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서 이기려… 주먹 대신 모욕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알게 모르게, 모욕감 / 윌리엄 어빈 지음, 홍선영 옮김 / 마디

제목을 ‘요즘 말’로 우선 바꿔보자. ‘모욕’ 대신 ‘디스(dis)’라고 하면 책장을 넘기기가 훨씬 수월해진다.

디스리스펙트(disrespect·무례)의 준말, 상대방을 공격하는 힙합 하위 문화 ‘디스’는 최근 상대를 폄하하는 말이나 행동을 일컫는 용어로 의미를 확장했다. TV를 켜보면 ‘디스’가 널렸다. 인기 예능프로그램은 출연자 간의 ‘디스’와 ‘맞디스(디스를 당한 상대방이 이를 맞받아치는 것)’, 스스로의 치부를 드러내 큰 웃음을 유발하는 ‘셀프 디스’로 이뤄져 있다. 타인의 모욕감에 묘한 쾌감이 느껴진다. 걱정 마시라, 나쁜 게 아니다. 남을 모욕하고픈 욕구 그리고 모욕을 당한 후 겪는 고통의 감정은 모두 본능이다. 뭐, 저자가 제대로 연구한 게 맞다면. (모욕적 표현이다. 책에 나온 ‘교묘한 비꼬기’ 방식을 활용했다.)

한마디로 ‘모욕에 대한 책’이다. 우리는 왜 서로 모욕을 주는지, 모욕은 왜 그렇게 고통스러운지, 모욕에 대처하는 방법은 없는지, 남을 모욕하고픈 충동은 어떻게 제어할 수 있는지.

‘순수 철학’보다 다른 분야와의 경계에 놓인 ‘잡종’에 더 관심이 많은 윌리엄 어빈 미국 라이트주립대 교수가 철학, 심리학, 문화 연구를 통해 위 질문에 답한다. 어빈 교수는 앞서 스토아철학(금욕과 평정을 최고의 선으로 여기는 기원전 3세기∼기원후 2세기의 그리스 로마 철학)을 다룬 ‘직언(A guide to the good life)’으로 현대인에게 ‘평온한 삶’의 기술을 제시한 바 있는데, 이번에도 스토아학파의 조언을 모욕 ‘치료제’로 나눠준다.

흥미로운 건 예능 프로그램에서 자주 접하는 ‘맞디스’와 ‘셀프 디스’가 모욕에 대처하는 주된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 물론 저자는 이에 대해 ‘더 기발한 모욕으로 되갚기’ ‘유머를 곁들인 자기 비하’ 등 품격 있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런데 보다 중요한 건 본능(모욕감을 느끼거나, 모욕을 주려는 욕구)에 대한 이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진화심리학을 끌어들인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진화를 거쳐 엄청난 두뇌를 갖게 된 생명체이고, 이 뇌로 언어를 개발했다. 사회적 서열에서 자신의 위치를 가늠하기 위해 이빨이나 주먹 대신 여러 단어의 결합, 즉 모욕을 만들어냈다는 것.

그러나 저자는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이 목표라면 우리는 진화적 프로그래밍을 무시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남을 모욕하고 싶게 만드는 프로그래밍과 모욕을 받고 불같이 화를 내고 싶게 만드는 프로그래밍을 무시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는 “자존감과 자아상이 어떻게 형성돼 있는지에 따라 모욕감에 대한 개인적 민감도가 달라진다”면서 “자존감이 높고, 자아상이 안정적인 사람이 모욕감에 덜 민감한 편”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이와 같은 인간유형으로 스토아철학자들을 꼽았다.

그들은 진화론적 과거에 뿌리를 두고 있는 사회 서열 경쟁(모욕의 주된 원인)에서 한 발 물러나 내적인 평안을 추구했다.

“사회적 지위에 대한 욕망을 극복하면-이른바 사회 서열 경기를 그만둔다면-우리는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다른 세상에 살 것이다. 특히 누군가에게 모욕을 받아도 전처럼 하루가 망가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침착하게 그 일을 가늠해볼 것이다. 모욕을 가한 사람이 명성을 중시하는 사람이라 사회 서열 경기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중략)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사회 서열 경기를 하지 않으니 여기서 ‘진다’고 한들 아무런 상관이 없다.”(282쪽)

얼핏 ‘교과서’처럼 들리는 말 같지만, 이만한 정공법도 없다. ‘자기 비하’나 ‘보복 모욕’은 너무 피곤하지 않은가. 모욕 심리게임에선 그저 ‘지는’ 게 최선이다. 저자는 스토아철학 연구를 종합하면서 최근 한 실험에 착수했다고 한다. 바로 스토아학파의 충고대로 사는 거다. 누구든 먼저 모욕하지 않으며 뒷담화도 하지 않고, 악의적인 모욕에 같은 모욕으로 대응하지 않는 것. ‘모욕 평화주의’를 의식적으로 실천하기로 했다. 실험 과정과 결과는 책의 마지막 장에 있다.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