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이육사 문학관 옆에 세워져 있는 이육사의 ‘절정’ 시비와 동상. 문학관이 자리 잡은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는 이육사가 태어난 곳이다.
(62) 이육사의 詩 ‘광야’의 배경… 경북 안동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山脈)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江)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 광야(曠野) 전문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임을 자부하는 경북 안동에 가면, 고즈넉한 농촌 마을과 그 마을마다 예외 없이 들어선 즐비한 고택(古宅)들을 만날 수 있다. 유교 문화와 전통, 선비 정신의 흔적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는 지방이다. 아직도 도포를 걸친 어르신들을 길에서 마주치는 일은 흔하다. 안동은 무엇보다도 그 기왓골 수만큼이나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했으니 가히 항일 독립운동의 성지라고 불릴 만하다.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와 민족시인이라면, 단박에 이육사를 떠올릴 것이다. 의열단의 일원으로 투쟁 활동, 여러 독립의거에 관여해 40여 년의 짧은 생애 동안 무려 열일곱 번에 걸친 투옥과 베이징(北京)의 일제 감옥에서 순국 등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투쟁한 그의 항일 행적을 생각할 때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참혹한 시대 속에서도 결코 초인적 의지를 잃지 않은 항일시인으로, 누구나 이내 입가에 맴도는 “내 고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로 시작하는 ‘청포도’와, 물론 세대에 따라 약간 다르지만, 문학 교과서에는 반드시 수록된 ‘절정(絶頂)’ ‘교목(喬木)’ ‘꽃’과 ‘광야’ 등 그의 대표 시들도 쉬이 떠오른다.
이육사는 1904년 5월 18일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881번지에서 태어났다. 현재 원촌 마을 입구, ‘청포도’ 시비가 세워져 있는 곳이 바로 옛 집터다. 포도알처럼 둥글게 다듬은 7개의 하얀 화강석 조형물과 거기에 흡사 포도 넝쿨 같은 은빛 쇠줄들까지 낮게 엉키듯 까만 비석을 둘러싸며 받치고 있으니, 한눈에 봐도 무척 예쁜 시비라는 생각이 든다. 시비의 앞면에는 시인의 얼굴이 양각된 작은 동판과 시 ‘청포도’가, 뒷면에는 그의 생애가 새겨져 있다.
안동 시내에서 출발하는 유일한 버스(67번) 편으로, 그것도 초행길에 원촌 마을을 방문하는 일은 사실 만만치 않다. 시내에서 북쪽으로 25㎞쯤 떨어져 있는 도산서원이나 거기서 바로 국도를 따라 언덕 하나 너머에 있는 도산면 소재지 ‘온혜’까지 우선은 가야 한다. 시간대가 맞아 이 노선이 이육사 문학관까지 연장되는, 하루 한두 번밖에 없는 운 좋은 기회를 얻은 경우라면, 도중에 이런저런 안내판이 보이더라도 괜히 섣부른 행동은 말아야 한다. 어차피 돌아가는 길에 실컷 보게 될 터이니 그저 지금은 마음에만 새겨둘 일이다. 하계 마을에서 왼쪽으로 급히 꺾어진 가파른 고갯길을 마저 오르면 저 아래 작은 마을이 하나 보인다. 이육사의 고향 원촌 마을이다. 현재 행정구역으로는 ‘원천리(遠川里)’이니, 원래 낙동강 변의 마을 ‘원촌’과 바로 이웃한 ‘천곡’과 ‘이곡’을 통합해 20여 년 전부터 ‘먼내’를 뜻하는 그 이름으로 불린다. 몇 해 전 도산서원에 왔던 길에 우연히 찾았던 원촌 마을이지만, 시간에 쫓겨 문학관의 전시물만을 대충 눈어림한 정도였고, 당연히 시인의 묘소는 언감생심이었거니와 근처 생가터의 ‘청포도’ 시비조차 찾아보지 못했기에 줄곧 마음 한구석에 앙금이 남았었다. 현재 문학관은 증축 공사로 휴관 중이지만, 이번에는 한결 넉넉한 마음으로 다른 곳에 그 관심을 두기로 한다.
