ‘국민 유행어’가 된다.

영화가 개봉된 지 10년이 돼가는 데도 여전히 인터넷에선 이 대사를 인용한 글과 사진이 넘친다. 영화보다 강력했던 패러디의 후광을 입기도 했지만, 인간이면 누구나 모욕감 혹은 모멸감 앞에 (그것도 꽤 자주) 노출되기 때문 아닐까. 또한 이 대사는 사람에게 목숨보다 ‘중한 것’이 있음을 암시한다. 강 사장이 그토록 아끼던 선우를 죽이려고 한 이유가 고작(이 아니라는 건 느껴본 사람은 알 터) ‘모욕’이라는 감정인 걸 보면 말이다.

이 책은 모멸감을 화두로 인간의 존엄을 이야기한다. 상관관계가 잘 와닿지 않는다면 앞서 제시한 영화의 장면을 다시 떠올려라. 모욕감을 느낀 강 사장은 선우를 죽여 ‘자존심’을 지키고 싶다. 다시 말해 그에게는 살인이 ‘자존감’을 되찾는 길이다. 모멸감이 개인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어떻게 확대 재생산되는지 보여준다.

즉 모멸감은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가장 큰 적이다. 그래서 저자는 ‘모멸감’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모욕을 쉽게 주는 사회와 모멸감을 쉽게 느끼는 마음 모두 위험하다”며 “모멸감을 덜 느끼는 사회가 좋은 사회”라고 밝히고 있다. 모멸감의 실체를 인문학적으로 규명한 최초의 국내서다.

책은 비하, 차별, 조롱, 무시, 침해, 동정, 오해 등 7가지 감정의 스펙트럼을 통해 모멸감의 원인과 상황을 드러낸다. ‘모욕하고 경멸하는 것, 즉 마음으로 낮추어 보거나 하찮게 여기는 것’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확장해 명확하게 분리할 수 없는 개념들을 조망한 것.

이를 위해 저자는 연구서부터 소설, 신문기사, 영화, 설문조사, 라디오 프로그램의 사연, TV 다큐멘터리까지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 다양한 사례들을 펼쳐놓는다. 피부에 와닿는 예들이 책을 촘촘한 학술서와 말랑말랑한 에세이를 넘나들게 한다.

장애인에게 보내는 동정의 시선, 면접관의 인신공격성 질문, 아우슈비츠의 배설물 고문 등 독자들은 익숙하고 당연해서 지나쳐 버렸던 각자의 순간을 떠올릴 것이다. 모멸을 주었거나, 반대로 받았던 그 순간 말이다. 어느새 책에서 눈을 떼고 ‘후’하고 한숨을 내쉴지도 모른다. 저자 역시 책을 쓰면서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모멸감을 주었는지 깨닫고, 한동안 집필을 중지했다고 한다.

‘모멸감’을 해체·분석한 3장 ‘모멸의 스펙트럼’을 넘어서면 저자의 집필 의도가 한층 명백해진다. 4장 ‘인간적인 사회를 향하여’는 어떻게 하면 ‘모욕감을 덜 느끼는 사회’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지 제시한 부분이다. 여기에서 그는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상당수 ‘감정 노동자’들이 수없이 반복되는 모멸감과 싸우고 있다면서 매뉴얼과 시스템 이외에도 ‘손님은 왕이다’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 문화적 방어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모욕 감수성’이라는 개념을 제안해본다. 젠더 감수성, 장애 감수성처럼 인권 감수성 등은 이제 익숙한 말이 되었다. 이 개념들을 내세우면서 담론을 만들고 사람들의 성찰을 이끌어낸 운동과 거기에 맞물려 전개된 정책의 성과는 적지 않다. 성희롱의 예를 들어보자. 1980년대까지만 해도 그 말은 매우 낯설었다.(중략) 그러한 성과를 토대로 모욕 전반에 대한 감수성을 사회적으로 끌어올리는 방안을 구상할 수 없을까.”(218쪽)

책은 ‘모멸감을 쉽게 느끼는’ 개인을 향한 따뜻한 속삭임도 잊지 않는다. 5장의 소제목(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누가 나를 모욕한다 해도/감정의 주인이 되려면/행복감은 우월감이 아니다)은 최근 불고 있는 ‘힐링’ 트렌드 서적을 떠올리게 한다.

다만 책의 앞 부분에서 첨예하게 모멸감에 대한 분석과 고민을 마친 독자라면, 이 5장이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그저 ‘괜찮아’라고 다독이는 책 속 내용과는 다르다. 막연한 위로보다 자발적인 지적 탐구가 훨씬 ‘위안’과 ‘안도감’을 준다는 걸 깨닫게 된다.

뒤늦게 1, 2장을 언급한다. 빽빽한 학술서를 꺼리는 독자들은 3장부터 읽어나가도 무방하다는 지극히 ‘경제적인’ 판단에서다. 1, 2장은 위계서열과 힘의 우열, 귀천에 대한 강박, 인종주의와 콤플렉스 등 왜 모멸감이 한국인의 일상을 지배하게 됐는지를 사회과학적으로 분석한 부분이다. 개인의 감정 문제에 천착하기보다 감정을 통해 사회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싶다면 빼놓지 말고 정독하시기를.

개인과 사회가 ‘모멸감’을 직시해야 하는 건 결국 존엄해지기 위해서다. ‘월든’에서 헨리 소로가 그랬던 것처럼 ‘삶이 아닌 것은 모두 때려 엎자. 삶이 아닌 것은 살지 않기로 하자. 삶은 그처럼 소중한 것이기에’.

PS: 이 책이 특별한 이유가 또 있다. 작곡가 유주환이 책 내용을 바탕으로 만든 10곡이 부록으로 들어 있다. 인문과학서적에서 영감을 받은 음악은 또 어떤 울림을 줄까.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