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와 시각>살얼음판을 걷는 사람들

한강우 / 전국부장

지난 8월 27일 경남 창원시 봉림동에 사는 이 모(65) 씨는 아파트 인근으로 아침 산책을 나갔다가 천붕지괴(天崩地壞)의 변을 당했다. 이씨의 발 밑에 너비 1.2m, 깊이 1.5m의 싱크홀(도로 아래가 무너지면서 생기는 빈 공간)이 생기면서 속수무책으로 빨려들어갔기 때문이다. 이 씨가 사고를 당하기 한 달 전인 7월 24일에는 경기 의정부시 신곡동 C아파트 앞 인도를 지나가던 안 모(여·36) 씨가 갑자기 꺼진 가로 1m, 세로 1.5m, 깊이 2m 정도의 구덩이에 빠져 이마 등을 다치는 부상을 입었다. 다행히 이들 모두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이 씨와 안 씨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아찔하다. 이런 싱크홀 발생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나타나는 전국적인 현상이 됐다. 특히 2010년 435건이던 서울의 싱크홀은 지난해 854건으로 늘었으며 올들어 7월까지도 568건이 발생하는 등 빈도수가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이쯤되면 우리는 날마다 살얼음판과 낭떠러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셈이다.

지난 17일 16명의 목숨을 앗아간 경기 성남시 판교 테크노밸리 환풍구 추락사고는 이런 ‘발밑 두려움’에 기름을 부었다. 지하 주차장 환풍구에 올라가 걸그룹 공연을 관람하고 있던 퇴근길 시민 27명이 무게를 이기지 못한 철제 덮개가 무너지면서 20여m 아래로 떨어져 숨지거나 다치는 변을 당했기 때문이다. 사실 지하 주차장이나 지하철 등 도심 곳곳에서 쉽게 마주하는 환풍구는 판교 환풍구 추락사고가 일어나기 전까지 하나의 ‘길’에 지나지 않았다. 기자도 신문사 근처 정동길 초입에 있는 식당으로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환풍구를 아무 생각없이 그냥 밟고 오갔다. 하지만 사고후 이 시설은 두려움의 대상이 됐다. 판교 환풍구 추락사고에서 보듯 이런 환풍구가 언제 ‘또 하나의 싱크홀’로 둔갑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실제로 판교 사고에 앞서 지난해에도 서울과 부산 등지에서 깊이 10m가 넘는 환풍구 밑으로 추락해 고교생 1명이 숨지는 등 크고 작은 환풍구 사고가 잇따라 발생했다.

문제는 이런 환풍구가 서울 지하철 1∼9호선에만 2418개가 있으며, 이 가운데 1777개는 보도 위에 설치돼 있다는 사실이다. 보도 위에 설치된 환풍구 가운데 지상 높이 30㎝ 이상인 곳은 1578개, 30㎝ 미만은 199개다.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올라갈 수 있어 사실상 큰 차이가 없다. 이 때문에 지하철 내 가장 더러운 공기가 나오는 이곳을 우리는 아무 생각없이 그저 ‘길’로 이용해온 것이다. 물론 서울시는 환풍구 덮개가 1㎡당 500㎏까지 견딜 수 있게 설계돼 붕괴 위험이 크지 않다는 입장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설치 당시의 기준일 뿐이다. 시설이 노후하거나 거리에서 대규모 집회나 공연 등이 열려 시민들이 환풍구 위에 한꺼번에 올라가게 되는 상황이면 안전을 장담할 수 없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정부 차원에서 환풍구에 대한 안전 관련 규정과 제도 개선에 나섰다는 이야기는 없다. 겨우 사고 관할 경기도에서 환풍구와 같이 안전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모든 시설물에 대한 관리 기준을 마련하는 법령 정비에 나선다는 소식만 들릴 뿐이다. 살얼음판 위로, 낭떠러지 위로 걸어다녀야 하는 ‘시민들의 행진’이 계속되고 있는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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