문학관 조경 공사와 옛 생가를 복원한 ‘육우당’의 내부 공사가 한창이다. 문학관 입구에 있는 ‘절정’ 시비와 이육사 동상 주변에도 건축자재들이 잔뜩 쌓여 있다. 시구 그대로,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문학관 측에서 공고했고 이미 여러 번 연기한 예정일도 한참이나 지났지만, 이것이 다 문학관의 내실을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갖추기 위한 것이라 애써 믿으며, 오른쪽 산길로 접어든다.
이육사의 묘소로 가는 길은 ‘청포도 오솔길’(2.8㎞)이란 곱고 순한 이름을 얻었지만, 사실 초입의 경사가 몹시 가파르다. 본디 산행이 늘 그러하듯 두어 번의 후회와 갈등, 그리고 숨과 땀을 고르며 오르다 보면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세월에 불타고 우뚝 남아 서서” 있는 ‘교목’처럼 굵은 아름드리 소나무 사이로 시인의 묘소가 얼핏 눈에 띄었다. 발아래로 안기듯 보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원촌 마을, 저 멀리 크게 굽이쳐 흐르는 낙동강과 그 너머 청량산 자락에서 이어져 온 왕모산 일대의 전경은 뜻밖에 풍성한 덤이다.
돌아오는 길, 그나마 차편이 자주 있는 온혜까지의 길은 족히 시오 리는 되니 걷기에는 제법 만만찮은 거리이지만, 우리네 정겨운 농촌 마을의 풍경에다 간간이 보이는 고택들, 퇴계 이황 묘소와 퇴계 종택(태실), 그리고 도산서원이 차례로 그 모습을 드러내니, 해찰하며 눈 호강하기에 미처 지루해질 틈이 없다. 이육사 자신이 곧 이런 유가(儒家)의 전통과 환경 속에서 성장했으니, 직접 둘러보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안동시 태화동에 있는 이육사의 생가 ‘육우당’
이육사는 퇴계 이황의 14대손으로, 성장하며 한학적 소양과 선비 기질을 자연스레 습득한다. 그의 삶과 시에 뚜렷한 각인을 남긴 투사적 기질은 도리어 외가의 영향이 크다. 외조부 범산(凡山) 허형은 의병장이며, 13도 창의군(十三道倡義軍)의 군사장, 왕산(旺山) 허위와는 사촌인 셈이다. 외숙들도 모두 의병과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특히 일헌(一軒) 허규는 이육사 형제에게 커다란 영향을 줬다. 이육사가 ‘계절의 오행’에서 친가와 외가의 ‘무서운 규모’라고 단정(斷定)한, 이런 집안 분위기에서 선비와 투사의 피를 물려받은 여섯 형제가 차례로 독립운동에 뛰어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형제 간의 우애 또한 대단했다고 하니, 1927년 장진홍(張鎭弘) 의거(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돼 형제들이 연이어 체포됐을 때도 서로 앞다퉈 자신이 책임을 떠맡으려고 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자신들의 생가에 ‘육우당(六友堂)’이란 택호(宅號)를 직접 붙인 것도 그런 연유였다. 옛 집터가 안동댐이 건설될 때 예상 수몰지역에 포함되는 바람에, 이 육우당은 1975년 안동 시내로 이전했다(경북 민속자료 10호). 2004년 이육사 문학관을 개관하면서 이 생가를 원래 자리로 다시 옮겨 복원할 계획도 있었다지만, 결국 성사되지는 못했다. 육우당은 지금도 태화동의 골목길 안쪽, 좁고 기다란 틈에 구겨 넣은 듯한 모습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물론 여러 사정이야 있겠지만, 그 모습을 보니 마치 버려진 듯해서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이육사 문학관 옆에 있는, 새롭게 단장해 세월의 흔적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육우당 ‘모형’은 왠지 정이 안 간다. 그곳이 이육사뿐만 아니라 참으로 여러 분야에 재주가 많았다던, 광복 이후 북으로 간 그의 아우들을 포함해, 여섯 형제 모두를 위해 마련한 공간이 되기만을 바라며 여러 아쉬움을 달래 본다.
