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인터뷰>“對北 협상은 ‘核 폐기’서 ‘核위험 감소’로 재조정해야”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윌리엄 페리 전 미국 국방장관은 지난 15일 인터뷰에서 “우리가 쿠바 미사일 위기 이래 핵 재앙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대처를 잘해서만이 아니라 운도 좋았기 때문”이라면서 “북핵 위기가 심화되는 국면에서 우리가 요행에 기댈 수는 없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핵무기의 위험성을 줄이기 위한 방안부터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선규 기자 ufokim@

윌리엄 페리 前美국방장관

미국 대선 이후 미 외교가에서 북핵 문제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대북 전략적 인내 정책을 견지하다 북한의 핵 개발만 방조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비판이 제기되면서 어떤 형식으로든 북한과 협상할 수 있는 끈은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류는 미 대선을 전후해 미 측 전직 인사들이 북한 외무성 인사들과 스위스 제네바와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투트랙 회의를 하는 것과 맥이 닿는 움직임이다. 미국의 전직 인사들은 미국의 대북제재 필요성에 대해선 공감하면서도 북한과의 대화는 재개돼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1999년 ‘페리 프로세스’로 불리는 포괄적 북핵 해결 로드맵을 입안한 윌리엄 페리(89) 전 미 국방장관은 그런 대화모색론에서 한발 더 나아가 대북 협상 목표를 핵 폐기가 아니라 핵 위험 감소 쪽으로 재조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의 주장을 차기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가 수용할 경우 ‘북핵 폐기’ 협상을 견지해온 한국은 딜레마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북핵 폐기’가 ‘북핵 위험 감소’로 바뀔 경우 비핵화 협상은 사실상 비확산 협상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북한의 핵 보유를 기정사실화하는 협상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된다. 페리 전 장관은 왜 이 같은 대북 협상론을 펴고 있는지 지난 15일 만나 대화를 나눴다. 회고록 ‘핵 벼랑을 걷다(My Journey at the Nuclear Brink)’ 번역본 발간을 기념해 서울을 방문한 그는 지난 14일 연세대 특강과 15일 세종연구소와 스탠퍼드대 아태연구소 공동 주최 심포지엄에서도 “비핵화 협상은 성공할 수 없다”는 주장을 일관되게 폈다.

―번역 출간된 회고록 ‘핵 벼랑을 걷다’(창비)는 북핵 위기의 심각성을 다룬 책이지만 제목은 아주 시적이다.

“내 회고록은 내가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고 기록하는 것이어서 다소 시적 영감을 주는 제목으로 정했다. 내 전체 삶을 기록한 것은 아니고, 핵 문제와 연결된 부분에 대해서 회고한 것이다. 딸 로빈이 이 책의 기획 및 편집총괄을 하면서 많은 도움을 줬다.”

―평생 핵과 씨름하며 살아온 얘기를 ‘핵 벼랑’이라는 개념에 담은 게 인상적이다.

“그 표현을 쓴 이유는 내 삶을 되돌아볼 때 핵전쟁에 빠질 위험 속에 평생 살아왔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또한 지금도 여전히 우리는 핵전쟁 위험 속에 있고 세계 모든 곳이 이런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점을 설명하고 싶어 그 단어를 골랐다.”

―책에서는 1940년대 일본에서 겪은 전쟁 참상, 1960년대 쿠바 미사일 위기, 그리고 1990년대 북한 핵 위기를 다뤘는데, 이 가운데 북핵 위기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위기다. 이제 내년 1월이면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하는데, 이 시점에서 우리는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뭘 할 수 있고 뭘 해야 하는가.

“우리는 과거와 전혀 다른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 기존의 협상과 다른 목표를 세우고 새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

―어떤 목표를 세워야 하나.

