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영란법보다 중한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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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식 논설주간

9월 28일은 서울 수복 기념일이다. 우연이지만 김영란법 시행이라는 또 하나의 의미가 보태졌다. 반(反)부패 차원에서는 금융실명제(1993년 8월 12일 시행)와 쌍벽을 이루게 됐다. 원로 사회학자인 송복 교수는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탁월하게 분석한 저서 ‘특혜와 책임’에서 상층을 ‘뉴하이(고위직층)’와 ‘뉴리치(자본가층)’로 나눴다. 금융실명제가 뉴리치의 축재와 탈세 등 경제적 부정을 규율했다면, 김영란법은 뉴하이의 결탁과 갑질 등 사회적 일탈을 타깃으로 한다. 따라서 김영란법까지 안착하면 국가 청렴도는 그 차원이 달라질 것이다.

문제는 두 가지다. 하나는 당장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지, 다른 하나는 새로운 가치관과 시스템 창출로 이어질지 여부다. 이런 걱정을 하는 이유는 목적이 선(善)하다고 결과까지 자동으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김영란법이 추구하는 가치는 확고하지만 디테일에서는 허점이 많다. 금융실명제는 개념에서 내용까지 명쾌했음에도 준비에서 시행까지 10년 이상 걸렸다. 1982년 장영자·이철희 사건을 계기로 논의되기 시작해 그해 말 실명제법 제정(실시만 유보), 1983년 실명 인센티브 및 비실명 차등 과세, 1988년 전면 실시 예고와 1990년 유보 조치를 거쳐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긴급 재정경제명령 형식으로 전격 시행에 들어갔다.

반부패 제도화의 역사도 20년 가깝지만 준비는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19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글로벌 스탠더드 차원에서 본격 거론됐고, 김대중정부 시절이던 2001년 고위공직자들을 대상으로 한 부패방지법이 제정됐으며, 2002년 부패방지위원회가 출범했다. 그러나 실효성은 없었다. 전직 검찰총장 등이 관련된 첫 케이스부터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노무현정부의 국가청렴위원회, 이명박정부의 국민권익위원회로 바뀌면서 반부패 기능은 뒷걸음질 쳤다. 그러다 돌연 2014년 세월호 사건 분위기에서 ‘졸속 입법’이 이뤄졌다. 그런 만큼 차분하게 시행하면서 법규 오류도 시정해 나가야 한다.

그런데 벌써 견지망월(見指忘月) 조짐이 보인다. 김영란법 규정에 대한 기계적 확대해석에만 열중할 뿐 ‘무엇을 위한 규제’인지는 잊어버리고 있다. 비근한 예로, 공익 재단에서 수십 년째 시행해온 해외 연수 프로그램까지 ‘부정 금품’으로 규정하는 경우도 있다. 생활 부패까지 몰아내려면 혁명적 접근이 필요할지 모른다. 그러나 최종 지향이 ‘공직자 등’의 행위 규제 자체가 아니라 청렴과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을 쌓는 것임을 잊어선 안 된다. 방향성을 잃고 규제 권한만 휘두르게 되면 미국 ‘금주법’의 실패를 되풀이할 수 있다. 이를 피하려면 최소한 다음의 다섯 가지를 병행·보완해야 한다.

첫째, ‘로비의 제도화’가 필요하다. 청탁과 설명의 경계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당사자의 직접 청탁은 허용되기 때문에 괜찮다고 하지만 물정 모르는 얘기다. 신기술을 개발한 기업인들이 관련 기관 승인을 받기 위해 얼마나 힘겨운 노력을 하는지 들어보라. 둘째, 배 아파하지 말고 ‘특권의 양성화’를 받아들여야 한다. 고가의 특권 구매를 허용하고, 그런 비용의 혜택이 모두에게 돌아가도록 하면 된다. 억지로 막으면 해외 탈출이나 편법이 판치게 된다. 셋째, ‘관계의 선순환’을 장려해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관계는 연줄문화 등 부정적 측면도 없지 않았지만 역동성을 높이는 역할도 해왔다. 최근에는 토론이나 강의 모임 등 긍정적 네트워크도 많아지고 있다. ‘신뢰T=(진실성C+확실성R+친밀성I)／이기주의S’라는 신뢰 방정식이 있다. 김영란법이 친밀(intimacy)의 순기능을 죽이지 않게 해야 한다. 넷째, ‘실력사회로의 전환’을 서둘러야 한다. 접대에 들어갔던 비용과 에너지가 전문가들에게 투입되게 할 시스템 전환이 시급하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뿌리내리게 하는 일이다. 송 교수의 냉철한 분석처럼 불행히도 아직 그런 전통이 없다. 청문회마다 병역 회피, 탈세, 위장 전입 문제가 나온다. 망해가는 회사에서 자기 몫만 빼돌린, 세월호 선장보다 나쁜 기업주도 판친다. 특권층의 ‘고귀한 의무’가 정착되지 못하면 김영란법을 수십 개 만들어도 사상누각일 뿐이다. 부패 척결에 실패한 나라들은 제도가 없어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국민 모두의 각성과 노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