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김인현 고려대 교수가 지난달 27일 서울 성북구 안암로 고려대 신법학관 내 연구실에서 배 모형물을 이용해 항해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김 교수는 “해상법의 국제경쟁력을 키우고, 장기적 시각에서 해운업의 체질을 튼튼하게 만들려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선규 기자 ufokim@
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학창시절에 읽은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의 한 구절이다.
시를 읽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인생에서 걸어온 길보다는 걷지 않았던 길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을 떠올리게 된다. 왜 그때 그 선택을 못 했을까. 누군가는 선택의 순간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돌아서야 했던 아련한 추억에 가슴을 치는 이도 있지 않을까.
선장과 교수. 거센 파도와 태풍에 온몸으로 맞서는 구릿빛 피부의 선장과 글만 읽는 학자를 지칭하는 백면서생(白面書生) 풍의 교수, 이 둘은 어쩐지 잘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조합이다. 바다와 육지라는 서로 다른 생존 공간이 주는 이질감도 크다. 한 가지 인생만 살아내기에도 왠지 벅찰 것 같은데 두 개의 삶을 조화시킨 이도 있다.
바닷가에서 태어나 항해사와 선장으로 근무하다 30대 중반의 나이에 다시 법학 공부를 시작해 김&장 법률사무소, 목포해양대, 부산대 교수를 거쳐 현재 고려대에서 해상법을 강의하는 김인현(57) 교수의 얘기다.
김 교수에게 있어 바다는 항상 두 가지 얼굴을 가진 야누스였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주는 비옥한 농토의 곡물과 같은 존재였지만, 죽음의 고비를 수차례 넘게 한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영덕군 축산항에서 태어난 김 교수는 조부와 부친이 제법 큰 규모의 수산업에 종사해 어려움을 모르고 컸다. 초등학교 1학년 때인 1965년 집에서 운영하던 선박 ‘대경호’가 좌초·침몰하면서 가세가 기울어 빚더미에 올라앉는다. 그는 초등학교를 마치고 대구나 서울로 유학하고 싶었지만, 가정형편이 이를 허락지 않았다. 그 때문에 1971년 영해중학교에, 1974년 영해고등학교에 진학한다. 그가 해양대학에 진학한 것은 원래 가업이 수산업이었던 점도 영향을 미쳤지만, 작은아버지의 권고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78년 해양대학을 지원해 34기 항해학과 200명 중 한 명으로 입학한다.
“해양대학은 우리에게 강한 정신력과 국가관을 심어줬죠. 아침마다 이뤄지는 조별 과업, 청소 검사, 특히 주말에 있었던 영도 일주 집총 구보는 장차 최악의 상황이 올 때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길러줬어요. 돌이켜 보면 해양대학 시절은 나의 인생에서 큰 도움을 준 시절이었어요.”
해양대학을 졸업한 후 김 교수는 부친의 뜻에 따라 해운회사에 취직하기로 마음먹는다. 그가 선택한 회사는 당시 해양대학 학생들이 선호하던 일본의 ‘산코라인’이었다. 1990년 12월 해양대학 동기 중 최연소 선장이 됐고, ‘산코 하베스트’호에 승선했다. 호사다마(好事多魔)였을까. 미국 탬파에서 인광석을 싣고 호주로 향하던 산코 하베스트는 1991년 2월 호주 근처에서 좌초 사고를 당해 침몰하고 말았다. 호주로 들어가는 항로에 암초가 있는데, 오랜 육상 근무 후 승선한 2등 항해사가 암초를 해도에 넣어 항해하라는 지시를 지키지 않아 생긴 사고였다.
“사고 후 자신감을 잃고 몇 달 동안 집안에서 칩거했습니다. 선박 전손(全損), 즉 침몰 사고가 부끄럽고 창피했어요. 마음을 가다듬고 이를 극복할 계기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그가 마음을 다스리게 된 계기는 ‘명심보감’ 공부였다. 매일 하루 5시간씩 6개월간 180여 개 문장을 노트에 한자로 옮겨적으며 잘못을 반성하고, 절대 실패하지 않는 인생을 살겠노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해난사고는 그의 인생에 또 다른 전환점이 됐다. 호주에서 진행된 해난사고 소송을 통해 해상법에 흥미를 느낀 그는 1년간 고학을 해 고려대 법학 석사과정에 합격한다. 해상 사고가 나서 소송이 걸려도 대처할 방법을 모르는 선원들에게 제대로 가르쳐주자는 마음이 있었다. 석사과정을 마칠 무렵 국내 최대 법률사무소인 ‘김&장’에서 연락이 왔다. 선장 경력에 법학석사를 겸비한 그와 함께 일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1996년 우리나라 최고의 인재들이 모인 김&장 법률사무소의 프로페셔널이 됐다.
