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상희구 시인이 본 서울 충무로 인쇄골목
요즘 전국의 도회지마다 ‘도시골목투어’가 대세인 듯하다. 우리나라에서 맨 처음 대구 중구에서 시작한 도시골목투어가 세간의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 전국으로 번져 갔는데 현재 대구의 도시골목투어를 비롯하여 저 유명한 통영의 동피랑, 부산 영주동 산복도로 산동네, 춘천 효자동 골목투어 등이 있고 지금도 각 도시에서 관련 사업이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다. 시골 풍광이 좋은 곳이면 으레 올레길이 생겨나듯이 도회지는 어김없이 골목들이 신흥 관광지로 뜨고 있다. 아마도 인간 정서의 가장 원초적인 생태계를 그런대로 온전히 간직하고 있는 곳이 이 골목들이기 때문이리라.
서울도 40∼50여 년 전만 해도 동네마다 정겨운 골목들을 끼고 있었다. 그런 골목들이 지금은 하나둘씩 거의 허물어지고 사라져 가고 없다. 토지 공간의 효율성과 능률성의 극대화를 앞세운 대규모 아파트 단지, 다세대·다가구 연립주택, 주상복합빌딩, 원룸 등이 들어서며 비롯된 현상이다. 그런 것들이 이들 골목을 마치 거대한 고래의 아가리가 작은 물고기들을 빨아들이듯 잠식해 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수도 서울 한복판에 버티고 있는 ‘골목문화재’라고 할 수 있는 충무로 인쇄골목은 대개 바로 옆의 인현동과 을지로 인쇄골목과 한 발자국 사이인 퇴계로를 건너 필동 인쇄골목 등 세 권역을 모두 아우르고 있다. 수천 갈래의 골목길이 마치 실핏줄처럼 서로 얽혀 있어 처음 이곳을 걷는 도시민들은 탄성을 자아내게 된다.
충무로 영화인 거리는 한국의 할리우드라 하리만큼 이름난 곳인데 요즈음도 매년 ‘영화인의 날’을 정해 놓고 성대한 축제를 펼치곤 한다. 원래 이곳 충무로 대원호텔이 있던 자리 언저리는 우리나라 영화산업의 본산이 아니었던가. 내로라하는 수많은 배우들과 가수, 작곡가, 작사가, 시나리오 작가 등 연예인들이 수없이 들락거렸으니 이들의 까다로운 입맛을 감당하느라 일찍부터 제대로 된 음식문화가 발을 뻗친 곳이 이 근처이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서울 충무로 인쇄골목 일대에는 사적지도 많다. 명보극장 앞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생가터(왼쪽), 필동 초입에는 서애 유성룡의 집터가 각각 있다.
바로 대원호텔 자리 건너편에 있는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한식점 ‘진고개’, 옛 매일경제신문사 뒤쪽에 역시 50년 전통을 자랑하는 한정식 전문 ‘대림정’, 맥주에 골뱅이 안주를 곁들여 먹는 ‘맥골(맥주+골뱅이)’의 원조로 유명한 ‘을지로 골뱅이’, 서울에서 포항 과메기 선풍의 시작을 알린 중구청 뒤편의 ‘영덕 횟집’, 을지로 3가 파출소 쪽에서 청계천 방향으로 넘어가는 초입에 있는 양곱창의 명가 ‘양미옥’ 등이 산재해 있다. 가히 평양냉면의 원조 격인 ‘을지면옥’ ‘필동면옥’과 함흥냉면의 종주 격인 오장동 ‘함흥냉면’이 포진하고 있다. 또한 옛 판코리아에서 을지로 2가 방향으로 설렁탕집 ‘이남장’은 공평동에 있는 ‘이문설렁탕’과 쌍벽을 이루는 설렁탕 명가이다. 을지로 4가에서 방산시장 초입의 미싱골목에 위치한 중구 주교동의 ‘우래옥’ 역시 평양냉면과 갈비집으로 유명한 60년 전통의 음식 명가다.
위에 열거한 음식점들이 음악으로 치면 주로 클래식 계열이라면 대개 젊은이들의 입맛을 맞춘 세미클래식이나 팝 계열의 음식점들도 적지 않다. 인근의 직장인들을 겨냥한 식당들이다. 언제부터인가 충무로 인쇄골목 한복판에 ‘서대문 곱창집’이라는 간판이 걸리더니 이내 여기저기 곱창집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어느새 곱창거리가 됐다. 충무로 초입에서 인현시장으로 들어가는 좌우로는 수족관 횟집들이 즐비하고 특히 천하의 명물 쪼그랑 망태기 쭈그러진 냄비로 끓이는 동태찌개집 ‘칠갑산’이 유명하다. ‘칠갑산’ 바로 앞집은 ‘진미식당’ 간판이 걸린 ‘미자네 집’인데 역시 쭈그러진 주전자 막걸리 집으로, 술국 잘 끓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지금도 이 집 ‘비름빡(벽)’에는 ‘미자야 니는 웃째 그래 술국을 맛있게 ？이노!’라고 하는 어느 경상도의 무명시인이 썼다는 글귀가 그대로 낙서가 되어 남아 있다.
1950년대의 시간이 그대로 멈춰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충무로 인쇄골목은 보면 볼수록 참 희한한 곳이다. 한번은 인쇄골목으로 사무실을 옮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 길을 잃었는데 길을 묻느라 남의 사무실인 줄 알고 문을 두드린 곳이 바로 내 사무실의 뒷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충무로 인쇄골목은 눈물 나도록 정겹다. 지금도 충무로 인쇄골목을 걷다 보면 금방이라도 어느 골목의 모퉁이에서 그 옛날 고향의 외할머니나 이모, 고모님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오실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산에서는 숲이 산의 허파 역할을 한다면 도심지에서는 골목이 도회지의 허파 역할을 하는 게 아닐까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이 규격화되고 획일화되어가는 요즈음에 와서 구불구불한 골목들은 인간 심성의 원초적인 정서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이런 골목들을 대할 때마다 더없이 정겹고 마음이 한없이 따뜻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지역의 부동산투기업자들이 들으면 가슴이 뜨끔해질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이러한 골목들은 반드시 보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이런 광경들을 수없이 보아 왔지만 무엇이든 한번 부수고 나서 새로 만들어 낸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지금도 충무로 인쇄골목을 재개발한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려오지만 아직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있는 것은 수많은 이곳의 입주자, 거주자들의 재산상의 이해관계가 서로 상충하여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있는 것일 뿐, 언젠가는 투기의 광풍이 휘몰아쳐 한순간에 쉽게 허물어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것이 이런 세계의 속성인 것이다. 이제는 서울에 몇 남지 않은 골목을 반드시 보존하여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골목은 인간 정서의 생태를 온전히 지니고 있는 곳이다. 우리 모두 우리의 골목들을 지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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