안동 민속촌 야외 박물관에 있는 ‘광야’ 시비를 찾아가 본다. 우선은 비음(碑陰)에 새겨진 조지훈의 글이 보고 싶었다. ‘지조’라고 하면 그 누구 못지않은 시인이 자신의 본명 ‘조동탁(趙東卓)’을 걸고 온 마음을 다해 써 내려간 이육사의 일대기다. 이 명문은 “광야를 달리는 준마의 의지에는 탄식이 없고 한마음 지키기에 생애를 다 바치는 지사의 천고일철(千古一轍)에는 성패와 성욕이 아랑곳없는 법이다”로 시작하여, “광야를 달리던 뜨거운 의지(意志)여/ 돌아와 조국의 강산에 안기라”라는 감동 어린 시구로 그 끝을 맺는다. 1968년에 세워진 이 시비는 이후 새롭게 밝혀진 역사적 자료와 연구 덕에 몇 군데 오류가 생겼다고는 하지만,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선배 지사를 향한 조지훈의 존경과 찬탄에는 이의가 있을 리 없다.
“투쟁적 문학과 문학적 투쟁”이라는 정의처럼, 이육사의 삶과 예술은 실제 항일 독립운동과 직접 연관돼 있으며 이런 맥락에서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것은 당연히 옳은 일이다. 이육사는 “내 시를 쓸지언정 유언은 쓰지 않겠소”라고 외치는 행동하는 지성이었고, 그에게 있어 시를 쓰는 활동은 곧 독립운동을 위한 투쟁적 행동이었다. “다만 나에게는 행동의 연속만이 있을 따름이오. 행동은 말이 아니고 나에게는 시를 생각하는 것도 행동이 되는 까닭이오.” 그는 평생 삶과 시를 결코 구분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육사의 전기적 생애에 지나치게 집착해 저항 시와 관련된 주제에만 관심을 집중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 그저 몇 편의 시 작품만을 반복해 인용하며, 그나마도 전체적인 맥락과는 무관하게 시구의 일부분과 몇몇 단어만을 상징적으로 해석해온 방식은 이젠 지양해야 한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는 일제강점기의 “매운 계절”(‘절정’)이고, “백마를 타고 오는 초인”은 그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는 “내가 바라는 손님”의 또 다른 표현이라는 시험 문제 풀이 식의 해설만으로는 곤란하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는 태초부터 현재, 그리고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까지 이어지는 “끊임없는 광음”의 시간.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다”는 ‘광야’라는 성스러운 공간. 그리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라고 짐짓 에둘러 말하는 인간의 역사와 문명. 시인은 시공간(時空間)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자연과 인간의 장엄한 역사를 노래한다. 그러면서도 이 거대한 서사적 주제를 불과 5연 15행의 짧은 시 형식으로 유지하는 절제와 배려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이육사가 남긴 시는 40여 편에 불과하며 모두 균등한 수준을 유지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는 한국 현대 시의 역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자신만의 독특하고 유일한 시적 경지를 개척하고 완성한 시인이다. 남성적 강인함과 대륙적 기상, 시적 공간의 강렬한 확대와 시 형식의 절제된 완결성, 치열한 역사의식 그리고 행동하는 삶과 예술의 일치를 추구했다.
저 멀리 안동의 명물 월영교(月映橋)와 저녁 어스름을 한껏 품어 짙어진 강물에 수많은 별이 이미 내려와 반짝인다. “한 개의 별을 가지는 건 한 개의 지구(地球)를 갖는 것”이니, “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 다만 한 개의 별일망정/ 한 개 또 한 개 이십성좌(二十星座) 모든 별을 노래하자.”
글·사진 = 박광수 불문학자·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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