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1994년 지존파 검거 일등공신인 고병천 전 서울 서초경찰서 강력반장이 12일 서울 송파구 신천동 자택에서 당시 현장검증 사진을 들어 보이며 지존파 범행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정하종 기자 maloo@
범죄학 박사 된 ‘지존파 검거 주역’ 고병천 前 서초署 강력반장
“지존파 두목 김규환(가명)은 첫 번째 범행 대상자를 윤간 후 살해해 매장했고, 조직을 이탈하려 한 조직원을 잔인하게 처형했는데, 그 이후 왜 자신은 강간 혐의로 구속돼 지존파 조직원들의 납치·강도·살인을 배후에서 조종하기만 한 걸까.”
지존파는 1993년 4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5명을 잔혹하게 살해한 범죄조직이다.
1994년 9월 지존파 검거 일등공신인 당시 서울 서초경찰서 강력반장 고병천(66) 씨. 그는 2009년 6월 정년퇴직했다. 그는 이후 지존파 사건을 토대로 ‘범죄단체 구성원의 행동패턴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을 써 최근 광운대에서 범죄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를 지난 12일 오후 서울 송파구 신천동 자택에서 만났다.
자리에 앉아보니 테이블에 지존파 사건 당시 현장검증 사진이 첨부된 서류 파일이 놓여 있었다. 자연스럽게 지존파 얘기부터 시작됐다. 물론 지존파가 그를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희대의 강도·강간·살인 조직이었던 이유도 있다.
―지존파 일당을 검거한 게 벌써 20년 전이다.
“정확하게는 1994년 9월 19일이었다. 검거 작전에 나서기 며칠 전쯤 지존파에게 납치됐다가 극적으로 탈출한 이모(여) 씨가 찾아왔다. 제보를 받고 출동해 일망타진했다.”
―이 씨는 어떻게 탈출했나.
“이 씨를 조직원 가운데 김연양(가명)이 좋아했다. 김연양은 부모가 이혼하고 나서 어머니가 아버지 친구들하고 접촉하면서 비뚤어졌다. 학교 갔다 오면 댓돌 위해 남자 신발 있고 하니까 가출하게 됐다. 모성애에 굶주리다 보니 이 씨에게 정을 많이 느꼈다.”
―지존파에는 여자는 어머니도 믿지 말라는 규율이 있었다면서.
“엄격한 조직 규율이 있었다. 김규환이 만들었고, 조직원들은 다 신봉했다. ‘여자는 어머니도 믿지 말라’ ‘돈 많은 자를 납치해 돈을 빼앗는다’ ‘납치한 사람은 반드시 죽인다’ ‘각자 10억 원을 모을 때까지 범행을 계속한다’ ‘조직을 이탈한 자는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죽인다’ 등이었다.”
―이 씨하고 김연양이 같이 병원에 갔다 이 씨가 탈출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다이너마이트 폭발 사고가 나 김연양이 부상을 당했다던데.
“차 안에서 다이너마이트를 만지다가 터졌는데 밑 쪽으로 폭발돼 그때는 상해를 안 입었다. 병원에 간 이유는 마음에 둔 이 씨 때문이다. 조직원 문하록(가명)하고 강서은(가명)이 빨리 이 씨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장(김규환)이 여자는 어머니도 믿지 말라고 했는데 대장 나오면(구속된 김규환이 출소하면) 너도 무사할 수 없으니까 죽이라고’. 김연양이 대장 나오기 전에 죽이겠다며 다투다 문하록이 김연양의 머리를 술병으로 내리친 거다. 그래서 다친 거다.”
―병원에서 도망치기가 수월치 않았을 텐데.
“병원에 갔는데 머리를 꿰매야 하니까 봉합할 때는 이 씨가 못 들어가니까 밖에 남아야 했다. 김연양은 이 씨를 믿었다. 그래서 ‘꼼짝 말고 있으라’고 했다. 김연양이 가방 주면서 있으라고 하니까 들고 있다가 이 씨는 이때 아니면 죽는다 생각해서 도망쳤다. 가방에는 100만 원과 김연양의 휴대전화가 있었다.”
―지존파 아지트가 있던 전남 영광에 가보니 어떤 상태였나.
