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저자 데이비드 르 베이는 수직으로 오르내리는 대신 수평으로 둘러 걷는 치유와 성찰의 걷기를 선택했다. 사진은 제주도 올레길을 걷는 모습. 뉴시스
마흔아홉, 몽블랑 둘레길을 걷다 / 데이비드 르 베이 지음, 서정아 옮김 / 책세상
광속의 시대는 말한다. 목표를 향해 뛰라고. 물건이 넘치는 소비의 시대는 말한다. 많이 가져야 멋지다고. 하지만 목표만을 향해 뛰다 보면 옆을 둘러보지 못하고, 많이 가진다고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새해엔 속도를 늦춰보자. 새해 첫날 걷기로 결심한 사내 이야기와 물질만능주의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는 책을 전한다.
새해 첫날 누구나 결심을 한다.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이 무료해질 순간 돌아오는 ‘1월 1일’의 의미는 그만큼 오묘하다. 모두 평등하게, 지난 한 해를 반성하며 새로운 ‘나’를 소망할 기회를 얻는다. 2016년에도 어김없이 그날이 찾아왔다. 이번에는 어떤 결심을 품고 한 해를 시작할 것인가. 마흔아홉을 맞은 새해 아침, 몽블랑 둘레길을 걷기로 결심한 데이비드 르 베이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아동심리치료사이자 영국 로햄턴대 교수인 베이는 앞서 사십대 중반 피레네산맥 GR10(도보여행길 10)을 7주간 걸었다. “중년의 위기감 이상의 뭔가”를 느꼈고, 탈출의 기분이 필요했다. 광대하게 펼쳐진 피레네산맥을 따라 지중해와 대서양을 횡단하는 850㎞의 여정은 그에게 큰 감동을 줬다.
베이는 쉰을 앞에 두고 또 한 번 산을 떠올렸다. 흔히 인생의 황혼에 접어들었다고 표현되는 나이에 그 역시 심리적 동요와 신체적 변화를 겪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외동딸 제시는 자신의 품을 떠나려 하고 있었다. 정서적 균형과 평정심을 회복하기 위해 자신만의 대처법이 절실했다.
베이와 친구 루퍼트는 서유럽의 최고봉, 몽블랑(높이 4810m)을 목표로 정했다. 연간 100여 명의 등반가를 죽음으로 내모는 이 산의 정상을 정복하기보다 빙 둘러 걷는 도보 길을 택했다. 일명 170㎞ 길이의 투르 뒤 몽블랑(Tour du Mont Blanc·TMB)으로, 이들은 몽블랑 일주(一周)가 인생의 순환고리를 연상시킨다는 점에 이끌렸다. “이 여정은 탄생에서 죽음까지, 또는 재에서 나와 재로 돌아가기까지, 삶의 순환을 상징했다.” 베이는 그의 배낭 깊은 곳 아버지의 유해 일부가 담긴 작은 플라스틱 통 하나도 챙겨 넣었다.
실행은 그해 9월에 이뤄졌다. 레우슈에서 출발해 반시계방향으로 쿠르마유르, 샹페, 샤모니에 이르는 열흘간의 일정이었다.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에 걸쳐 있는 몽블랑 산자락의 다채로운 전경을 만끽하며 베이와 루퍼트는 삶을 되돌아봤다. 길이 고되고, 숨이 가빠올수록 더더욱. “모르겠다. 내가 무언가를 향해서 걷고 있는지, 무언가로부터 멀어져가고 있는지. (중략) 하지만 엄연한 사실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장관 속을 걷는 일에 매일 몇 시간씩 할애하면서 인생에 관해 사색하지 않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걷기의 매력이란 이처럼 문득 찾아오는 사색의 순간이다. 많이 걷는 자는 모두가 철학자다. 로버트 맥팔레인은 명저 ‘오래된 길 위에서: 어느 걷기 여행 이야기’에서 “도피와 탈출을 부추기기보다 통찰과 사색을 가능케 하는 걷기”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걷기는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행위가 아니라 그 자체로 깨달음의 수단”이라는 말도 남겼다. “걷기는 도피와 탈출을 부추기기보다 통찰과 사색을 가능케 하며, 길은 공간을 가로지르는 수단뿐 아니라 느끼고 존재하고 깨닫게 하는 방법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베이는 몽블랑 둘레길은 수백 년에 걸쳐 그곳을 걸었던 숱한 사람들의 발길을 글자 그대로 땅속 깊이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길은 단순한 길이 아니라 “우리의 몸과 마음을 과거, 현재, 미래와 연결시키는 것이며, 우리를 시간 속에 쌓인 과거의 경험들과 가능한 미래들의 연속체를 따라 앞뒤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라고 느꼈다. 몽블랑 둘레길을 걸으며 “모든 장소에는 길이 있듯 사람들 속에도 반드시 길이 있음”을 깨달은 베이는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 ‘인생의 도전이란, 순간에 머무는 것’ ‘산 앞에선 절대 호기를 부리는 게 아니다’ 같은 명언이나 자신의 생각을 책에 녹여냈다. 그의 정신은 여정의 마무리로 향하면서 점차 고양된다.
우리의 삶은 사색을 하기에 너무 빠르지 않은가. 머무르면 뒤처진다는 강박 관념이 현대사회를 지배한다. 때로는 멈춰 서서 뒤를 돌아봐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만, 실행에 옮기는 사람은 드물다. 그마저도 사치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이번 새해, 베이의 이야기가 눈에 띈다. 꼭 산행이 아니어도 좋다. 책상 앞에 앉아 한순간에 금연, 다이어트, 어학 공부를 결심하기보다 속도를 늦추고 이들이 내 삶에 어떤 의미를 줄 수 있는지 고민해보는 것은 어떨까.
책에는 몽블랑 등반과 산행의 역사, TMB의 경로, 숙박시설 등에 대한 정보도 담겼다. 이곳을 여행하려 계획 중인 예비 산행자의 가이드 북으로 손색이 없다.
유민환 기자 yoogiz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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