“북한 핵의 폐기가 아니라 핵 위험을 줄이는 게 목표가 돼야 한다. 핵 과학자인 시그프리드 헤커 박사는 북핵 문제와 관련해 ‘3 노(Three No)’를 제시한 바 있는데 그게 기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3 노’가 여전히 유용하다고 본다. 북한이 더 이상 핵무기를 만들지 않고(No more bombs), 추가실험도 하지 않고(No testing), 수출하지 않는다(No export)는 조건을 받아들이면 체제를 보장해주겠다는 걸 기반으로 협상해야 한다. 북한이 강력한 제재 때문에 생존이 어렵다고 판단하면 핵무기와 기술을 테러리스트들에게 팔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게 바로 제재의 부정적 효과가 될 것 같은데, 체제 유지자금이 떨어지면 생존을 위해 뭐든 팔려고 달려들 것 같다.

“제재는 북한의 핵무기를 포기하도록 하기 위한 것인데, 북한이 경제위기에 다다르면 일반인들이 직접 피해를 입지, 엘리트들은 당하지 않는다. 통치자금이 바닥나면 돈을 구하기 위해 테러그룹들에 핵기술을 비밀리에 팔 수도 있다. 내가 1999년 북한에 갔을 때 보니 바깥에서 아무리 북한을 제재해도 엘리트들은 별 상관이 없다. 일반인들의 삶이 혹독하게 힘들어질 뿐이다.”

―제재가 북한의 핵 정책 변화를 이끌지 못할 것이라는 얘기인데, 이란 핵 협상에 앞서 미국 등은 이란에 대해 강력한 제재를 해 결국 성공했는데 북한은 왜 안되는가.

“이란 제재엔 세계가 참여했다. 러시아와 중국도 동참했다. 그래서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북한의 경우 식량과 에너지가 중국으로부터 들어가고 있다. 그러니 효과가 없다. 이란의 경우 중산층이 있고, 이들을 이란 정부가 모두 통제하지 못한다. 더 압박하면 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당국이 일반인들을 방치해도 이란에서와 같은 반발이 일어날 가능성이 작다. 그렇다고 혁명이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다.”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는 중국의 비협조로 인해 제대로 효과가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게 사실이다.

“물론이다. 북한 당국 또한 주민들이 반발하거나 혁명을 일으킬 가능성에 대해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대북제재가 효과를 발휘할 것이라는 전제에 근거해 전략적 인내정책을 펴왔는데.

“제재는 핵 개발에 골몰한 북한을 벌준다는 데 의미가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북한의 정책을 바꾸도록 하지는 못할 것이다.”

―조지 W 부시 행정부에 이어 출범한 오바마 행정부는 ‘전략적 인내’ 정책을 견지하면서 북한과 대화나 협상을 진행하지 않았다.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가.

“오바마 대통령 취임 첫해인 2009년 북한은 핵실험을 강행했다. 물론 북한은 이미 조지 W 부시 행정부 때인 2006년 1차 핵실험을 해서 대미지는 이미 진행된 상태였다. 내가 대북정책조정관이던 빌 클린턴 행정부 때는 북한이 핵실험을 하기 전이다. 핵 문제가 어렵기는 했지만, 해결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했을 때 북한은 이미 핵실험을 한 상태이고 핵무기도 가진 것으로 추정돼 핵 협상이 쉽지 않았다. 오바마 행정부는 이런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기회가 있다고 생각했다. 북한이 핵 폐기를 할 수 있고, 북한이 핵을 폐기하는 대화에 나설 것이라는 잘못된 가정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잘못된 가정에 입각해 정책을 세우고 그것을 견지했으니 전투에서 패하고 있는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견지한 전략적 인내 정책이 잘못된 가정에서 출발한 정책이라는 얘기인가.

“그 정책은 북한이 변화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정책이다. 그전에 섣불리 북한에 뭘 제안하지 않겠다는 정책이다. 그 의미는 좋다고 보지만, 정책으로서는 성공하지 못했다. 오바마 행정부는 북한을 압박하며 기다리면서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며 협상에 나올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것은 잘못된 가정에 기반을 둔 예측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기회를 잃었고, 북한의 비핵화를 이루지 못했다.”

