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공간>자그마한 암자·신비로운 龍沼… 因緣이 태동하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한승원의 구도소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배경이 된 전남 장흥의 신흥사. 입암산에 자리한 신흥사는 송광사의 말사로 약 300년 전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흥사에는 1751년(영조27년)에 봉안된 범종이 있다. 김동훈 기자 dhk@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소설의 주요 배경 중 하나인 장흥천 방림소. 방씨·임씨 성의 부자(富者)동네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지 않아 홍수에 잠긴 곳이라는 전설이 전한다. 김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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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소설가 한승원의 ‘아제아제 바라아제’ 속 장흥 신흥사

전남 장흥읍 북편에 작은 절 신흥사가 있는데 그 절을 가고 오는 길에 방림소(沼)를 만난다. 북쪽에서 흘러온 탐진강물의 도도한 물결이 절벽에 부딪혀 몸을 비트는 어름에 방림소가 있다. 절벽에는 봄이면 진달래꽃들이 만발한다. 그 진달래꽃과 방림소의 보를 타고 철철 흐르는 물은 아름답고 그윽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방림소에는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전설이 있다. 옛날 옛적에 계속되는 가뭄으로 인해 몇 년 동안 흉년이 들었고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굶어 죽어갔다. 그때, 관세음보살이 현신한 늙은 스님이 이곳저곳의 부잣집들을 찾아다니면서 구걸을 해다가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한테 죽을 쒀주곤 했다. 한데, 읍내 마을의 부잣집들은 집의 대문을 굳게 걸어 잠갔다. 스님이 애타게 ‘사람들이 굶주려 죽어갑니다. 시주 좀 해주십시오!’하고 소리치며 문을 두들겨도 부자들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스님은 성 안팎을 쓸고 다녔지만, 단 한 톨의 시주도 얻지 못했다.

그런데 읍성의 동북쪽, 방(方)씨·임(林)씨 집성촌의 한 부잣집의 젊은 여인이 시부모 모르게 쌀 한 말을 듬뿍 바랑에 담아주며 얼른 불쌍한 사람들을 구제하라고 말했다. 스님이 젊은 여인에게 말했다. ‘바야흐로, 이 세상은 말세입니다. 잠시 후에 큰 물난리가 나서 집과 사람들이 다 떠내려가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말고, 얼른 저 앞산 위로 올라가 재난을 피하도록 하시오. 산으로 올라가면서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모든 인색한 부자들이 홍수에 떠내려가면서 살려달라고 소리쳐댈지라도,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마시오. 뒤를 돌아보면 사람들을 구하고 싶어질 것이고, 그들을 구하려고 하면 그들과 함께 죽어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요….’ 스님이 사라진 다음 비가 억수로 퍼부었고 강물이 범람했다.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처럼 붉은 물결이 소용돌이치며 집을 쓸고 내려갔다. 사람들과 짐승들은 집과 더불어 떠내려갔다. 물은 점차 산기슭까지 차올랐다. 물에 떠내려가는 사람들이 살려달라고 소리쳐댔다. 젊은 여인의 시어머니와 시아버지와 남편도 물에 떠내려가고 있었다. 산꼭대기 쪽으로 올라가던 젊은 여인은 스님이 뒤돌아보지 말라고 당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 나만 살아 무얼 할 것인가,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제해야 한다’하고 생각하며 몸을 돌렸다. 그 순간 하늘에서 번개가 번쩍하며 뇌성벽력이 쳤고, 그녀는 그 자리에서 거대한 억불바위(億佛·미륵바위)가 되어버렸고, 그 부자동네는 지금의 시퍼런 방림소가 되어 버렸다.

어린 시절에 신흥사에서 상좌 노릇을 했다는 친구가 있다. 나이 육십에 직장에서 퇴임한 다음 미국에 이민했다. 그 친구는 한 부잣집의 맏아들이었는데, 점을 치니 단명할 것이라고 하므로 어른들이 절에다가 팔아버린 것이었다. 명을 길게 하려고 자기네 귀한 아들을 팔아버리는 경우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무당에게 파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절에 파는 것이다.

절에 팔린 경우에는 상좌 노릇을 하는 것이다. 말이 상좌 노릇이지 사실은, 땔나무하고 마당 쓸고 잡심부름을 하는 불목하니 노릇인 것이다. 그 친구의 집에서는 자기네 아들이 천덕스럽게 고생을 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절에 판 것이다. 개고생을 시키는 것이 명을 길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 친구는 비가 억수로 쏟아지면 학교에 간 주지 스님의 아들을 마중 나가고, 축구하다가 발목을 접질린 그 아들을 업고 방림소를 지나오곤 했는데, 소용돌이치며 흐르는 강물이 무서웠다. 주지 스님과 그의 아내는 그에게 땔나무를 해오라 하고, 마룻바닥을 걸레로 닦으라 하고, 마당에 쌓인 눈을 쓸라고 하고, 모든 방에 불을 지피라고 했다. 배고픔을 참으면서 그 일들을 하고, 해가 뉘엿뉘엿 지면 어머니가 보고 싶어 숨어서 울었다. 친구는 신흥사에서의 좋지 않은 기억들 때문에 성장하면서 기독교로 개종했다.

