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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His Story 게재 일자 : 2014년 09월 24일(水)
한상기 “‘한번 가보지…’ 했다가… 눈앞 餓死者 보고 23년”
아프리카 농업증진 헌신 한상기 美 조지아대 명예교수 페이스북트위터밴드구글
▲  한상기 미국 조지아대 명예교수가 18일 경기 수원시 자택에서 1973년 나이지리아 일간지 1면에 소개된 ‘당신을 위한 더 많은 게리(GARI·카사바를 원료로 한 나이지리아 주식)’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여주고 있다. 기사는 당시 한 교수가 만든 카사바 개량 품종이 나이지리아의 식량 기근 해소에 기여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김선규 기자 ufokim@munhwa.com
“운이 좋아서였죠.” 아프리카 대륙의 식량난 해소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었는지 묻는 기자의 질문에 한상기(81·원예학) 미국 조지아대 명예교수는 담담히 말했다. 그는 1971년 38세의 나이에 서울대 교수와 영국 케임브리지대 연구원이라는 ‘안락한’ 자리를 포기하고, 자식들과 부인까지 데리고 생면부지의 아프리카 나이지리아로 가 23년간 아프리카 농업을 위해 헌신했다. 어떻게 그런 대단한 선택을 할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는 “하늘의 뜻이었다”며 웃었다. 그는 손녀뻘 되는 기자에게 단 한순간도 말을 낮추지 않았다.

나이지리아 및 아프리카 농업 발전을 위해 헌신한 그의 일화는 초등학교 6학년 읽기 교과서에도 수록돼 있으며 동화책으로도 만들어졌다. 초등학생 필독서로 선정돼 있는 동화책 ‘까만 나라 노란 추장’을 읽고 한 초등학생은 이런 독후감을 남겼다. “주인공인 한상기 교수님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인류를 위해 헌신하셨다. 비록 교수님은 돌아가셨지만,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계실 것이라 생각하며 나도 바른 길을 걸어가겠다.” 살아 있는 한 교수를 두고 ‘돌아가셨지만’이라고 쓴 것은 웃지 못할 일이나, 살아 있는 사람을 ‘위인화’하는 일이 극히 적은 우리나라에서 그런 ‘착각’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한 교수는 교과서와 동화책에 나와 있듯이 ‘인류 구원의 사명’을 띠고 나이지리아에 간 것은 아니었다고 밝혔다. 지난 18일 경기 수원시에 있는 자택에서 만난 그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는 말과 함께 ‘허허’ 웃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갔다.

“1971년 서울대에서 연구를 하며 해외에서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당시 케임브리지대는 제 연구 실적과 논문들을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었지요. 서울대 농과대학 조교수로 활동하고 있을 때 케임브리지대 식물육종연구소에서 같이 일해보자는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때 나이지리아에 국제열대농학연구소가 막 설립됐죠. 농업학 관련 연구소가 생긴 건 나이지리아가 세계에서 세 번째였습니다. 38세면 많지 않은 나이였고, 농업 연구로 이름을 떨치고 싶다는 야망도 있었지요. 그래서 우선 나이지리아에도 원서를 넣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연락이 없길래 떨어졌나보다 하고 영국행 짐을 쌌는데, 마침 짐을 다 싸 놓고 있으니까 나이지리아 연구소 부소장한테 직접 편지가 왔더군요. 그래서 ‘그래, 한번 가보고 안 좋으면 영국으로 가지, 뭐’라는 생각으로 나이지리아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그리고 결국 23년을 그곳에서 살았죠.”