―부시 전 대통령은 빌 클린턴 행정부 때의 북핵협상을 뒤엎은 후 압박 정책을 견지하다가 2기 때 북핵 6자회담의 틀로 북핵 협상을 했는데 오바마 대통령은 8년 내내 북한의 변화만을 촉구하다가 임기를 끝내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북측에 비핵화를 촉구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북한을 핵무기가 없는 상태로 되돌리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러니 거기에 맞는 협상을 해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북한의 레짐체인지(정권 교체)를 제기하며 제재를 통해 북한 체제 자체를 변화시키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박 대통령이 그런 주장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효과적으로 이뤄질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북한 체제 교체는 전쟁으로나 가능한데 미국은 물론 한국도 그런 전쟁은 원치 않고 있는 것 아니냐.”

―박 대통령과 오바마 대통령의 대북 접근법은 보다 강력한 제재를 통한 북한의 변화를 촉구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는데 이제 오바마 행정부는 임기 말이고, 한국도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으로 대통령 탄핵 논의가 본격화하면서 일관된 정책 추진 자체가 불투명한 상황이다.

“한·미 양국이 정치적으로 어려운 상황인데, 트럼프 행정부가 어떤 대북정책을 펼지는 알 수 없다. 트럼프도 오바마 대통령처럼 보다 강력한 제재와 압박이 북한을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을지 모르겠지만 현재 분명한 것은 그런 정책이 북한을 변화시킬지 불확실하다는 점이다. 나도 개인적으로는 북한체제가 바뀌길 원한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는 우리가 북한을 바꾸기 위해 뭘 할 수 있느냐를 따져봐야 한다. 한·미 양국이 북한체제를 바꾸려면 가장 빠른 방법은 군사적 방법이다. 그런데 한·미 양국 모두 위험이 크기 때문에 전쟁은 원치 않고 있지 않으냐.”

―지난 9월 9일 북한이 5차 핵실험을 한 뒤 애슈턴 카터 미국 국방장관은 후버연구소 강연에서 우리는 ‘오늘 밤이라도 싸울 수 있다’며 북핵시설에 대한 선제타격을 시사했다. 미국이 북핵의 위협을 받을 경우 북한을 선제타격하겠다는 것인데.

“그런 외과수술적 대북옵션 검토가 공개적으로 이뤄질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미국은 늘 테이블에 모든 옵션을 올려놓고 있다. 내가 국방장관일 때(1994∼1997년)도 영변 폭격 옵션은 갖고 있었지만 나는 대통령에게 제안하지 않았다. 당시 내가 제안했다면 빌 클린턴 대통령이 수용했겠지만 말이다. 만약 클린턴 대통령이 당시 이를 강행하려고 했다면 한국 대통령과 협의하고 동의를 구해야 했다. 북핵 위기 당시 우리는 그런 옵션을 테이블 위에 갖고 있지만 그것을 제안하지 않았다.”

―트럼프가 북핵 문제 해법에 대해 조언을 해달라고 한다면 어떻게 얘기하겠나.

“연세대 특강과 세종연구소 심포지엄 기조연설에서 한 얘기를 해주겠다. 첫째 북한의 핵 포기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려 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한 핵무기의 위험성을 단계적으로 감소시킨다는 목표로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 북한과의 협상 목표를 분명히 설정하지 않은 채 6자회담을 재개한다 해도 성과가 없을 것이다. 지난 10년간 6자회담을 해왔지만 핵 위협은 줄이지 못했고 북한은 버젓이 핵실험을 다섯 번이나 했다. 이제 그런 현실을 제대로 봐야 한다고 얘기하겠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은 그간 중국의 특사만을 만났을 뿐 미국과의 협상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그런 그를 어떻게 협상장으로 끌고 나올 수 있을까.

“북한이 핵 협상에 응하지 않는 것은 비핵화 협상, 즉 북핵 포기를 전제로 협상하자고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제안하면 안 된다. 그런 제안은 그간 실패했다. 트럼프가 북한에서 얻을 목표를 제시하고 핵 위험을 줄이는 쪽으로 협상하자고 하면 북측은 협상에 응할 것이다.”

