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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지식카페 게재 일자 : 2016년 10월 12일(水)
높은 곳서 보면 만물이 하나인데 ‘실체없는 記號’에 빠져 희비애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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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 = 안은진 기자 eun0322@

김정탁의 장자 이야기 - (18) 나는 기호를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이 있다. 프랑스의 저명한 사회 및 예술철학자 보드리야르(J. Baudrillard)의 주장이다. 여기서 소비되는 대상은 제품이 아니라 기호다. 그러니 이는 ‘기호를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15∼16년 전쯤 필자는 보드리야르가 강연 차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패널로 인연을 맺은 적이 있다. 보드리야르는 ‘기호소비’ ‘시뮬라시옹(simulation)’ ‘시뮬라크르(simulacre)’ 등의 개념을 통해 이 시대 핵심 문제를 예리하고 통찰력 있게 분석한 학자다. 그렇지만 그는 차가운 철학자가 아닌 따뜻한 시골 할아버지와 같은 모습으로 내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기호소비의 반대는 제품소비다. 제품소비는 재화의 사용가치에 따른 소비다. 사용가치에 따른 소비란 더우면 에어컨을 구입하고, 추우면 난로를 구입하는 일이다. 오늘날 기술 발전으로 인해 제품 성능에서 큰 차이를 발견하기 힘들다. 그래서 어떤 브랜드의 에어컨을 구입할까 고민하면 이는 제품소비보다 기호소비에 가까운 것이다. 브랜드 이미지나 제품 디자인과 같은 상징(symbol)들이 소비자 구매 결정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재화의 사용가치 못지않게 기호의 상징가치 비중이 높아진다. 애플이 스마트폰 이름에 아이폰(I-phone), 즉 ‘나의 아이덴티티’란 상징을 동원한 것도, 이건희 삼성 회장이 ‘디자인이 생명이다’라며 디자인이 지닌 상징을 동원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승용차의 예를 들어보자. 승용차의 사용가치는 걸어 다니는 다리 기능의 연장에서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승용차가 사용가치에 충실하려면 고장이 잦지 않으면서 안전하게 잘 달려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이런 식으로 마케팅 하는 승용차는 쉽게 찾아볼 수 없다. 고급차로 갈수록 이런 경향이 심하다. 고급차의 경우 당신은 품위 있는 사람이니 이 정도의 럭셔리한 차를 타야 하지 않느냐는 식으로 친절히 마케팅 한다. 보드리야르는 이런 친절 마케팅을 두고 ‘산타클로스 효과’에 대한 기대라고 규정한다. 그래서인지 요즘 소비자들은 자신의 인격(人格)을 ‘차격(車格)’을 통해 드러내려 한다. 인격뿐만 아니다. 이젠 사랑, 효, 선, 지식과 같은 의미조차 시장에서 물건으로 교환되는 실정이다.

오늘날 소비자들이 그토록 갖고 싶어 하는 명품은 철저히 상징가치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래서 품질관리 못지않게 상징관리가 중요하다. 이런 상징관리는 주로 광고를 통해 이뤄진다. 사실 명품과 일반 상품 사이의 사용가치에 따른 차이는 그다지 크지 않다. 그래서 명품은 사용가치에 있어 작은 차이를 극대화하기 위해 많은 돈을 광고 등에 투자하며, 이에 속아 넘어간 소비자는 이 작은 차이에 주목해 구매를 결정한다. 이처럼 차이의 변조가 극성해짐으로써 의미의 동일성보다 조작에 신경을 쓰는 게 소비사회의 두드러진 단면이다. 이런 경향은 기호소비의 진원지였던 유럽이나 미국보다 오늘날 동아시아, 특히 한·중·일 세 나라에서 도드라지게 나타난다. 세계의 명품 내지 고급술 소비의 상당 부분이 이 지역에서 이뤄지고 있다.