‘한번 가보지, 뭐’가 23년이라는 긴 세월로 변한 이유는 그곳의 ‘열악함’ 때문이었다. 상황이 안 좋으면 영국으로 가겠다던 한 교수는 나이지리아 농업의 열악함과, 그 과정에서 자신을 필요로 하는 정부의 요청에 ‘영국행’을 자연스럽게 잊었다. 한 교수가 건너간 1971년 나이지리아는 1967년부터 1970년까지 발발했던 ‘비아프라 내전’이 끝난 직후였다. 동부 주들이 비아프라 공화국으로 분리·독립을 선언하며 발생한 내전은 200만 명 이상의 희생자를 냈을 뿐만 아니라, 전쟁 후에도 50만 명의 아사자를 양산할 정도로 끔찍했다. 유럽의 식민 정책으로 농작물에 대한 발전이 거의 없었던 나이지리아는 내전으로 농토까지 황폐해져 심각한 기근 상황을 맞게 됐다.

“길거리에는 탱크가 돌아다니고, 농토는 죽어 있었죠. 심지어 나이지리아 주요 먹거리인 카사바(뿌리식물의 일종으로 고구마와 유사함)에 바이러스가 돌아 농작물이 수확되지 못한 채 썩거나 죽어버렸어요. 1971년 나이지리아 신문 1면에는 ‘기근이 창궐했다’는 내용이 연일 헤드라인을 장식했죠. 내가 농학연구소에 가서 맡은 일이 카사바, 토란, 고구마 등 나이지리아 주요 먹거리인 뿌리식물을 개량하는 일이었는데, 카사바라는 작물을 나이지리아에 가서 처음 본 저로서는 카사바와 토란을 구분하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그러니 카사바 개량은 물론, 죽어가는 카사바를 어떻게 살려야 할지도 몰랐었죠.”

하지만 그는 ‘몰랐기 때문에 부딪히기 쉬웠다’고 말했다. 2년 뒤인 1973년 나이지리아 신문 1면에는 ‘기근이 사라졌다’는 내용이 실렸다. 한 교수가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는 새로운 카사바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우연히 문제를 해결하게 됐습니다. 농학연구소 연구 부지를 우연히 둘러보고 있었는데 카사바처럼 생긴 작물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은 채 잘 살아 있더군요. 전 카사바를 잘 몰랐으니까, 그게 카사바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걔는 왜 감염이 안 됐나 살펴봤죠. 하지만 알고 보니 멕시코에서 들여온, 카사바의 사촌쯤 되는 작물이더라고요. 그 작물은 바이러스에 걸리지 않는, 소위 ‘항체’를 가지고 있었고, 저는 그 카사바 사촌의 좋은 ‘유전자’를 나이지리아 카사바에 심어 새로운 개량종을 만들어냈습니다. 개량된 카사바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았고, 카사바 자체가 쉽게 자라는 애였기 때문에 땅에 카사바 줄기를 꽂기만 해도 자라기 시작했죠.”

그는 개량된 카사바 줄기를 트럭에 가득 싣고 나이지리아 전역을 돌아다니며 죽어 있는 카사바 밭에 줄기를 꽂고 다니기 시작했다. 맨 처음 나이지리아 주민들은 남의 밭에 이방인이 와서 카사바 줄기를 꽂아대자 ‘신성 모독’과 같이 여기며 다 뽑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몇몇 ‘부지런하지 못한’ 나이지리아 농민들이 새롭게 개량된 카사바 줄기가 꽂아져 있는 것을 나중에 확인하고, 그 밑에서 카사바가 자라자 ‘이것은 신의 은총’이라며 개량된 카사바를 심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 교수가 꽂은 것은 모른 채, 그저 신이 준 선물이라고만 여겼다고 한다. 나중에 가서야 한 ‘식물학자’의 연구 산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 나이지리아인들은 한 교수의 트럭이 보이면 우르르 달려가 카사바 줄기를 얻으려 했다.

“당시 보급에도 운이 따랐습니다. 개인이 트럭을 몰고 돌아다녀봤자 그 큰 땅에서의 카사바 보급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죠. 당시 영국 석유업체 BP는 나이지리아 석유와 천연가스 채굴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식민지 시대의 역사도 한몫했죠. 그러다보니 BP 입장에서는 나이지리아 주민들에게 조금이라도 잘 보여야 ‘최대한 분쟁 없이’ 사업을 해 나갈 수 있었겠죠. 그들이 선택한 게 바로 개량된 카사바였습니다. BP에서 앞장서서 개량된 카사바를 농민들에게 보급하기 시작했죠. 여론을 잠재우기 위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기근은 해결하게 됐습니다.”

