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통영은 조선 최대의 군사 도시였고, 군수품 제작을 위해 8도 각지에서 뽑혀온 12공방의 장인들이 활동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서양문물이 어느 곳보다 먼저 유입될 수 있었다. 세계적 음악가 윤이상, 소설가 박경리, 시인 유치환, 화가 전혁림 등 통영 출신 예술가들이 유난히 많은 건 예술가가 나올 수 있는 이런 배경 때문이다. 이중섭은 이곳에서 그의 대표작인 ‘흰소’와 ‘황소’ 등 소 연작을 그렸다.
(13) 통영과 이중섭의 ‘소’ 연작
이중섭이 그의 자화상 같은 ‘흰소’와 ‘황소’ 등 소 연작을 그린 장소는 경남 통영이다. 통영에 살던 시절, 이중섭은 또 다른 대표작 ‘달과 까마귀’ ‘부부’ ‘도원’ ‘가족’은 물론 ‘통영 풍경’ ‘통영 유원지’ ‘충렬사 풍경’ 등 통영을 배경으로 한 다수의 작품을 남겼다. 한국에서 가장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는 화가에게 그렇게 깊은 영감을 준 통영은 대체 어떤 곳일까. 과거 통영은 500여 척의 전함과 3만여 명의 수군이 주둔하던 조선 최대의 군사 도시였다. 사람들은 통영이 본래부터 경상도인 줄 알지만 오랜 세월 통영은 경상도가 아니었다. 1603년, ‘여우와 토끼가 뛰노는’ 한미한 포구였던 경상도 고성현 두룡포에 신도시 공사가 시작되었고 그렇게 탄생한 곳이 삼도수군통제영, 곧 통영이다. 경상도 땅에 건설됐지만 통영의 수령인 삼도수군통제사는 경상도 관찰사와 동급인 종2품이었고, 통제영이 폐지된 1895년까지 독자적으로 통영과 전라, 경상, 충청 3도의 수군 주둔지들을 다스렸다. 통영은 3도에서 온 군사들과 군수품 제작을 위해 8도 각지에서 뽑혀온 12공방의 장인들, 그리고 전국에서 몰려든 상인들이 모여 이룬 융합 도시였다. 이들이 경상도와는 별도로 삼백여 년 동안이나 독자적인 문화와 역사를 만들었다. 지금처럼 육로가 발달하지 못했던 과거에는 바다가 고속도로였으니 통영은 길이 불편한 경상도 내륙보다는 수로를 통해 경상도 해안이나 전라, 충청 등 타 지역들과 더 적극적인 문물교류를 했다. 군사도시인 까닭에 양반보다는 중인들이 주축이었고 장인들의 수공업과 객주, 상인들의 상업 활동이 전국 어느 곳보다 활발했다. 많은 통영 사람들이 나전칠기, 화공 등 12공방의 일을 삼백 년 동안이나 가업으로 이어오면서 그들의 몸속에는 예술적 유전자가 형성됐다. 음악가 윤이상의 아버지도 유명한 소목장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과 가깝고 교류가 활발했던 까닭에 서양문물이 어느 곳보다 먼저 유입될 수 있었다. 1914년에 이미 ‘봉래좌’란 극장이 들어섰고 1930년대는 영화사가 2곳이나 있었다. 통영삼광영화사는 1930년에 김유영 감독의 ‘화륜’을, 1931년에는 이구영 감독의 ‘갈대꽃’을 제작하기도 했다. 대표적 친일연극인 유치진이나 세계적 음악가 윤이상, 소설가 박경리, 시인 유치환, 김상옥, 김춘수, 화가 전혁림 등 통영 출신 예술가들이 거목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도 모두 통제영 12공방에서 비롯된 예술적 유전자와 신문물을 일찍 수용할 수 있었던 통영의 역사, 지리적 요인들 때문이었다. ‘짜장면도 맛없다’는 속설이 있는 경상도에서 통영만 유독 음식이 맛있는 이유도 통영이 경상도가 아닌 ‘통제영’이라는 특별자치구였던 데서 유래한다.
통영에는 이중섭이 머물며 그림을 그렸던 건물이 아직도 건재하다. 이중섭은 한국전쟁 피란시절인 1952년 봄에 통영으로 와서 1954년 봄에 떠났으니 만 2년을 통영에서 살았다. 소련의 비평가들에게 마티스나 피카소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고 원산미술가동맹 위원장까지 지냈던 이중섭은 1·4후퇴 때 가족들과 원산에서 부산으로 남하한 뒤 해군 경비정을 얻어 타고 제주 서귀포에 들어가 7개월을 살았다. 하지만 이중섭은 1952년 다시 부산으로 나와 생계가 어려워지자 아내와 아이들을 일본으로 보낸 뒤 부두노동자로 전전했다. 그때 이중섭을 통영으로 이끈 이가 유강렬이었다. 후일 홍대산업미술대학원장을 지낸 유강렬은 당시 통영에 있던 경남도립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이하 양성소) 주임강사였다. 통영에서 이중섭의 근거지가 됐던 양성소는 통영시 항남동 241-1번지, 현재 항남목욕탕 부근이다. 통영시절 이중섭은 1952년 녹음(호심)다방에서 전혁림, 유강렬, 장윤성과 함께 ‘서양화 4인전’을 가졌고, 1953년 12월에는 성림다방에서 40여 점의 작품으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통영시 항남동 241-1번지에 있는 경남도립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 자리. 통영에서 이중섭의 근거지가 됐던 건물이며, 비교적 보존이 잘 돼 있으나 통영시의 무관심으로 언제 헐릴지 알 수 없다. 사진 아랫부분 우중간에 이중섭이 머문 자리를 표시한 비석이 보인다.
