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은퇴 후 전문 집필가로도 주목받고 있는 김종헌 전 남영비비안 사장이 지난 21일 강원 춘천시 석사동에 있는 북카페에서 “더 나이 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역사에 남을 책을 몇 권 쓰고 싶다”며 환하게 웃고 있다. 곽성호 기자 tray92@
남영비비안 CEO → 북카페 주인 → 전문 집필가 김종헌 씨
점심시간이 약간 지난 오후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생각보다 넓었다. 200㎡는 돼 보였다. 묵향(墨香)인가 싶더니 감미롭고 고소한 파스타 냄새도 배어 나온다. 넓고 풍성한 원탁 테이블에서 후식을 즐기는 손님 사이로 앞치마를 두르고 서빙을 하느라 분주한, 이제 70이 된 그 사내. 보기 좋게 빗어 올린 머리에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 세월을 비켜 간 모습이다. 지난 21일 강원 춘천시 석사동에 자리한 ‘피스 오브 마인드(Peace of mind)’. 자신이 평생에 걸쳐 수집한 책과 고문서, 서예작품, 음반 속에 파묻혀 맛깔난 음식을 제공하는 김종헌 전 남영비비안 사장의 일터다.
유명 CEO에서 내려온 후 상호가 말해 주듯 이젠 ‘마음의 평화’를 항상 가슴에 새기고 산다는 전문 집필가로 북카페 겸 서예전문화랑을 운영하며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그의 삶. 100세 시대, 좌표를 찾느라 애쓰는 이들을 위해 인생 2∼3막의 나침반이 될 수 있는 그의 궤적을 들려주고 싶었다.
전문 도서관 못지않게 잘 정돈된 1만5000여 권의 책과 고서, 2000여 점의 서화, 3000여 장의 LP 음반, 그가 젊은 시절 쓴 타자기, 카메라 등 각종 ‘유물’을 보면 북카페이자 미술관, 박물관이다. 감탄스러울 정도로 남다른 그의 수집, 정리의 습관을 느끼게 했다. 은퇴한 지 14년, 춘천에 온 지 10년 됐다는 김 전 사장의 북카페는 분위기부터 맛까지 지역의 명소로 자리 잡았다.
자리에 앉은 김 전 사장 뒤로 낡았지만 기름칠이 잘 돼 있는 재봉틀이 눈에 띄어 물었더니 “재작년에 97세로 작고하신 어머님이 시집올 때 가져오셔서 평생을 쓰셨다”며 어루만졌다. 그에게서 칠순을 ‘기념’해 새로 만들었다는 명함을 받았다. 뒷면에 자신이 펴낸 저서 4권(‘피스 오브 마인드-빵 굽는 아내와 CEO 남편의 전원 카페’ ‘남자 나이 마흔에는 결심을 해야 한다’ ‘추사(秋史)를 넘어’ ‘서예가 보인다’)이 정리돼 있다. 모두 은퇴 후 쓴 책들이다. 앞면을 보니 ‘이형숙의 남편, 김세경의 아버지, 최용훈의 장인, 최원우의 외할아버지…’. 부인부터 손주까지 그의 ‘위치’를 한눈에 보기 좋게 정리해 뒀다. 압축한 가계인 셈인데 새로운 시도의 명함이라 이채로웠다.
“하하, 마음의 평화를 얻는 데는 가족 간의 평화, 행복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을 70이 되고 보니 새삼 깨닫게 돼 새겨 넣었어요. 일종의 다짐이죠. 인생을 살아 보니 미니멈 단위에서 행복하고 조화롭게 사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어요. 제가 아침에 일어나 눈뜨면 빵 굽고 손님을 대접하고 시간을 쪼개 글을 쓰고 인터뷰도 하는 게 얼마나 소중한 복인지, 정말 고마운 거죠.”
1973년 남영비비안에 입사한 김 전 사장은 잘나가는 샐러리맨이었다. 소위 스펙(서울고, 서울대 철학과 졸업)도 좋지만 작문, 회화부터 영업 순발력, 비상한 두뇌, 인문학적 상상력과 실력을 두루 갖춘 덕에 탁월한 실적을 거뒀다. 무역부문 성과를 1년에 2배씩 성장시키며 33세에 이사가 됐고 1997년 50세 때는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하며 회사와 함께 성장했다. 그러던 2002년 돌연 은퇴 후 강원 홍천으로 옮겨 전원생활에 들어갔다. 억대 연봉에 더 큰 미래가 보장된 상황이었으니 왜 화제가 안 됐을까.
“후회는 없어요. 제가 원해서 한 거니까. 회사에서도 말렸지만, 더 나이 들기 전에 전쟁 치르듯 하는 삶에서 벗어나고 싶기도 했지요. 스트레스 속에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경영을 하다 보니 건강도 나빠져 치주염과 고혈압까지 얻었지요.”
홍천에 온 후 그동안 모은 책과 서화, 음반 등을 모아 북카페를 차렸다. 그는 중학생 때부터 알아주는 책벌레로 통했고 수집광이었다. 학창시절에도 아르바이트 과외를 하면서 받은 적지 않은 돈을 몽땅 책과 음반 등을 사는 데 투자했다. (기억력이 탁월한 김 전 사장은 1973년 당시 대기업 초봉이 1만8000원일 때 영어 과외를 2시간 하고 그룹당 2만 원씩, 3그룹을 하고 6만 원을 받았다고 떠올렸다. ‘송성문의 정통종합영어를 잘 가르치는 대학생 선생님’으로 통했단다. 고 김영삼 대통령의 둘째 딸도 가르쳤다고 한다.)