사실 한 교수가 농업과 육종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충남 청양 출신인 그는 어린 시절부터 논밭에 익숙했고, 그만큼 기근과 가뭄에도 익숙했다. 고향의 농민들이 농사를 짓다가 ‘망하는’ 경우를 많이 봤고, 그때마다 얼마나 힘든 일이 벌어지는지 직접 체험했다. 이 때문에 한 교수는 육종학이 뭔지도 몰랐던 어린 시절부터 농업 관련 학문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서울대 농대에 진학한 것도 그 때문이었고, 아프리카의 ‘굶주림’에서 눈을 돌리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한 교수는 나이지리아뿐만 아니라 사막을 제외한 아프리카 대륙 전체 국가를 돌아다녔다. 그의 보물 중 하나인 ‘수집’ 앨범에는 수백 장에 달하는 항공권이 빼곡히 들어가 있다. 한 교수팀이 개량한 카사바 품종은 현재 41개 아프리카 국가에 보급돼 있고, 고구마 품종은 66개, 얌 품종은 21개, 식용 바나나 품종은 8개 국가에서 재배되고 있다. 결국 이와 같은 한 교수의 ‘노력’은 나이지리아인들을 감동시키기 시작했다. 1983년 한 교수는 나이지리아 요루바족 이키레 마을의 추장으로 추대돼 ‘세레키’라는 이름을 얻었다. 세레키는 ‘농민의 왕’이라는 현지어다.

“요루바족 사람들은 자신의 얼굴을 칼로 긁어서 상처를 내 서로가 형제자매라는 것을 인식한다고 합니다. 이는 현존하는 삶뿐만 아니라 사후에도 형제자매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라고 하지요. 저는 그렇게까지 하진 않았지만.(웃음) 사후에까지 형제자매라는 그들의 가족적인 의식이 부럽다고 생각하기는 했습니다. 저도 추장이 되면서 그들의 가족이 된 셈이죠.”

그런데 한 교수의 ‘실제’ 가족은 어땠을까. 1971년 나이지리아로 한 교수와 함께 넘어간 세 아들과 작은 딸, 그리고 부인은 말라리아, 피부병 등으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겨야 했다. 중학교에 입학해 학교를 옮기기 어려울 것 같다는 이유로 서울에 놔두고 온 큰 딸의 성장도 항상 신경 쓰이는 문제였다. 어린 세 아들의 교육도 과제였다. 당시 나이지리아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한 교수는 큰아들은 영국으로,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은 미국으로 각각 유학을 보내야 했다. 둘째 딸도 영국으로 보내고 나니 아내는 ‘자신도 영국으로 가겠다’고 나섰다.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데, 콜롬비아에 학회차 갔던 때였죠. 밤에 누워서 생각해보니 기가 막힌 겁니다. 나는 콜롬비아에 있고, 아내는 그때 나이지리아에 있었죠. 큰아들은 영국에, 둘째와 셋째 아들은 미국 다른 주에 각각 있고, 첫째 딸은 서울에, 둘째 딸은 영국 다른 곳에 있는 겁니다. 가족이 모두 다른 곳에 따로 떨어져 살고 있었죠.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지금 자식들이 다 잘 살아주고 있으니 고마울 따름이죠. 물론 미국, 영국 등에 여전히 떨어져 살긴 하지만 그래도 연락을 자주 하고 왕래도 꽤 있습니다. 자신들이 살아가는 곳에서 의사나 연구원으로 며느리, 사위, 손자, 손녀와 함께 잘 살아가는 것을 보면 감사하죠.”