“해상법 분야에는 선장 출신의 법학 박사가 교수가 되어 학문적으로 처리할 내용들이 참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요. 마침 한국해양대와 목포해양대 두 곳에서 자리가 났는데, 나를 더 필요로 하는 목포해양대에 전임강사로 발령받아 갔어요.”
뒤늦게 학문의 길에 눈을 뜬 그에게 학구적인 갈증이 끊임없이 솟아났다. 미국 텍사스대 법과대학 오스틴에 1년 과정을 다녀온 뒤 “학부에서 법학 공부를 먼저 했더라면 미국에서의 공부도 쉬웠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남았다. 망설임 없이 고려대 법과대학에 학사편입을 했다. 어려운 결정이었다. 지도 교수조차 “이미 학자로서 인정받는 사람이 그런 겉모습에 신경 쓰지 말라”고 충고했지만 응시했고, 당당히 합격해 03학번이 됐다. 2년간에 걸쳐 목포와 서울을 오가며 수업을 받았고, 결국 순서는 바뀌었지만 법학사, 법학 석사, 법학 박사를 온전히 갖추게 됐다.
마침 전국에 도입된 로스쿨들이 전문 분야의 전문가를 양성한다는 목표를 세우면서 선장 출신에 법학박사이고, 법률사무소 근무경력을 가진 그에게도 기회가 주어졌다. 부산대 법과대학에서 초빙했고, 1년 반 뒤에 모교인 고려대에서 지도교수의 후임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김 교수는 고려대 학부에서 보험해상법을, 로스쿨에선 해상법과 영어 해상운송법을 강의한다. 1년에 영어논문을 포함해 7∼8편의 논문을 학회지에 발표한다. 우리나라 해상법을 국제화하기 위해 영어로 옮기는 작업을 쉬지 않고 있다. 지난 2005년 이후에는 해상법에 관한 대법원 판례를 미국의 해상법 전문저널인 ‘저널 오브 마리타임 로 앤드 커머스’에 꾸준히 소개하고 있다. 해상법을 전공하는 이균성 한국외국어대 교수가 “해상법은 김인현 교수가 있었기에 세계화가 가능했다”고 평가했을 정도다.
김 교수의 꿈은 두 가지다. 하나는 세계적인 해상법 학자가 돼 우리나라가 세계 해상법을 리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해사법정의 활성화다.
“우리나라 해상법이 발전하면 외국으로 가던 해상사건을 우리가 맡을 수 있어요. 법률시장을 영국이 장악하고 있어 우리 선주와 조선사 사이에 분쟁이 생기더라도 함께 비행기를 타고 영국의 해사중재원에 가야 하는 게 현실이에요. 우리가 해외에 엄청난 법률비용 수임료를 지불해 법률 수지 적자가 커지게 된 이유지요. 우리나라가 법률 경쟁력이 있다면 그럴 필요가 없어지지요. 우리나라 해상법 수준은 현재 세계 30위권 정도에 불과한데 하루속히 10위권에 진입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자면 첫째 대학에서 해상법 강의가 활성화돼야 하고, 다음으로 우리나라 해상법을 영어로 외국에 알리는 작업이 시급합니다.”
중국이나 홍콩, 싱가포르에는 해사법원이 있지만 우리나라엔 없다. 해사중재원 조차 없다.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 해사 사건의 90%가량은 영국으로, 나머지는 싱가포르나 홍콩으로 간다. 다행히 2005년 ‘해사법정·해사중재 활성화 위원회’가 출범했고, 늦어도 2년 이내에 생길 것이라고 했다.
김 교수는 자신의 성공의 비결로 은사인 채이식 교수를 비롯해 주위에 훌륭한 인생의 조언자가 많았다는 점을 꼽는다. 또 주어진 환경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한 결과 좋은 결과가 주어졌다고 생각한다. 시골 출신으로서 학연이나 지연의 도움 없이, 자신의 처지를 알고 남들보다 2배, 3배 더 노력한 것도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됐다고 믿는다. 그런 점에서 그는 젊은 후배들에게 “어느 학교를 나왔다는 것보다 성패를 더 좌우하는 것은 결국 일에 대한 열정과 긍정적인 삶의 태도, 친화력, 끈기 등이 더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인터뷰 = 박양수 부장대우 (전국부) yspark@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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