은퇴할 때까지 모은 책, 음반, 서화 등은 은퇴 후 삶을 꾸리는 데 큰 자산이 됐다. 회사생활을 하면서도 유럽에서 접해 본 북카페를 언젠가는 운영하겠다는 구상을 했다. 미각을 자극하기로 이름 난 고급 스테이크, 유기농 스파게티, 허브 빵을 갖춘 북카페를 차리는 데는 독일 제빵기술과 사찰·반가음식, 전통 떡까지 두루 익힌 아내(65·전 배화여대 전통조리과 외래교수)의 도움이 컸다.
그는 “은퇴 후 노년의 삶은 부부 사이가 좋지 않으면 아주 힘들다”며 “아내가 홍천 산골, 춘천으로 같이 와준 것만 해도 고맙다”고 치켜세웠다. ‘은퇴 후 삶은 젊었을 때부터 준비하라’에 이은 또 하나의 지침 같았다.
북카페를 열고 개 7마리, 고양이 1마리를 키우며 전원생활을 누리던 김 전 사장에게 인생 3막이 열린 것은 우연한 계기였다. 홍천에 찾아온 한 절친한 동창이 쓴 책을 본 후 “이런 책은 내가 쓰면 100권도 쓰겠다”고 농담을 주고받던 차였다. 이때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1960∼1970년대 직장생활을 한 이들의 전원생활과 라이프스타일에 관련된 책을 쓰고 있다”고 했더니 곧바로 출판 계약 제의가 왔다. 첫 번째 책 ‘피스 오브 마인드…’는 그렇게 세상에 나왔는데 은퇴와 전원생활을 꿈꾸는 분위기와 맞아떨어지면서 그의 표현대로 확 떠 버렸다. 전문 집필가로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는 전환점이 됐다. 중학생 때부터 불교, 서예에 심취하고 독서에 열중한 데서 알 수 있듯 풍부하게 쌓인 지적 체험이 발현됐음이 분명했다. 그는 우초 장인식, 원곡 김기승, 소지도인 강창원, 송천 정하건 등 당대 서예가들에게서 사사하기도 했다.
“첫 책을 읽고 40대 직장인들이 카페로 많이 찾아왔어요. 그래서 이들을 위해 ‘남자 나이…’를 쓰게 됐죠. ‘추사를…’은 한글 세대를 위한 서예책이 없길래 고민해서 쓴 거예요. 서예의 기본 필법부터 서예의 역사, 근현대 한국 유명 서예가의 작품 세계, 서예계의 최고봉인 추사의 작품 읽는 법 등을 담았어요. 국내 서예 관련 도서 중 유일하게 10쇄를 찍을 정도로 스테디셀러가 됐어요. 지금도 읽고 찾아오는 이들이 많아요. 어떤 이는 30번도 넘게 읽었다고 해요.”
이 책이 조명을 받자 꼬리에 꼬리를 물 듯 미술전문 출판사에서 서예입문서를 내자고 해서 2015년 또 한 권의 책을 펴냈다. 한국·중국 서예의 역사, 서예가와 작품, 다양한 서체의 특징을 소개한 서예입문서인 ‘서예가 보인다’이다. 김 전 사장은 4권 모두 자비로 출판한 것도 아니고 각 분야에서 돋보이는 책이라는 점에서 자부심을 갖고 있다며 활짝 웃었다.
그는 지금도 3권의 책을 더 쓰고 있다고 했다. 국내 대표 한시 100편과 이를 글로 옮긴 올해 100세인 소지도인의 서예작품에 해제를 곁들인 ‘한국 한시 서예를 만나다’, 한·중·일 3국의 불교 신자, 고승들의 시·서·화를 다룬 ‘깨달음의 시·서·화’, 맨발로 걷고 민중에게 다가서는 부처의 사상을 젊은 한글 세대의 눈높이에 맞춰 쉽게 풀어쓴 ‘나는 맨발의 빵 먹는 부처님이 좋다’인데, ‘깨달음…’의 경우 3개국에서 동시 출판할 예정이다.
“3권이 아니라 20권이라도 쓸 소재는 있지만, 카페 일도 있고 벌써 70이라 체력적인 문제도 따르니 좀 조절은 해야겠죠? (웃음) 지금까지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하지만, 더 나이 먹기 전에 마지막으로 역사에 남을 책 몇 권 쓰는 게 꿈이에요. 직장생활 하면서 은퇴 후를 준비하려면 꾸준히 자신만의 전문지식과 기능을 배우고 익히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저는 지금도 무료영어강좌를 하고 최첨단 컴퓨터를 쓰면서 정보기술(IT)을 습득하는 등 지속적으로 공부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하던 일을 발전시켜 사업화하고 꿈을 이루는 데 쓸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겠지요.”
현직 CEO는 아니지만 멈추지 않는 동력을 갖춘 ‘지식발전소 CEO’와의 만남이었다.
춘천 = 이민종 기자 horiz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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