그 친구의 서글픈 체험담을 들었으면서도 나는 신흥사와 그 앞을 흐르는 방림소를 나의 소설 속에서 인연 생성의 시공으로 그렸다. 소설 ‘아제아제 바라아제’ 속의 순녀처럼 젊은 시절을 절에서 보내다가 환속한 여자가 있다. 그 여자는 여고시절 나의 제자였는데, 지금 제주도에서 살고 있다. 고백하자면 나는 그 여자가 이야기해준 자기의 가족사와 체험담을 듣고,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그 소설을 썼다.

“장흥성 밖의 방림소 위쪽에 신령사가 있었고, (순녀의) 할머니의 동생은 그 절의 주지였다. 할머니는 아들딸들과 며느리를 데리고 그 절로 갔다. 절에는, 세 칸 겹집만 한 작은 법당이 하나 있었고, 그 옆에 세 칸짜리 초가 두 채가 있을 뿐이었다. 동생은 대처승이었다.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과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이 있었다. 초가 한 칸은 동생네 가족이 살고, 다른 한 칸은 주지가 스물이 될까 말까 한 상좌와 함께 살았다. 뒤란 쪽에 사방 여덟 자쯤의 객실 한 칸이 있었다. 주지는 할머니 가족을 반갑게 맞아들였다. 할머니는 주지에게 큰절하고 나서 주지의 두 손을 끌어다가 모아 쥐었다. 절은 군집해 있는 느티나무와 보리수나무의 그늘 속에 묻혀 있었다. 산그늘이 쪽빛 방림소와 들을 먹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날부터 아들은 상좌승과 함께 기거했고, 할머니와 두 딸과 며느리는 객실에서 잤다. 할머니는 주지에게 자기 아들의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혀달라고 말했다. 평생 중노릇을 하게 해 달라고 청했다.”

소설 ‘아제아제 바라아제’의 한 대목이다.

나는 소설에서 신흥사를 모델로 하여 신령사를 묘사했다. 신흥사엘 가다가 만나는 시퍼런 용소(龍沼) 밖으로는 높은 보가 막혀 있어 물은 더욱 시퍼렇게 깊은데, 강물은 보를 타고 흘러내리면서 하얗게 물보라를 일으킨다.

실제로는 용소를 지나간 다음 들을 건너 산속으로 들어가야 신흥사는 있는데, 소설 속에서는 절에서 용소가 바라보이는 것으로 그렸다. 신령사라는 절과 신비스러운 용소의 물을 대비시킨 것은 아마 생명체의 태동과 인연의 생성을 암시하기 위해서였을 터이다.

‘아제아제 바라아제’에서 주인공 순녀를 비롯한 중요인물들은 모두 제주도에서 나고 자랐는데 제주 4·3 난리를 피해 장흥으로 피신한 사람들이다. 순녀의 할머니는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두었는데, 그 삼남매와 손녀인 순녀까지도 절에 바쳤다. 그 계기 혹은 인연을 만든 공간이 신령사이다. 인연의 일어남을 연기(緣起)라고 말한다.

순녀 할머니는 아들을 전쟁터에 보내지 않기 위해 주지 스님의 줄을 잡아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게 한 것이다.

인연은 얽히고설키기 마련이다. 할머니의 큰 딸은 상좌와 정분이 났고, 절에서 쫓겨난 상좌는 군대에 가서 전사했는데 유골이 되어 절로 돌아왔고, 큰딸은 그 충격으로 머리를 깎았다. 둘째 딸은 금빛 승복을 입고 부처가 되는 꿈을 꾸곤 하다가 마찬가지로 머리를 깎았다. 자식 삼남매 모두가 스님이 된 것인데, 큰딸과 작은딸은 각기 독특한 유형의 비구니스님이 되었다. 큰딸은 한 남자를 사랑해본 적이 있는 온후한 비구니스님이고, 작은딸은 숫처녀로서 오로지 깨달음을 지향하는 냉담한 지계(持戒)의 비구니스님이다.

며느리가 고추 달린 자식 하나를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순녀의 할머니는 손자 하나만으로는 불안했다. 손자를 하나만 더 낳을 수 있게 해달라고 중노릇을 하는 아들에게 졸라 며느리와 합방을 시켜주고 싶었다. 불도에 몸담고 한창 수도하는 아들이 쉽게 말을 들어줄까. 할머니는 거짓말을 하여 수도 중인 아들을 속여 집으로 데려오기로 작정했다. 그녀는 중노릇하는 아들을 찾아가서 거짓말을 했다. “느그 각시 다 죽어 간다. 송기막대기 같이 말라서 숨만 간신히 붙어 올닥거린다. 마지막 소원이 너를 한 번만 보고 죽는 것이란다. 사람이 가슴에 원한을 안고 죽으면 원귀가 되는 법이란다. 계집의 원한은 오뉴월이도 서리를 친다고 하지 않더냐. 원귀가 되어 네 주변을 나돌면 수행하는 데도 마가 될 것이다.” 아들을 집으로 데리고 온 할머니는 아들에게 통사정을 하여 며느리와 합방을 시켰고, 그 결과로 딸 하나를 얻었는데, 그 딸이 이 소설의 주인공인 순녀이다. 순녀는 장차 화엄경을 몸소 실천한 승려가 된다. ‘아제아제 바라아제’는 소설로 쓴 화엄경에 다름 아니다.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