이중섭이 제주도나 부산이 아닌 통영에서 대표작들을 집중적으로 쏟아낼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통영문화원의 김일룡 원장은 ‘생활상의 안정’ 때문일 거라고 추정한다. 통영에 온 이중섭은 유강렬의 하숙집에 함께 기거하며 숙식이 해결됐고 통영에서 만난 후원자들 덕에 작업에 몰두할 수 있었다. 김 원장은 통영 향토사의 독보적 연구자인데 10년 간 화랑을 경영한 적도 있어서 통영 시내 어느 집에 어느 작품이 있는지까지 훤히 꿰고 있다. 김 원장은 “이중섭이 통영의 지인들로부터 받은 후원은 주로 그림을 사주는 방법”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통영상공회의소 회장을 지낸 김용재도 전시회 때 이중섭의 그림 3∼4점을 사갔다. 후일 초대 충무(통영)시장을 지낸 김기섭도 후원자였다. 김 원장은 어릴 적 김기섭의 집에서 이중섭의 ‘흰소’가 소파 뒤에 걸려있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흰소’는 이중섭이 김기섭에게 선물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후일 항남동 양지다방에 잠깐 걸려 있다가 외지로 팔려갔다. 통영에 있던 이중섭의 다른 작품들도 대부분은 팔려나가 버렸고 현재 통영에는 3점 정도만 남았을 것으로 김 원장은 추정했다. 수채화 한 점과 유화 두 점인데 미공개 작품들이다.
양성소는 본래 2층짜리 청루 건물이었는데 이를 학교로 바꾼 것이다. 청루는 기생이 있는 요정이다. 양성소 부근이 일제 때는 청루 골목이었다. 이중섭은 양성소 강사가 아니었으나 늘 이 건물에 살다시피 했고 항상 스케치북을 들고 와 스케치를 했다. 소 연작과 대표작들도 이 건물에서 구상되고 그려졌을 것이다. 숙명여대 미술대학장을 지낸 통영옻칠미술관의 김성수 관장도 양성소 출신이다. 그가 이중섭을 처음 만난 것은 1952년. 당시 양성소에서 학생들은 나전칠기는 물론 디자인과 소묘, 설계 디자인 등을 배웠다. 이중섭은 강사가 아니었지만 가끔씩 학생들을 지도해 주기도 했다. 어느 날 김 관장도 목탄으로 연습 중이었는데 이중섭이 연필을 쥐어주면서 직접 소묘를 지도해주기도 했다. 김 관장은 이중섭이 조용하고 차분했으며 양성소 2층 강의실 발코니에 기대 스케치를 했다고 기억한다. 이중섭은 늘 수심에 차 있었는데 어린 마음에도 그의 근심이 와 닿았다. 강의실 옆에는 작은 방이 하나 있었다. 선생들의 아지트였다. 이곳에서 이중섭, 유강렬, 김상옥, 전혁림 등이 모여서 놀았다. 이 방에는 춤을 배우는 스텝도 그려져 있었다. 춤을 출 수 있는 넓이는 못됐으니 스텝을 배우는 정도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가끔씩 세련된 차림의 여자들도 방을 드나들었다. 양성소가 당시 통영 예술계의 사교공간이기도 했던 셈이다. 김 관장은 부유한 집 자제였던 통영의 화가 김용주가 이중섭을 많이 후원해 준 것으로 기억한다. 늘 가방을 든 수행원을 거느린 김용주는 런던포그를 입고 다니던 멋쟁이였는데 이중섭뿐만 아니라 많은 예술인들의 후견인 노릇을 했다 한다.
통영시절 이중섭의 작품 활동 근거지였던 양성소 건물은 1930년대 초에 지어졌지만 별 훼손 없이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1층은 식당 영업 중이고 2층은 DVD 게임랜드였다가 카페로 바뀌었으나 이내 문을 닫고 지금은 비어 있다. 2층의 일부는 살림집으로 이용 중이다. 최근 주인이 매물로 내놨다는데 통영시 문화관광과에 문의해 보니 시에서는 매입해 보존할 계획이 없다고 한다. 다른 누군가 매입해서 허물어버린다면 어쩔 것인가. 나는 통영시의 무관심을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다. 하긴 윤이상의 생가터와 인간문화재 추용호 소반장의 공방도 도로 공사를 이유로 없애려는 통영시가 아닌가. 특히 추용호 인간문화재의 공방은 통제영시절부터 존재해온 장인의 공방으로는 유일하게 통영에 남은 고건축물이라 문화재적 가치가 아주 큰 공간이다. 하지만 통영시는 소송까지 해가며 인간문화재를 내쫓고 공방을 철거해 버리기 위해 노고를 아끼지 않고 있다. 그런 통영시에게 이중섭의 유산까지 보호해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그러니 이참에 문화체육관광부라도 나서서 윤이상 생가터도, 추용호 인간문화재의 공방도, 이중섭이 작품 활동을 한 건물도 살릴 대책을 세워준다면 얼마나 고마운 일일까.
글·사진 = 강제윤 (시인·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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