―6자회담 재개를 촉구하지 말고 북한과의 협상 목표를 재조정하고 북측에 제시해야 한다는 얘기인데.

“6자회담의 목표는 북한의 핵 포기였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이뤄지기 힘들다. 그런 대화는 해봤자 안된다. 이미 그것은 과거가 됐다.”

―그럼 대북대화 제안에는 어떤 목표가 담겨야 하는가.

“북핵 위험을 줄이는 쪽으로 목표가 설정돼야 한다. 한·미 양국은 헤커 박사가 북핵 해법으로 제안한 ‘3 노’와 같은 목표를 현실적으로 설정해야 한다. 그리고 북측이 수용하는 수준에 따라 단계별로 무엇을 줄 것인지 분명히 하면 협상이 재개될 수 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북측과 신뢰가 쌓이게 되면 핵 위협을 경감시키는 데서 한 단계 더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협상의 레벨은 어떻게 보는가.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협상의 목표가 뭐냐는 게 핵심이다. 핵 위협을 단계적으로 경감시킬 때 북한은 한국과 미국이 어떤 지원을 해줄 수 있냐고 물을 것이고 그 조건이 맞으면 핵 위협 경감 플랜을 이행할 것이다. 거기서부터 얘기를 해나가면 된다. 그게 현실적이다.”

―현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북한을 어떻게 협상장으로 나오게 할 것이냐의 문제인데, 최근 서울에서 만난 스티븐 해거드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UCSD) 교수는 콘돌리자 라이스 전 국무장관급 대북특사 제안을 했다. 어떻게 보는가.

“특사파견의 성공 여부는 미국 대통령과 한국 대통령이 북측에 뭘 얘기하길 원하느냐에 달려 있다. 고위급 특사를 북한에 파견한다 해도 핵 포기를 얘기한다면 시간 낭비다. 만약 헤커 박사의 제안처럼 그 특사가 ‘3 노’를 제안한다면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회고록 얘기를 다시 해보자. 회고록에는 북한 핵위기 부분이 별도로 다뤄졌는데 한반도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

“내가 한국을 처음 방문한 것은 1978년인데 북한에는 1999년에 처음 갔다. 대북정책조정관 자격으로 북핵 문제 해법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그에 앞서 한국에서 임동원 당시 통일부 장관과 가토 료조(加藤良三) 당시 일본 외무성 총합정책국장 등과 함께 논의하고 합의안을 만들었다. 그래서 그것을 바탕으로 평양에 갔고 북측에 협상을 제안한 것이다. 그것이 내 첫 방북이다. 미군 비행기를 타고 비무장지대(DMZ)를 넘어 처음 갔는데 당시 북한당국은 그것을 승인했다.”

―1999년 방북 때 김정일 당시 국방위원장 대신 김영남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을 만나 빌 클린턴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했는데 당시 평양 분위기는 어땠나.

“내 회고록에도 썼지만 아주 중요한 방문이었다. 당시 방문 때엔 한국어가 능통한 국무부의 고위외교관 에번스 리비어가 동행했는데 북한 인사들이 우리에게 말하는 방식이 아주 예의 발랐고 성심성의껏 대해줬다. 그들은 미국과의 대화에 아주 큰 기대감을 보였다. 그들이 우리 대표단에 보여준 태도나 대화 내용을 종합해 보면 당시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세상으로 나가면 경제가 좋아지고 생활수준도 높아질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우리가 평양을 방문한 이후 김정일 위원장은 중국 상하이(上海)를 방문해 기대감을 높였고 남북한은 2000년 시드니올림픽 개막식 때 동시 입장을 했다. 남북은 물론 북·미 간에도 낙관적인 기대가 팽배하던 시기였다. 그러고 나서 2000년 조명록 차수 겸 국방위 제1부위원장(1928∼2010)이 미국을 방문했다.”