명품 구입에서만 기호소비가 판을 치는 게 아니다. 정치·경제·사회·문화 제 영역에서 기호소비가 맹위를 떨치고 있다. 정당의 이념이나 정치인의 자질과 신념 따위는 오늘날 유권자의 주요 관심사가 아니다. 이것들이 정치의 덕목인데도 얼마만큼의 꿈을, 설령 그 꿈이 허황될지라도 유권자에게 어느 정도 선물해 줄 수 있느냐가 유권자 판단의 기준이 된다. 보드리야르가 지적한 산타클로스 논리가 정치 분야에서도 이처럼 위력을 발휘한다. 물론 정치인은 더욱 산타클로스처럼 보이기 위해 이미지 조작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때 실제보다 과장된 이미지를 만들어내면 그건 시뮬라시옹이고, 자신에게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까지 만들어내면 그건 시뮬라크르다.

시뮬라시옹과 시뮬라크르가 지배하는 세상은 조미료가 듬뿍 뿌려진 스펙터클한 상황이다. 그러니 우리의 감각도 이에 자극적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다. 물론 감각반응에서도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이 적용되므로 스펙터클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늘 강한 자극을 필요로 한다. 정치인의 언행이 시간이 흐를수록 독해지고, 선정적으로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치인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야 경쟁력을 지닌다. 심지어 그의 악명조차 정치적 자산이 된다. 그래서 유권자는 텔레비전 쇼를 보듯 이런 정치인의 행태를 즐긴다. 그러니 천국이어도 ‘재미없는 미국’보다 지옥이지만 ‘재미있는 한국’에서 살겠다는 우스개 이야기도 생겨난다. 한국이 미국에 비해 스펙터클해 재미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류를 상징하는 걸그룹도 예외는 아니다. 오로지 시뮬라시옹과 시뮬라크르의 산물일 뿐이다. 걸그룹의 노래와 춤은 원본이 빈약하거나(시뮬라시옹), 또는 원본이 없어(시뮬라크르) 그 토대가 허약하므로 대중의 관심에서 빨리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대중은 늘 새로운 걸그룹의 등장을 요청한다. 이에 대중문화 기획자들은 걸그룹 간의 작은 차이를 극대화함으로써 새로운 시뮬라시옹과 시뮬라크르를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그럼으로써 문화영역에서조차 기호소비가 뿌리를 내린다. 이에 반해 비틀스 음악이 1960∼1970년대 세계를 휩쓸었던 청년문화의 아이콘이 되고, 마이클 잭슨의 브레이크춤이 디지털 문명을 대변하는 상징이 되고, 아바의 노래들에서 맘마미아라는 불후의 뮤지컬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충실한 원본이 바탕이 돼서다.

그런데 장자는 조삼모사란 글을 통해 보드리야르가 지적한 이런 문제점을 일찍이 간파한 바 있다. 조삼모사는 원숭이들이 먹이를 아침에 석 되, 저녁에 넉 되 준다고 하니까 화를 냈는데 아침에 넉 되, 저녁에 석 되 준다고 하니까 기뻐 날뛰었다는 내용이다. 조삼모사(朝三暮四)와 조사모삼(朝四暮三)은 먹이 주는 방식의 차이일 뿐 실질, 즉 원본에 있어선 하등의 차이가 없다. 그런데도 원숭이는 주인에게 즉각적으로 분노와 기쁨의 감정을 번갈아가면서 나타냈다. 장자는 이를 두고 원숭이들이 ‘쓸데없이 머리를 굴려 스스로를 수고롭게 한’ 노신(勞神)이라고 개념화했다.

