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국내 최초의 대장간 부문 기능전승자인 최용진 씨가 지난 26일 자신의 대장간에서 도끼를 만들기 위해 불에 달궈진 쇠를 망치로 두드리고 있다. 증평=심만수 기자 panfocus@
대장간 부문 첫 기능전승자 최용진 씨
“힘으로 쇠를 달구고 두드려 연장을 만드는 일이야 누군들 못하겠습니까. 쇠와 불, 혼이 하나가 돼야 진정한 대장장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50년 동안 대장장이 외길 인생을 걸으며 뭉툭한 쇠를 쓸모있는 도구로 재탄생시켜 ‘무쇠의 마술사’로 불리는 최용진(67) 씨. 그는 지난 1995년 한국산업인력공단이 전국 최초로 대장간 부문 기능 전승자로 선정한 장인이다. “쇠를 다루는 일이 제일 쉽다”는 우리나라 최고의 대장장이인 그를 만나기 위해 지난 26일 오후 충북 증평군 증평읍 중동리 전통시장 내에 자리 잡은 ‘증평대장간’을 찾았다. 악수를 청하며 내민 최 씨의 손에는 곳곳이 불에 덴 상처로 빼곡해 반세기 동안 쇠를 다룬 인생역정을 한눈에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쇠의 담금질은 사람으로 비유하면 마음을 바꿔 주는 것으로 쇠의 마음을 읽어야 진정한 대장장이라 할 수 있다”며 “혼을 쇠에 불어넣는 마음으로 일해야 달궈진 쇠의 색깔만 봐도 온도와 강도의 차이를 알 수 있다”고 대장장이 정신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대뜸 쇠를 다루는 법을 보여주겠다며 난로용 석탄인 괴탄에 불을 붙인 화덕 속에 쇠를 집어넣었다. 그가 1분도 채 되지 않아 불에 벌겋게 달궈진 쇠를 꺼내 모루(금속판 등을 올려놓고 두드릴 때 사용하는 받침) 위에 놓고 강약을 조절하며 망치로 50여 차례 두드리자 엿장수 가위 한쪽 모양이 완성됐다. 그는 잠시 후 또다시 쇠를 화덕에 넣고 꺼낸 뒤 같은 방법으로 1분 만에 호미를 만들었다.
최 씨의 빠른 손놀림과 제작기술에 놀라워하자 그는 “쇠는 1400도 정도면 산화하고 1500도가 넘으면 녹기 시작하기 때문에 오랜 경험에서 나온 비결로 불빛과 달궈진 쇠의 색깔을 보고 화덕에서 꺼내는 것이지, 말로 표현하기는 힘들다”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적당한 열처리와 숙련된 망치질”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우리 전통의 대장일은 온도 몇 도, 망치질 몇 번 등 계산적으로 설명할 수 없으며 똑같아 보이는 쇠도 특성이 모두 다르고 불도 바람의 세기에 따라 다르다”며 “과학적인 수치와 시간보다는 대장장이의 감(感)이 뛰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만드는 제품은 호미·낫·괭이 등 농기구를 비롯해 칼·가위 등 생활용품, 창·삼지창 등 TV 드라마와 영화 소품 등 80여 종에 달한다. 처음 보는 기구도 그 자리에서 바로 만들 수 있을 만큼 눈썰미와 기술이 뛰어난 그는 타고난 대장장이다.
손등을 뒤덮은 상처를 묻자 최 씨는 “쇠를 두드리다 보면 뜨거운 쇳가루가 자주 튀어 덴 것으로 영광스러운 훈장과 같다”며 “50년 넘게 이 일을 해서 이제는 단련돼 뜨거운 줄도 모르겠다”고 오히려 자랑스러워했다.