―조명록 부위원장 방미 때 주도적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조명록이 워싱턴을 방문한 것은 김정일 위원장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워싱턴 방문에 앞서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를 찾았는데 김정일 위원장이 스탠퍼드대를 방문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그때까지는 조명록을 만난 적이 없었는데 샌프란시스코 공항으로 직접 나가서 그를 맞았다. 그리고 그에게 샌프란시스코 일대를 보여주면서 대화를 나눴다. 김정일 위원장은 조명록에게 실리콘밸리를 방문하고 싶다고 했다고 하더라. 조명록 일행을 데리고 실리콘밸리로 이동해 여러 기업을 방문했는데 그중 2∼3명은 실리콘밸리에서 성공한 한인 기업인들이었다. 스탠퍼드대 만찬 때도 실리콘밸리의 성공한 한국계 기업인들을 초대해 함께 얘기했다. 아주 의미 있는 순간들이었다. 그러고 나서 조명록 일행은 워싱턴으로 갔다.”

―조명록 부위원장의 워싱턴 행보가 당시 많은 화제를 낳았고 기대감을 줬던 기억이 난다.

“국무부에서 조명록 방문기념 만찬이 있었는데, 그 만찬 일은 공교롭게도 내 생일이었다. 그래서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국무장관이 ‘오늘은 페리 대북정책조정관의 생일이니 함께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면 어떨까요’라고 제안했다. 조명록이 나보고 나이가 어떻게 되냐고 해서 ‘우리가 아마도 동갑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어 내가 몇 달 위라고 하자 함께 웃었다.(조명록은 1928년 7월 12일생이고 페리 전 장관은 1927년 10월 11일생이다.) 그러자 그는 만찬사에서 ‘페리와 나는 동갑이고 같은 세대로서 존경심을 갖고 있다’며 ‘이번 만남을 통해 우리가 현안에 대해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그 자리는 아주 감동적이었다. 그때 나는 우리가 궁극적으로 북핵 문제를 함께 풀어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가 2000년 10월이었는데, 몇 주 후 미 대선이 실시됐고 공화당 조지 W 부시 후보의 승리로 결론지어졌다. 이후 공화당 행정부는 북한과의 모든 대화를 중단했다. 나는 그때 참 아쉬웠고 가슴이 아팠다. 그때 민주당이 대선에서 승리했다면 북한의 핵 폐기라는 역사적인 성과를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시간이 조금 더 있었으면 역사적 국면을 맞았을 텐데 한·미 양국은 물론 북한도 역사적 기회를 잃은 것 같다.

“그때는 정말 역사적인 기회가 열렸던 순간이었다. 빌 클린턴 행정부에 몇 달만 더 있었다면 북한과 역사적인 합의를 했을 것이다. 2001년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출범할 때 나는 걱정을 많이 했다. 다행스럽게도 콜린 파월 당시 국무장관은 클린턴 행정부가 진행해왔던 북한과의 대화를 이어받아 진행해나가겠다고 했다. 그런데 몇 달 후 부시 대통령이 원치 않는다고 하더라. 그래서 모든 게 중단됐다.”

―그 모든 것이 이미 16년 전의 일이다. 현국면에서는 북핵 문제를 풀기 위해 뭘 해야 하나.

“당시와 같은 합의를 다시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앞으로 어떤 협상이 진행된다 해도 그때와 같은 합의를 이뤄내긴 어려울 것이다. 그때는 북한에 핵이 없을 때였다. 따라서 당시는 북한 비핵화를 협상 목표로 제시할 수 있었고 북한 핵 폐기도 가능한 때였다. 그러나 지난 16년 동안 북한은 다섯 차례 핵실험을 했고, 이제 사실상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그러니 이제는 그것(북한 비핵화)을 목표로 내세울 수 없고 더 이상 그런 것을 합의하기도 어렵다. 이제는 북한의 핵 위협을 줄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가 북핵을 폐기할 수 있는 역사적인 모멘텀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역사적 손실이다.”

인터뷰 = 이미숙 국제부장 musel@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