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힘든 시기를 이겨내고 19년 만에 영화 ‘시선’으로 복귀한 이장호 감독은 인터뷰 내내 영화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쏟아냈다. 하얗게 물든 머리를 뒤로 묶은 그가 자신을 기다려준 팬들에게 환한 웃음을 보내고 있다. 임정현 기자 theos@munhwa.com
그가 친구인 최인호의 소설 ‘별들의 고향’을 영화로 만들며 데뷔했을 때 충무로가 발칵 뒤집혔다. 이 영화는 개봉 105일 만에 46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대성공을 거뒀다. 당시 신문 기사에 따르면 ‘안간힘을 써봐야 관객 3만 명 동원이 고작’이던 시절에 그의 영화는 15배 이상의 흥행 기록을 세웠다. 신문들은 ‘한국 영화계에 이변(異變)이 일어났다’고 대서특필하며 그를 치켜세웠다. 1974년의 일이다. 이후 그는 ‘어제 내린 비’(1974년), ‘그래 그래 오늘은 안녕’(1976년) 등을 연이어 내놓으며 승승장구하다 1976년 대마초 사건으로 4년 5개월 동안을 손발이 묶인 채 보냈다. 그러고는 재기작 ‘바람 불어 좋은 날’(1980년)을 발표했고, ‘어둠의 자식들’(1981년), ‘바보 선언’(1983년) 등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의 인기는 조금씩 식어갔고, 작품도 현실과 타협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무릎과 무릎 사이’(1984년), ‘어우동’(1985년), ‘이장호의 외인구단’(1986년) 등을 만든 후 그의 영화인생은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연이은 흥행 참패를 겪으며 나락으로 떨어졌던 이장호(69) 감독이 돌아왔다. 1995년 ‘천재 선언’을 연출한 이후 19년 만의 복귀다.
이 감독이 복귀작으로 선택한 영화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순교(殉敎)와 배교(背敎) 사이에서 갈등하는 기독교인을 그린 영화 ‘시선’이다. 그는 ‘바람 불어 좋은 날’ 개봉 즈음 한 목사를 만났고, 그 목사로부터 “좋은 영화를 계속 만들어달라. 목회자가 할 일을 좋은 영화 한 편이 대신한다”는 말을 듣고는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후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살아온 이 감독은 4년 전 장로가 됐다.
지난 17일 개봉한 ‘시선’은 21일 현재 누적 관객 수 8674명(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기준)을 기록했다. 비교적 저조한 성적이지만 이 감독은 22일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지금 내 영화 흥행 걱정을 할 때가 아니지 않으냐”는 말부터 꺼냈다. “가슴이 너무 아픕니다. 세월호 실종자들의 무사귀환을 위해 매일 기도하고 있어요.”
그는 이번 영화를 “내 영화인생 중 ‘참회기’를 여는 첫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이 감독은 백지 상태에서 영화를 시작한 후 지난 40년간 감각기-고뇌기-방황기-시련기를 거쳐 참회기에 들어섰다고 설명했다. 그의 삶에 큰 변화가 있을 때마다 영화의 방향성도 달라졌다.
“요즘 활동하는 젊은 감독들은 학교에서 영화에 대해 배우고, 전문적인 훈련도 받은 후 영화계에 들어오지만 제 영화인생에는 그게 없었어요. 영화 검열관이었던 아버지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수많은 영화를 접해 왔어요. 제목과 내용도 모르고, 그냥 화면만 본 거죠. 또 고교시절에는 최인호와 함께 소설을 탐닉했고요. 그런 상태로 영화판에 들어가 신상옥 감독 밑에서 조감독으로 일하다 덜컥 ‘별들의 고향’을 만들었어요. 영화감독이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감각만으로 영화를 연출했죠. 그러다 대마초 사건으로 4년 넘게 쉬면서 고뇌하며 한국영화의 리얼리즘을 다시 회복시켜야 한다는 의식이 생겼어요. 그렇게 다시 영화를 만들다 어느 순간 인기가 식은 것을 느꼈고, 현실과 타협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는데 그게 오버하다 보니 ‘무릎과 무릎 사이’ ‘어우동’까지 간 거죠. 한마디로 돈독이 올랐어요(웃음). 그 뒤로는 모든 게 내 뜻대로 안 되고, 영화는 제작하는 족족 망했어요. 슬럼프를 겪으며 내리막길로 치달았죠. 하지만 성경을 읽으며 나 자신이 바뀌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관객들에게 빚을 졌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돈과 인기, 명예만 생각했지 관객에 대한 배려는 일절 없었어요. 그렇게 이어온 제 영화인생을 반성하며 참회의 의미로 ‘시선’을 만들었어요. 이젠 계속 한 길로 가야죠.”