“집을 분홍색으로 칠해 놨다. 안에는 철창 감옥과 사체 태울 소각장까지 만들어 놨는데, 그런 장소 아닌 것처럼 꾸미려고 분홍색을 칠했다고 했다. 주차장인 것처럼 셔터가 내려진 곳에 차를 대놓고 그 밑에 통로를 만들어 놨다. 주변 주택들이 없어서 잠복하기 굉장히 어려운 지형이었다. 500m, 1㎞ 나눠서 잠복을 시작했고, 망원경으로 봤는데 철문이 열려 있었다. 이 씨 말로는 문단속을 아주 철저히 한다고 했다. 이 씨에게 철문이 열린 이유를 물었더니 ‘술 먹었나’ 하더라. 나중에 안 사실인데, 지존파 얘들이 이 씨하고 연락이 안 되니까 영광경찰서 앞에서 이틀 동안 잠복했다. 이 씨의 신고를 받고 출동할까 봐. 김연양은 다이너마이트 심지 앞에 언제든 불붙일 준비를 해 놓고, 나머지는 다 경찰서 앞에 잠복했다. 이틀을 했는데 별다른 움직임이 없으니까 이 씨가 신고를 못 했다고 생각하고 술을 먹었다고 했다.”
―검거 때도 기지가 발휘됐다던데.
“아지트에서 콩나물 사러 나온 강서은이 승합차를 몰고 나왔다. 직원들에게 한번 스쳐 지나가 보라 했는데 강서은이 눈치챘다. 차를 들이받아 멈추게 했는데 2m 낭떠러지 아래로 뛰어내렸다. 쫓아가 잡았다. 강서은을 잡고 나서 현지 경찰을 시켜 다른 조직원한테 전화를 걸어 “강서은이 교통사고 때문에 광주로 이송됐는데 경찰서로 와 돈이랑 차를 가져가라”고 했다. 김연양, 문하록, 강서은의 애인인 이강숙(가명)이 르망 자동차를 타고 나왔다. 경찰서 사무실로 들어서면 검거하라고 했는데, 문하록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덮쳤다. 그러다 보니 김연양하고 이강숙이 도주했다. 도망가면서도 주유소 한 군데 들이받고 폭파한 다음에 죽자고 했다더라. 찾던 주유소가 없고 경찰이 계속 추적해 오니까 주택 담벼락을 들이받고 검거됐다. 나머지 2명은 집과 집 뒤 야산에서 순순히 검거됐다. 20분도 안 걸렸다.”
고 씨 논문에는 흥미로운 분석이 있다. 바로 지존파 두목 김규환이 왜 강간 및 살인 등 참혹한 범행을 주저 없이 저지르다 정작 자신은 강간치상 혐의로 구속돼 있었을까에 대한 분석이다.
고 씨는 김규환이 ‘치밀한 리더’였기 때문이라고 봤다. 만약 범행이 들통 나더라도 자신은 관련 없다고 발뺌할 여지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라는 게 고 씨의 추론이다. 고 씨는 “김규환은 아주 영악한 리더형”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김규환이) 더 범행을 저지르다 보면 사형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면서 “자기는 교도소 있었으니까 부인하면 빠져나갈 수 있다고 판단해 강간치상 혐의로 구속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논문에 흥미로운 언급은 또 있다. 천하의 지존파도 얼치기 ‘초짜’ 시절 시행착오를 거쳐 범죄가 점점 발전했다는 것. 1993년 4월 결성된 지존파는 그해 7월 대전에서 최모(여) 씨를 납치, 윤간한 뒤 살해했다. 1994년 7월 지리산에서 일주일 동안 칼 하나씩만 들고 생존하는 지옥훈련도 함께했다. 같은 해 9월 본격적으로 범행에 나서는데, 경험이 없다 보니 첫 번째 납치 시도는 무산됐다. 이후 경기 양평 양수리 일대에 고급 승용차가 많이 다닌다는 사실에 착안, 여기서 납치한 것이 이 씨와 악사인 이모 씨였다. 각자 10억 원을 모은다는 엄청난 계획을 세우고 범행에 나섰지만, 실제로는 가난한 사람들을 납치하게 된 것이다. 이후 현대백화점 고객 1400여 명의 명단을 확보해 범행 대상으로 삼는 등 지능화됐다. 이들은 또 나중에 주유소를 하나 차려서 고급 차를 타고 오는 사람들을 표적으로 삼겠다는 계획도 세웠다.