오늘날의 커뮤니케이션 관점에선 ‘7’보다 ‘3+4’ 내지 ‘4+3’이 바람직한 표현 방식임에 분명하다. 도학(道學)보다 과학(科學)이 발달하고, 총론보다 각론의 비중이 높아짐에 따라 대상의 의미가 구체적이고 객관적이고, 명료해져야 해서이다. 일상에서도 ‘네/아니요’를 분명히 해야 한다. 특히 법조인에게 표현의 객관성·명료성·구체성은 직무수행의 핵심적인 자질에 해당한다. 법조인이 이런 자질을 지니지 못하면 그의 판단이나 생각은 주관적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인간은 원숭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기호조작과 기호소비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7’을 ‘3+4’와 ‘4+3’으로 구분하는 것은 물론이고, ‘3+4’도 ‘3+2+2’와 ‘3+3+1’로까지 구분해야 한다. 이는 실질에선 없는 차이를 기호를 통해 차이가 있는 것처럼 만들어내는 작업이다.

그래서인지 우리 주위에는 기호를 통해 쪼개진 것들 간에 차이가 있는 것처럼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식당에서 특정 브랜드 소주를 애써 주문하는 사람도 그중 하나다. 소주는 국세청에서 동일하게 배급하는 주정에 소주회사가 물을 타서 만든다. 희석식 소주여서 그렇다. 그러니 어떤 애주가라도 물맛 차이를 느낄 수 있으면 모르지만 브랜드별로 소주 맛을 구분하기는 힘들다. 그런데도 특정 소주만 고집하는 소비자로 인해 식당 종업원도 손님에게 어떤 소주를 주문할지 미리 묻는 게 일상화돼 있다. 이런 소비행위는 마치 ‘참이슬’을 ‘3+4’로, ‘처음처럼’을 ‘4+3’으로 구분하는 것과 같다. 이런 식으로 소비자는 기호가 만들어낸 ‘가짜 차이’를 ‘실제 차이’로 착각한다. 그러니 특정 소주를 요구하는 애주가의 처신은 원숭이의 그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커뮤니케이션 수단인 기호는 의미를 구분하는 데 유용하지만 의미 구분이 지나치면 과잉기호가 돼 부작용이 커진다. 음식에 인공조미료를 뿌리면 몸을 해칠 수 있지만 기호에 인공조미료를 더하면 마음을 해칠 수 있다. 다툼과 갈등도 따지고 보면 언어에 조미료를 잔뜩 뿌린 결과다. 만약 주인이 원숭이에게 아침에 한 되, 저녁에 여섯 되의 방식으로 먹이를 준다고 했다면 원숭이는 당장 우리를 뛰쳐나와 주인을 물어뜯었을는지 모른다. 그래서 언어는 편리한 수단이지만 흉기로 변하면 원자폭탄보다 더 무서운 재앙이 기다린다. 이혼하는 부부의 경우 노력하면 이혼하려 했던 사유는 서로 용서되지만 홧김에 인공조미료를 듬뿍 친 말 때문에 생긴 마음의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이로 인해 이혼에 이르는 부부도 적지 않다.

그래서 장자는 그의 책을 대붕(大鵬)의 비상으로 시작한다. 대붕처럼 높이 날아 먼 데서부터 아래를 내려다보면 가까이서 볼 때와 달리 세상의 모든 게 구별되지 않고 비슷비슷하게 하나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장자 사상의 핵심 개념인 제물(齊物)이다. 제물의 상태에선 사물 간의 실제 차이도 잘 드러나지 않는데 하물며 ‘3+4’와 ‘4+3’처럼 기호가 만들어낸 비실제적 차이가 과연 생겨날 수 있을까? 그런데도 우리는 기호의 편리성에 매몰된 나머지 이에 지나치게 의존하면서 의미를 불필요하게 구분한다. 이것이 우리를 희비(喜悲)와 애락(哀樂)의 나락으로 빠뜨리는 주범인 것도 모른 채 말이다.

원불교 최초 법어에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란 게 있다. 물질문명이 너무 빨리 바뀌어 정신을 개벽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창립자 소태산(小泰山)의 절박한 표현이다. 만약 보드리야르가 살아있다면 ‘기호가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말로 바꾸지 않을까. (문화일보 9월13일자 20면 17회 참조)

성균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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