하지만 이 감독은 자신이 거쳐온 지난 시간들을 모두 부정하지는 않았다. 특히 한국영화를 현실과 접목시키기 위해 애쓴 부분에 대해서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영화를 만들 수 없었던 시기에 동료들이 만든 영화를 많이 봤어요. 그랬더니 한국영화가 현실에서 텍스트를 찾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 나온 영화 속에서 텍스트를 찾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는 게 보이더군요. 5·16군사정변 이후 영화 속에 사회 지도층의 부정부패 등 현실을 그리지 못하게 했어요. 그렇게 10여 년이 흐르다보니 영화인들이 거기에 길들여진 거죠. 예전에는 ‘아리랑’ ‘오발탄’ ‘마부’ 등 사회 현실을 고스란히 담은 리얼리즘 영화가 만들어져 대중과 호흡했잖아요. 그래서 ‘내가 영화를 다시 만들게 되면 리얼리즘 회복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때 이어령 선생께서 ‘재래식 화장실에 오래 있으면 악취를 못 느끼는데 이장호가 신선한 공기를 쐬서 아주 큰 걸 발견했다’고 말해줬어요. 그렇게 나온 작품이 ‘바람 불어 좋은 날’이죠. 그때부터 젊은 영화인들이 내 조감독으로 모여들었고, 배창호, 장선우, 선우완, 박광수 등 제 조감독 출신들이 감독으로 데뷔하면서 현실을 텍스트로 한 한국영화가 많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그는 그렇게 암울한 시기에 사회성 짙은 작품을 연출하며 ‘의식 있는 감독’으로 비치기도 했다. 특히 사회에서 소외된 세 청춘의 모습을 그린 ‘바보 선언’은 당시 젊은 관객들을 열광시켰다. 하지만 이 감독은 이 영화를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만들었다”고 토로했다.
“‘바보 선언’은 제 이기심이 만들어낸 사생아적 작품이에요. 당시 우리나라 영화진흥책이 잘못돼 있었어요. 분기마다 한국영화 한 편을 만들어야 외화를 수입할 수 있는 ‘외화수입쿼터제’가 있었죠. ‘어둠의 자식들’은 어찌어찌하며 만들었는데 속편은 시나리오가 사전 검열에서 반려 당했어요. 원작자 이름과 제목도 사용할 수 없었고요. 그런 상황에서 제작자는 ‘계약을 했으니 아무 영화나 빨리 만들라’고 재촉했고, 저는 ‘이제 그만할 때가 됐구나’하는 생각으로 대충 가짜 시나리오를 만들어 검열을 받았어요. 그러고는 아무 준비도 없이 배우와 스태프를 이끌고 이화여대 앞으로 갔죠. 배우들은 자신들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김명곤은 길옆에서 절름발이 연습을 하고 있었고, 이보희는 그냥 막연히 기다리고 있었죠. 저는 주변 풍경을 찍으며 천천히 시간을 떼웠죠. 또 ‘이 영화는 감독의 책임이 없다’는 메시지를 담기 위해 영화 초반에 감독이 옥상에서 투신하는 장면을 넣었어요. 그 장면은 제가 직접 출연했고요. 그런데 3분의 2쯤 찍었을 때 편집기사가 ‘이 감독, 이 영화 정말 독특해’하면서 가편집본을 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봤더니 제가 의도한 것과는 달리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더라고요(웃음). 갑자기 의욕이 생겼고, 마무리에 매진했죠. 제작자는 완성본을 보고 크게 실망했지만 흥행에는 성공했어요. 당시 기자들에게 ‘이건 내 영화가 아니라 전두환 정권과 합작한 작품’이라고 말했어요. 제게 반항의 에너지를 줬으니까요(웃음).”
이 감독이 19년 전 놓았던 ‘메가폰’을 다시 들게 된 계기는 절망을 딛고, 새 삶을 찾은 자신의 체험을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서다. 그는 “애벌레로만 살던 내가 나비가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는 말로 지금의 심정을 전했다.