가톨릭 신자인 고 씨는 지존파 일당 중 한 명인 문하록의 대부가 되기도 했다. 문하록의 사형 집행 뒤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른 것도 고 씨 부부다.
고 씨는 “내가 검거해 사형당한 사람은 최소 11명”이라며 “어찌 보면 내 탓에 사형된 사람들이어서 그들을 위해 기도를 많이 한다”고 말했다.
그는 평생 강력사건 현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현재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부검 의뢰한 사체만도 120건 이상”이라는 고 씨에게 특별한 힐링 법 같은 게 있는지 물었다.
고 씨는 “그런 것 있을 틈도 없이 바빴다”고 했다. 35년 경찰 생활하면서 집에 못 들어간 시간 다 합하면 15년은 넉넉히 될 것이란다. 잠복을 오래 할 때는 13일 동안 계속한 적도 있다고 했다.
―바쁘게 산 시간 중에 공부 때문에 바빴던 시기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평생 살인사건 같은 강력사건만 한 사람이 2002년 석사로는 마약학을 했다.
“마약사건을 싫어하는 편이었다. 마약은 정말 마약이다. 마약사건을 많이 하던 경찰관이 마약에 빠지는 경우도 봤던 탓인지 제보 들어오는 것은 했지만, 특별히 인지해서 하지는 않았다. 경기 파주에서 히로뽕 공장 잡은 것 등 마약사건은 2건밖에 하지 않았다. 갈수록 마약은 늘어나는데 그쪽 분야가 부족하니까 공부를 좀 해서 채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존파 사건 말고 다른 기억나는 것은 없나.
“1977년이었다. 경찰에 입문한 지 1년 뒤 처음 형사할 때 했던 사건이 기억에 남는다. 수원에서 여성이 반라(半裸) 상태로 숨진 사건이었는데, 아주 작은 단서였던 과자 ‘라면땅’ 봉지를 추적한 끝에 범인을 잡았던 기억이 난다. 내가 맡은 첫 살인사건이었다.”
수많은 살인사건 현장을 누빈 그에게도 무서움이나 공포 같은 게 있을까.
그는 삼풍백화점 현장에서 있었던 경험담을 꺼냈다. “삼풍이 무너지는 날, 누가 커피를 한잔하자고 해서 삼풍백화점 5층 커피숍으로 오라고 했다. 근데 그 사람이 거기 말고 앞에 지하다방 있으니 그리로 오라고 해서 갔다. 커피 마시고 나오는데 갑자기 무너졌다. 무너질 때 ‘삭’ 하는 소리가 났다. 압축되며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였다. 아비규환이었다. 사람들이 소리치고, 살려 달라고. 도구를 이용해서 끌어내고 하는데 어디서 ‘사람 살려’ 소리가 났다. 엘리베이터가 찌그러져 있는 곳에서 사람 소리가 난 거다. 다가가서 물어보니 엘리베이터에 혼자 있다고 했다. 도저히 찌그러진 엘리베이터를 어쩔 도리가 없어 119에 전화해서 대원들이 왔는데 다시 가니까 돌아가셨더라. 502명 사망, 6명 실종, 937명이 부상당했는데, 아마 그분은 실종 처리됐을 거다. 엘리베이터 박스를 펴 꺼낼 수조차 없었으니까. 그 트라우마는 지금까지 받은 어떤 충격보다 가장 크다.”
―삼풍 사건도 직접 수사하지 않았나.
“관내 사건이니까 수사했다. 지존파도 그랬지만, 삼풍 역시 돈이 원인이었다. 삼풍 사건은 그때 물탱크를 옮겨 하중 때문에 무너졌다고 발표됐지만, 근본은 돈에 대한 탐욕이 원인이었다. 1층 매장에 내력기둥 3개를 잘라 버렸다. 매장을 가리니까 치운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물탱크를 옮겨 사고가 난 거다. 돈 때문에 빚어진 참극이다.”
―범죄가 많아지는 데다 잔혹해진다. 후배들이나 사회에 전할 메시지가 있다면.
“세상에 희망이 없어진다는 게 문제다. 봉급 200만∼300만 원으로 수억 원하는 전셋값을 어느 세월에 마련하나. 그러다 보면 희망이 없어지고, 도덕 기준이 없는 혼돈 상태인 아노미(anomie)가 온다. 희망이 사라지는 만큼 범죄도 많아지는 것이다. 희망을 잃지 않도록 만드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장석범 기자 bu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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