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와 시각>더 추락한 ‘한국 금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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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해동 / 경제산업부 차장

“졸업을 축하드립니다. 취업 준비하시느라 바쁘시겠네요. 취업을 위한 면접을 하기 위해서는 양복과 구두 등이 반드시 필요하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우리 은행에서는 졸업생들의 면접 준비를 돕기 위해 양복과 구두 구입 비용 등을 무이자로 빌려주는 대출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대출금은 직장을 구한 뒤 갚으시면 됩니다.”

영국에서 대학원을 마칠 때쯤인 1999년 주거래 은행인 바클레이즈의 담당 매니저가 필자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다. 이 한 통의 편지는 고객들의 ‘수요(need)’를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는 영국 은행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영국 은행들은 대학이나 대학원 신입생들이 신규 계좌를 열어주면 현금을 지급하는 마케팅을 할 때도 있다. 신규로 계좌를 개설하고 몇 주만 200파운드 이상의 잔액을 유지하면, 해당 고객의 계좌로 200파운드를 입금해주는 방식이다. 왜 이런 식의 마케팅까지 할까? 대학이나 대학원에 입학한 양질(良質)의 ‘평생 고객’을 모시기 위한 것이다.

한국과 달리 영국에서는 이 은행을 거래하다가, 저 은행을 거래하기가 쉽지가 않다. 가능이야 하겠지만,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대출 금리나 신용카드 발급 등에서 ‘신입 고객’ 취급을 받아야 한다. 어쩌면 계좌 개설 자체를 거절당하거나, 신용카드 발급이 안 된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다. 금융 선진국에서 은행 거래를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신용(credit)’과 ‘역사(history)’다. 아무리 훌륭한 직업을 갖고 많은 보수를 받고 있다고 하더라도, 신용으로 쌓은 역사가 없으면 돈을 좋은 조건으로 빌릴 수 없고, 신용카드 발급을 포함한 다양한 서비스를 받기가 어렵다. 금융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신뢰를 주고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수십 년 거래한 주거래 은행보다 통장 하나 갖고 있지 않은 회사 앞에 있는 은행이 제시하는 대출 금리가 더 낮은 게 현실이다. 주거래 은행을 바꾸는 것도 전기료, 가스료 등 자동 이체만 꼼꼼하게 처리하면 별로 어렵지도 않고, 주거래 은행을 바꾼다고 해도 별다른 손실이나 불편함도 없다. 영국에서는 주거래 은행의 담당 매니저가 세상에서 가족 다음으로 자신에 대해 많이 아는 사람일 것이다. 결혼을 하든, 취직을 하든, 집을 사든, 창업을 하든, 은퇴를 하든 은행의 담당 매니저와 상의를 할 수밖에 없도록 시스템이 짜여 있다. 그만큼 주거래 은행과 담당 매니저에 대한 신뢰도 깊다.

올해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국가경쟁력 평가에서 우리나라 금융시장 성숙도는 세계 87위를 기록했다. 지난해 성적(80위)도 ‘낙제’였는데 올해는 그나마 7단계나 더 떨어진 것이다. 금융위원회는 기자들에게 자료까지 배포하면서 “억울하다”고 나섰지만, 억울함을 주장하기 전에 본인들이 반성할 점이 없는지부터 따져보는 게 순서일 것이다. 2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국의 은행업, 좀 더 넓게는 금융업은 별로 바뀐 게 없다. 정부가 추진하는 4대 부문 구조개혁에도 분명히 금융이 포함돼 있기는 한데 그동안 무엇을 했는지, 앞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haedong@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