최 씨가 숙명과 같은 쇠를 다루는 기술을 배우게 된 것은 가세(家勢)가 기울면서부터. 방앗간을 운영하며 농사를 짓는 꽤 풍족한 집안에서 남부럽지 않은 유년시절을 보냈으나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아버지가 개간사업에 투자했다 실패하면서 고난의 세월이 시작됐다. 그는 중학교에 갈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인근 천변에서 물고기를 잡아 팔거나 장작에 쓸 나무를 구해 파는 등 어려서부터 해보지 않은 일이 없었다. 2남 5녀 중 장남인 그를 안타깝게 여긴 아버지가 어느 날 “대장간 일을 하면 밥은 굶지 않는다”고 권하자 이에 솔깃해 16세 때부터 고향인 괴산군 청천면의 한 대장간에서 잡일을 하며 대장장이의 길로 들어섰다.
20세가 되던 해 그는 충주시에서 대장간을 운영하는 매형에게 의탁하며 본격적으로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매형의 대장간은 호황을 누려 수입이 꽤 좋았다. 이를 곁에서 지켜본 최 씨는 “매형이 돈을 잘 벌어들이는 것이 엄청나게 부러워 대장간 일이 힘들기는 하지만 재미도 있고 돈도 벌기 위해 악착같이 배웠다”며 “3년쯤 지나자 10년을 배운 인근 지역 기술자보다 기술도 뛰어나고 작업 속도도 2배 이상 빠르게 됐다”고 자랑했다.
자신의 기술에 자신감이 붙은 그는 26세 때인 1974년 독립해 증평시장 내에 대장간을 차렸다. 처음에는 젊은 그의 능력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 일감이 없는 등 ‘작업하는 날’보다 ‘공치는 날’이 훨씬 많았다. 그는 “당시 오기가 생겨 최고의 대장장이가 되겠다고 결심해 칼 한 자루, 호미 하나를 만들 때도 마음에 들 때까지 망치를 두드리고 또 두드렸다”며 “정성을 다해 열심히 만들자 기술을 인정받기 시작하고 소문이 퍼지면서 단골도 생기고 일거리가 계속 늘어났다”고 회상했다. 최 씨는 혼자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주문량이 폭주하자 1980년대 중반까지 직원을 2명 고용하는 등 호황을 누리기도 했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산업화로 일감이 점차 줄어들고 인건비가 오른 데다 값싼 중국산이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오면서 최 씨의 대장간도 큰 타격을 받았다. 이에 따라 그는 직원들을 내보내고 홀로 대장간을 꾸려 나갔다. 인근의 진천군 장터에 가서 농기구 제작과정을 보여주며 판매하는 등 불황 극복에 전력을 기울였다. 다른 대장간들은 하나둘 문을 닫거나 대량생산을 위해 기계로 물건을 만들어 냈지만 그는 전통 방법을 고수했다. 화덕의 불을 붙이는 재료가 참숯에서 괴탄으로, 뜨거운 공기를 불어넣는 기구가 풀무에서 송풍기로 바뀌었을 뿐 그의 작업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최 씨는 20여 년 동안 대장간을 운영하며 뛰어난 기술로 산업화에 이바지한 공로 등을 인정받아 1995년 대장간 부문 기능 전수자로 선정된 데 이어 증평군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았다. 이 사실이 신문에 보도되고 TV 오락·교양프로그램에 잇따라 출연하게 되자 명성이 쌓여 전국의 축제·박람회에서 초청이 쇄도했다. 그는 ‘국민들에게 한 사람이라도 더 우리의 전통 대장간을 알리자’는 생각에 1년에 30일쯤은 전국의 축제 등에서 시연 초청을 받으면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 대장간 기술을 보여준다. 증평군은 최 씨의 공로를 바탕으로 향후 국가와 충북도 무형문화재 지정을 신청할 계획이다.
또 최 씨의 대장간 기술이 유명세를 치르자 영화와 TV 드라마 철기구 소품 제작 의뢰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지난 2004∼2005년 큰 인기를 끌었던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 등장한 철퇴와 포졸들이 쓰던 삼지창, 망나니 칼 등이 그의 대표작이다. 최근 방영되는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전통 농기구 등도 상당수는 최 씨의 손을 거친 작품이다.