한 교수는 3년 전 치매에 걸린 부인 김정자(83) 여사를 손수 간병하고 있다. 김 여사는 한국으로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고향으로 가자”는 이야기를 한다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이 치매에 걸린 이유는 나 때문일 겁니다. 나와 함께 나이지리아 등 아프리카에서 고생을 너무 많이 했어요. 죽을 고비를 넘기는 자식들을 보며 걱정도 많이 했고요. 이 사람 덕분에 나는 나이지리아와 아프리카에서 연구 활동을 하며 좋은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없었으면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죠. 이제 남은 평생 동안은 내가 이 사람을 지켜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잠을 잘 때도 중간에 세 번씩 깨 부인의 상태를 살피고, 1주일에 세 번 아침 일찍 수원 인근의 요양원에 데려다 주는 것도 그의 일이다. 아내가 조금이라도 편하게 병원으로 이동하게 하기 위해 최근 한 교수는 SUV급 차를 새로 사기도 했다. 휠체어와 다른 짐들을 넣기 편하기 때문이다. 힘들지 않으냐는 기자의 질문에 한 교수는 “SUV라 주차하기가 조금 어렵다”고 웃으며 말했다.

한 교수는 요즘 자신이 그동안 해 왔던 농업 관련 연구들을 정리하고, 자신이 아프리카에서 겪고 느꼈던 일들의 기록을 갈무리하고 있다. 두툼한 한 교수의 ‘생각 정리’ 노트는 수백 권에 달한다. 아직 나이지리아와 영국 등에 책과 기록물들이 많이 남아 있어 이를 어떻게 처분해야 할지 고민이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내가 그동안 겪었던 일과 느낌을 정리해서 남겨두고 싶어요. 젊은 사람들에게 아프리카에 대해 알려주고 싶고, 자연과 식물에 대한 철학을 느끼게 해 주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나름대로 페이스북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웃음)”

한 교수의 책을 읽은 어떤 독자는 서평에서 “농학이 물리학과 신학, 철학을 합쳐 놓은 학문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적었다. 한 교수에게 이런 평을 전하자 그는 “나보다 훨씬 더 멋진 생각을 한 사람”이라며 고마워했다.

최근 발간된 한 교수의 명상집 ‘아프리카, 광야에서’에는 자신의 삶에 대한 짧은 소회가 담겨 있다.

‘이 넓은 사하라 사막에서/한줌의 모래를 집어 봅니다./이 무진장한 대기 속에서/한숨의 공기를 마셔 봅니다./이 무한한 시간 속에서/한번 눈을 살며시 감아 봅니다.//내 맥박을 장단 삼고/저 북극성을 나침반 삼아/드넓은 사하라 사막에/아주 작은 발자국 남기면서/한 발짝 한 발짝 걸어 봅니다.’ 이미 누군가에게 한 교수의 발자국은 ‘북극성’과 같은 나침반일 텐데, 82세의 그는 여전히 사하라 사막을 묵묵히 걷고 있었다.

이후연 기자 leewho@munhwa.com

한 교수는 누구…

1933년 8월 충남 청양군에서 태어났으며 1953년 대전고를 졸업해 그해 서울대 농과대에 입학했다. 1957년 서울대 농학석사로서 국내 최초로 ‘잡초학’을 연구했으며 1967년 미국 미시간주립대 식물유전육종학 박사 과정을 마쳤다. 이후 1971년 나이지리아 국제열대농학연구소 구근작물개량연구원으로 부임해 23년간 아프리카 농업 발전을 위해 연구했으며, 현재 미국 조지아대 원예학과 명예교수, 미국 및 영국 생물·작물학회 펠로 등을 역임하고 있다. 1982년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을 받고, 그해 영국 기네스 과학공로상을 수상했다. 1984년에는 국제 구근작물학회 제1회 우수 봉사상을 수상했으며, 영국 세계 농업명사록에도 실렸다. 2006년과 2009년에는 세계식량안전과 환경보전에 기여한 공로로 브라질 환경장관 공로상과 영국 생물학회 펠로상을 각각 수상했다. 저서로 ‘아프리카, 광야에서’ ‘아프리카 사람, 아프리카 격언’ ‘신비의 땅 아프리카’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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