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선거제도 개혁, ‘이원적 접근’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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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 / 정치부장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치달았던 남북 대치 상황이 해소되기가 무섭게 내년 4월 총선 룰을 둘러싼 정치권의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선거구획정 기준 마련 시한인 8월 13일을 이미 넘긴 국회는 자의적으로 연기한 ‘8월 말’ 약속도 지키지 못했다. 정치권은 여당이 주장하는 오픈프라이머리와 야당이 요구하는 권역별 비례대표제 도입을 두고 치열한 기싸움에 빠져들고 있다.

모든 제도는 역사적 전통이나 정치적·지역적 특성 등에 따라 원래 취지대로 작동하기도 하고 심각한 문제점을 노출할 수도 있다. 당내 민주주의 절차인 오픈프라이머리와 전략공천, 국회의원 선출 방식의 일부분인 권역별 비례대표제와 현행 비례대표제 중 어느 쪽이 더 좋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다. 다만, 1987년 절차적 민주주의를 이룩한 우리나라가 최근 ‘실질적 민주주의’ 차원에서는 위기를 맞고 있는 징후가 곳곳에서 감지된다. 선거구 재획정을 계기로 정치개혁 논의가 촉발된 만큼 차제에 이런 근본적 문제들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대의제 민주주의는 두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위기로 평가된다. 첫째는 유권자들이 자신들이 선출한 대표의 권력 행사를 통제할 수 있는지 여부고, 둘째는 선출된 공직자들이 관료 등 선출되지 않는 공직자들을 민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최장집 교수 ‘민주주의의 도덕적 기초에 관하여’). 첫째 기준에서 낙제점을 면키 어렵다는 것은 국회의원들의 선거 후 행태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두 번째 기준과 관련해서는 아예 선출되지 않는 권력이 국민은 물론 선출된 권력까지 통제하고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선출직 공직자는 5000명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선출되지 않는 공직자는 200만 명(시험으로 선발하는 공무원 100만 명+군인·경찰·교사 등)에 이른다. 반면 미국의 경우 선출직 공직자가 51만여 명에 달한다. 더구나 ‘행정은 긍정적인 것인 반면 정치는 나쁜 것’이라는 인식이 유권자들 사이에 확산돼 온 것도 문제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민주주의의 원칙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유권자가 정치인을 통제하고, 정치인이 공무원을 통제하는 선순환 구조가 실질적으로 작동돼야 한다. 그러나 여러 이유로 정치인의 실력과 수준이 저하되면서 그런 통제 시스템은 급속히 약화됐다(‘백낙청이 대전환의 길을 묻다’ 중 박성민 편).

이처럼 ‘정치의 직무유기’는 대한민국 민주주의 위기의 1차 원인이다. 이는 다시 정치인 충원 구조의 문제이고, 그 핵심에 공천제도가 있다. 특정 당의 공천을 받으면 특정 지역에서 거의 100% 당선되는 상황에서 국회의원들은 유권자보다는 공천권자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논리적으로 공천에 대한 유권자들의 영향력을 제고하면 개선이 가능하다. 이것이 오픈프라이머리 도입 주장의 배경이다. 기성 정치인의 기득권을 보호한다는 우려가 없지 않지만 구더기 무서워 장 안 담글 수는 없다. 정치 신인들이 장점을 알리고 지명도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을 보완하면 된다. 다만, 반년 남짓 남은 내년 총선부터 적용하기에는 시일이 촉박한 것이 사실이다. 이번에 제도화하고, 적용은 2020년 선거부터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지역주의 타파도 시급한 과제다. 권역별 비례대표제가 순기능을 한다면 수용해야 하지만, 실질적 의미를 가지려면 상당한 비례대표 증원이 필요하다. 현실적으로 석패율제가 대안으로 나오는 이유다.

민주주의의 위기는 곧 체제의 위기다. 정치인들은 공천권자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유권자의 마음, 즉 시대정신에 봉사해야 한다. 그래야 권력행사의 정당성이 확보되고 선출되지 않는 공직자들에 대한 통제력도 강화된다. 관료와 대기업의 전문성과 효율성은 평가할 만하지만, 이들의 관심은 생래적으로 직역이익과 기업이익으로 환원된다. 대한민국의 국가전략 수립과 시스템 개혁은 정치의 책임이다. 그러나 지금 국회에서 진행되는 논의를 보면, 이런 기대와는 거리가 멀다. 여야는 이런 근본을 돌아보면서 지역구 재획정 등 당면한 과제를 신속히 확정해 차기 총선에 차질이 없도록 하고, 더 큰 차원의 문제들은 최대한 의견 수렴과 논의·결정 과정을 거치되 다음 선거부터 적용하게 할 필요가 있다. 이런 이원적 접근을 하게 되면 합의도 쉽고, 졸속도 최대한 피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