그는 이에 머물지 않고 문화상품으로까지 영역을 넓히고 있다. 최 씨가 대장장이 기술을 집약해 2005년 역작으로 만들어 충북도 관광상품 공모전에 출품한 문화상품은 은상을 받았다. 이 제품은 25∼50㎝ 크기의 작은 키·삼태기 속에 손바닥만 한 크기의 손도끼·낫·쇠스랑·엿장수 가위, 호미 등을 앙증스럽게 장식해 만든 것으로, 이민자들과 외국인들로부터 큰 인기를 끌어 5만∼7만 원씩에 불티나게 팔린다고 한다.
또 증평군 남하리 ‘증평민속체험박물관’에는 2010년 최 씨가 제작해 기증한 호미·칼·창·농기구·도끼·톱 등 100여 점이 전시되고 있다. 그는 “대장간이 점차 사라지고 있어 안타까운 마음에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전통 문화인 대장간에서 만든 우리 고유의 기술과 멋을 알리기 위해 기증했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칼과 농기구 제작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칼은 그가 자신 있게 만들어 내는 작품과 같은 제품이다. 최 씨는 “내가 만든 칼은 일본이나 독일 등 외국 제품보다 훨씬 튼튼해 믿고 쓸 수 있다”며 “한번 써본 사람은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느낌으로 더 좋다는 것을 알고 다시 찾아온다”고 강조했다. 그는 “대장장이들도 기구를 만든다는 순진한 생각에 머물지 말고 혼을 불어넣어 만들면 세계인들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는 예술품이 된다”고 역설했다.
대규모 공장에서 만드는 제품과의 차이점을 묻자 그는 “공장에서 기계로 만드는 것도 마무리 작업은 수작업이 필요하다”며 “대장장이의 섬세한 솜씨에 혼과 정성을 담아 제작하기 때문에 한번 사용한 사람들은 단골이 된다”고 자부심을 드러냈다. 장인정신으로 유명해진 덕분에 주변 지역의 단골손님은 물론 충남북과 수도권, 영호남 등 전국에서 전화주문이 이어지고 인터넷을 통해 인기를 끌며 꾸준히 물량을 소화하고 있다.
전국 최고의 대장장이로 인정받고 있지만 그의 대장간을 찾는 손님은 하루에 한 명도 없을 때도 있고 많을 때는 20명 가까이 된다. 손님이 없을 때는 관광 문화상품 제작에 심혈을 기울이고 전화·인터넷 주문량이 많을 때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이때는 다른 사람에게 맡길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기도 하지만 “이곳에서 만들어지는 제품들은 모두 내 손을 거쳐야 한다”는 소신으로 홀로 대장간을 지키며 비지땀을 쏟고 있다.
이에 대장간 제품 구매량이 점차 감소할 것으로 걱정돼 생활비를 벌 수 있는지 궁금했다. 그는 “남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을 정도는 된다”며 답변을 미루다 구체적인 수입액을 거듭 요청하자 “공무원인 아들보다는 약간 더 번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평생을 대장간과 함께 살아오며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접어든 그에게 앞으로 계획과 꿈, 목표 등을 묻자 그는 “그동안 해온 일을 계속할 뿐 다른 욕심은 없다”며 “종일 망치질을 해도 팔이 아픈 줄 모를 정도로 천직이라고 생각하며 이 나이에도 일거리가 있다는 게 축복”이라고 해탈의 자세를 견지했다. 이어 최 씨는 “일을 하지 않으면 심심하고 몸이 더 피곤한데 손님들이 찾아오면 더 신이 나고 일하는 것 자체가 즐거워 스트레스가 쌓일 일이 없다”며 “내가 만든 제품을 사용한 소비자가 품질이 좋다고 칭찬해 주면 더없이 기쁘고 보람이 있다”고 뿌듯해했다.
증평=고광일 기자 kik@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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