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조정 데드라인’ 고수… 침몰 위기 현대상선 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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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업은행, 부실 지원 고리 끊고 ‘원칙 경영’

해운동맹 ‘2M’과 협상 과정
“현대상선 가입시켜달라” 설득
구두약속 이어 문서도 받아내

용선료 협상 때도 원칙 고수
3년 6개월간 5000억원 절감

추가지원 없이 경영 정상화
“구조조정 新스탠더드” 평가

지난 7월 20일 정용석 산업은행 구조조정 담당 부행장은 급히 덴마크 출장길에 올랐다. 세계 최대 해운동맹(얼라이언스) 2M(머스크라인·MSC) 측에서 산은을 만나고 싶다는 요청이 왔기 때문이다. 2M은 현대상선의 얼라이언스 가입을 조기에 확정해준 만큼 뒤늦게라도 추가 설명을 듣고 싶어 했다. 정 부행장은 현대상선의 김충현 부사장, 이상식 상무와 함께 소렌 토프트 머스크 최고운영책임자 등 2M 관계자에게 “현대상선 회생 ‘데드라인’(한계선)을 정해 놓은 상황에서 얼라이언스 가입은 무엇보다 절실했다”고 설명했다. 2M 측도 이 같은 설명을 받아들였다. 반년 가까이 이어온 현대상선 구조조정이 사실상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 산은이 현대상선 경영정상화 과정에서 데드라인을 정해 놓으면서 추가 지원 없이도 성공적인 구조조정을 이끌어 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산은 안팎에선 현대상선 경영정상화가 무엇보다 원칙을 강조한 이동걸 산은 회장이 앞으로 주도할 구조조정 방향을 보여주는 ‘신(新)스탠더드(표준)’라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23일 산업은행과 금융권에 따르면 세계 1, 2위 선사 덴마크 머스크라인과 스위스 MSC 등으로 구성된 2M 핵심 관계자들은 올해 6월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을 비밀리에 방문, 정 부행장을 처음 만났다. 이 자리에서 2M은 현대상선 경영정상화에 대한 산은의 의지를 물었다.

산은의 입장은 분명했다. 산은 관계자는 “얼라이언스 가입이 먼저고 현대상선이 구조조정에 성공하면, 2M도 상당한 혜택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게 당시 우리의 입장이었다”고 전했다.

애초 알려진 것과 달리 2M은 이 자리에서 현대상선의 얼라이언스 가입 여부를 구두로 확정했다. 이는 현대상선의 경영정상화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 2M은 다른 얼라이언스와 경쟁에서 현대상선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채권단의 한 관계자는 “2M이 산은을 처음 방문했을 때 현대상선 대주주가 산은으로 바뀔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이었다”며 “현대상선이 구조조정에 성공해 국적선사로 남는다면 2M은 아시아∼미주 노선에서 점유율을 단기간에 끌어올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특히 얼라이언스 가입 이후 현대상선 재무건전성이 개선된다면, 신규 투자를 적극 검토하겠다는 산은의 지원 원칙도 2M을 움직였다”고 했다.

하지만 2M의 구두 결정은 현대상선 채권단을 움직이지 못했다. 채권단은 2M이 현대상선을 얼라이언스에 편입하겠다는 ‘공식적인 문서’를 요구했다. 현대상선 채권단의 출자전환을 위해선 2M에 또 한 번의 결단을 요구해야 했다. 당시 현대상선은 새로 개편되는 어느 얼라이언스에도 편입을 보장받지 못한 상황이었다.

일부에선 채권단이 너무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2M이 적극적인 의사를 내비친 만큼 오히려 채권단이 출자전환을 먼저 해주고 얼라이언스 가입을 추진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주장이었다. 익명을 요구한 또 다른 채권단 관계자는 “얼라이언스 가입을 부탁하는 입장에서 산은과 현대상선이 2M에 ‘감 내놔라, 배 내놔라’한 격”이라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하지만 산은은 원칙을 굽히지 않았다. 채권단 자율협약 전제조건인 얼라이언스 가입을 비롯해 용선료 인하, 사채권자 채무조정 등 세 가지 약속을 고수했다. 산은과 현대상선 측은 2M에 현대상선의 얼라이언스 가입을 조기에 문서화해줄 것을 요구했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현대상선 얼라이언스 가입 여부는 최소 3개월 정도 실사 기간 등을 거쳐야 한다. 결국 2M 핵심 관계자가 산은을 방문한 지 한 달도 채 안 된 올 7월 14일 현대상선과 2M은 공동운항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이를 토대로 채무 재조정도 순조롭게 마무리됐다. 산은의 구조조정 담당 임원인 정 부행장이 덴마크를 찾아간 이유도 2M에 절박했던 당시 상황을 뒤늦게라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용선료 인하 협상 과정에서도 산은은 원칙을 지키며 현대상선을 물밑 지원했다. 현대상선 경영정상화를 위해선 용선료 협상을 통한 원가 개선이 반드시 필요했다. 산은도 용선료 인하 협상 없이는 신규자금 지원도 없다는 원칙을 분명히 했다. 이 같은 메시지는 선사들에도 직간접적으로 전달됐다. 또 산은은 용선료 협상을 진행하고 있는 개별 선사에 ‘서포트 레터(Support Letter)’를 발송했다. 현대상선 용선료 협상 과정에 힘을 실어 주는 내용이었다. 결과적으로 현대상선은 앞으로 3년 6개월간 지급할 예정인 용선료 2조4000억 원의 20% 수준인 약 5000억 원의 용선료를 절감하게 됐다.

현대상선 경영정상화 과정은 무엇보다 산은이 제시한 원칙에 따라 진행됐다는 평가다. 금융권 관계자는 “용선료 협상도 엎어질 뻔했고, 얼라이언스 가입도 무산될 위기에 있었다”며 “이 과정에서 현대상선 신규자금 지원을 결정하는 산은이 뚜렷한 원칙을 고수했기 때문에 선사들과 얼라이언스 회원도 어쩔 수 없이 책임을 분담한 것”이라고 했다. 이어 “결국 구조조정 과정에서 이해관계자와 ‘기(氣)싸움’에서 산은의 원칙이 이긴 것”이라며 “만약 산은이 원칙을 내세우지 않았다면 이해관계자들의 형평성 있는 손실 분담도 없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산은은 앞으로 한진해운·대우조선해양 등 현재 진행하고 있는 구조조정 과정에서도 원칙을 분명하게 지켜 나간다는 계획이다. 이는 명분 없는 지원을 사전에 차단하겠다는 대외적 의지이기도 하다.

산은 관계자는 “이동걸 회장의 의지에 따라 데드라인을 정해 놓고 원칙에 입각한 구조조정을 진행하고 있다”며 “현대상선 구조조정 과정에서 지켜온 원칙을 다른 구조조정 과정에서도 지켜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윤정선 기자 wowjota@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