“제가 손 놓고 있던 시기를 주변에서는 ‘공백기’라고 하는데 제게는 ‘절망기’였어요. 뭘 해도 안 되고, 이뤄질 것 같다가도 깨지고, 그러다보니 두려움이 커졌어요. 또 후배 감독들이 치고 올라오는 걸 보며 착잡했고, 자식들에게 패잔병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견디기 힘들었어요. 그걸 신앙으로 극복한 거죠. 그전에도 교회에 다녔지만 그저 매사 순조롭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정도의 기복적 신앙생활을 해왔어요. 하지만 고통을 겪으면서 ‘하나님이 나의 노예근성을 떨쳐내기 위해 강제로 밀어내는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고, 제 영화 시각도 바뀌게 됐죠. 영화를 통해 많은 사람에게 이런 느낌을 전하고 싶어요.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들에겐 감동을 주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저를 ‘미친놈’이라고 생각하겠죠. 그렇게 좁은 길을 선택했어요. 지금 씨를 뿌려놓으면 제가 죽은 뒤에도 계속 무성하게 자라겠죠.”
이 감독에게 ‘그래도 영화를 계속 만들려면 자본을 비롯해 여러 동력이 필요하지 않으냐’고 묻자 “CJ보다 더 든든한 ‘빽’이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돈을 끌어들이고, 흥행을 고려해 영화를 만드는 그런 부분에 있어서 저는 이제 무능해요. 그런데 때가 되니 영화진흥위원회에서 돈을 대주고, 또 자연스럽게 길도 열리더라고요. 정말 든든해요. 물론 영진위 지원금을 받기 위해 행정소송을 하는 등 사이사이 시련도 많았지만 훈련이 돼서 잘 이겨낼 수 있었어요. 소송을 진행하는 동안에 시나리오의 치명적 결점을 발견하고, 수정했어요. 만약 순탄하게 지원금이 나왔으면 그 결점을 발견하지 못했겠죠. 또 촬영 과정도 쉽지 않았어요. 캄보디아에서 촬영하려고 정해놓은 장소에 지뢰가 있거나 날씨가 안 좋아 찍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어요. 하지만 지뢰를 피해 옮겨 간 장소가 원래 장소보다 더 좋았고, 비가 오면 비오는 대로 찍다보니 더 훌륭한 장면이 나왔어요. ‘천수답 연출’이 성공한 거죠(웃음).”
‘거장’에게도 오랜만에 벌인 현장은 만만치 않았다.
“처음 촬영현장에 가서 깜짝 놀랐어요. 스태프들이 모두 나이 어린 친구들이더라고요. 그 친구들이 못 미더운 게 아니라 낯설게 다가왔어요. 나중에 물어보니 스태프들도 제가 많이 낯설었다고 하더라고요(웃음). 또 제가 디지털 동시녹음 등 새로운 시스템을 잘 모르잖아요. 그런데도 선뜻 충고하기 어려웠겠죠. 그래도 조심스럽게 찾아와서 “감독님 그럴 때는 그렇게 하시면 안 돼요”라고 말하더라고요. 처음에는 심한 모욕감을 느꼈는데 차츰 호흡이 맞아가더군요. 사실 영진위에서 지원금이 반려됐던 이유 중에 ‘감독이 노령이기 때문에’라는 내용이 있었어요. 현장에서도 제가 방해가 될까봐 걱정했었어요. 그런데 악조건 속에서 촬영이 진행되며 스태프들이 하나둘씩 병에 걸리고, 피로감이 누적돼 주저앉았지만 저는 끝까지 꿋꿋하게 버텨냈어요. 저는 지옥훈련을 마친 상태잖아요. 그러면서 제가 느꼈던 모욕감을 말끔히 씻어냈죠(웃음).”
이 감독은 차기작으로 96명의 베트남 ‘보트피플’이 우리 원양어선 선원들에 의해 구조되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 ‘96.5’를 준비 중이다. 또 최인호의 유고집인 ‘눈물’에 대한 회신을 영화로 만들 계획이다.
“베트남 ‘보트피플’ 이야기는 방송 다큐로 나간 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했어요. 선원들과 베트남 난민들의 교감을 잔잔하게 펼쳐낼 겁니다. 또 최인호에게 영화로 편지를 쓰려고 해요. ‘눈물’이 ‘사랑하는 벗이여’로 시작하거든요. 인호가 대중을 상대로 제게 편지를 썼듯 저도 대중을 위한 영화로 회신을 보내야죠.”
인터뷰=김구철 차장(문화부) kcki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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