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2007년 위작 논란이 제기돼 2년 후 법원으로부터 ‘진품으로 추정된다’는 모호한 판정을 받은 박수근의 ‘빨래터’. 자료사진
- 국내 미술시장 커졌지만…‘僞作 횡행’ 여전 왜?
제대로 된 계약·보증서 없어
2015년 진위 감정 588점중
236점 ‘위작’으로 판명돼
정부 ‘미술품 유통법’ 제정
미술계 “시장 더 위축” 반대
한국화 컬렉터인 A 씨는 평소 잘 다니던 인사동의 B화랑에서 그림 크기로만 보면 족히 5000만 원은 나갈 소정 변관식(1899∼1976)의 그림을 2000만 원에 구입했다. 작품이 썩 좋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지만 가격이 좋았다. 그 후 A 씨가 그 그림을 지인들에게 자랑삼아 보여주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다들 고개를 갸웃하며 진품 같지 않다는 것이었다. A 씨는 즉시 B화랑의 사장을 찾아가 따졌다. B화랑 사장은 자신은 소정의 진작이라고 믿고 권한 것인데 그렇다면 물러주겠다며 A 씨에 웃돈을 얹어 작품값을 돌려주었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천경자의 작품인지 진위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미인도’.
예술경영지원센터의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15년 한 해 423개의 국내 화랑과 11개 경매회사, 41개 아트페어를 아울러 미술시장에서 3만6663점의 작품이 거래돼 4065억여 원의 매출을 올렸다. 화랑에서 9836점 약 2407억 원이 거래됐으며, 경매 시장에서는 1만3328점의 작품이 약 984억 원에 판매됐다.
시장이 이처럼 커졌지만 여전히 후진성을 면치 못해 미술 애호가들을 울리고 있다. 거래되는 미술품에 대한 제대로 된 계약서는 물론 보증서나 소장이력(provenance·작품 소유주에 대한 역사정보)도 보기 어렵다. 실수로 위조 또는 따라 그린 임모(臨摸) 미술품이나 문화재가 거래된 경우, 처음 판 사람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배상이 이뤄져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된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사실 이런 일은 관례다. 하지만 이는 공신력 있는 화랑이나 문화재상에서 거래한 경우에 한한다.
문제는 중간상들이나 듣도 보도 못한 사람들, 소위 ‘핸드폰 화랑’이라고 하는 떠돌이 중개상이나 인사동 언저리에 ‘화랑’이라는 간판만 내걸고 영업하는 곳에서 거래된 문화재나 미술품들이다. 지난해 일었던 이우환 위작 논란의 배후에도 화랑가에 등장한 지 얼마 안 되며 제대로 전시 한 번 변변하게 해본 적이 없는 중개인들이 연루됐다. 이 같은 시장이 형성되는 것은 그림을 살 때 싸게 구입할 수 있다면 음성적인 거래도 마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20억 원은 지불하고 구입해야 할 박수근 작품을 5억 원만 주고 산다는 것은 ‘사기당할 준비가 돼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사실은 한국미술품감정평가원(감평원)의 감정 실적에서도 엿볼 수 있다. 감평원에 따르면 2015년 한 해 총 588점의 미술품 진위감정을 의뢰받아 감정했다. 이 중 진작은 284점, 위작은 236점이라는 감정(감정 불능 68점)을 내렸다.(표 참조) 감평원 관계자는 “감정 의뢰가 들어오는 작품들 대부분이 개인이 어떤 경로를 통해 구입해 소장했다가 처음 공개하는 작품들이어서 위작 비율이 시장에서의 실제 상황보다 높게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즉 전시나 경매 등을 통해 공개 안 된 채 음성적으로 거래된 작품들에서 위작이 많다는 얘기다.
우리나라에서 미술품은 탈세, 비자금, 뇌물 사건에 자주 등장한다. 가장 큰 이유는 그림이 가지는 특수성, 즉 돈의 흐름과 추적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미술계에서도 이처럼 그림이 은밀하게 거래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음성 거래 시장 규모는 파악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은다.
정부가 지난해 미술품 유통 투명화 및 활성화 대책인 ‘(가칭)미술품 유통에 관한 법’을 입법 고시하고 미술시장에 대한 ‘교통정리’에 나선 것도 그 같은 상황 인식 때문이다. 이 법에는 미술품유통업을 화랑업, 미술품경매업, 기타 미술품판매업으로 분류하고, 화랑업은 등록, 미술품경매업은 허가, 기타 미술품판매업은 신고제를 도입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위작 범죄에 연루된 경우는 유통업 허가·등록 등이 취소돼 일정 기간 영업을 하지 못하게 되는 페널티를 부과하고, 미술품유통업자에게는 작품 보증서 등의 발급 의무를 부과함으로써 시장 질서를 확립하도록 추진할 계획이다. 또 한국화랑협회 등 민간이 주도하던 감정 시장에 ‘(가칭)국립미술품감정연구원’을 설립해 작품 감정에 공신력을 높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법 제정이 미술시장을 더욱 위축시킬 수 있다며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다. 실제로 우리 미술·문화재시장 규모에 비해 수백 배 큰 유럽이나 미국 미술시장에서 오히려 우리보다 위작 관련 뉴스가 적은 이유는 법적으로 강제하지 않아도 모든 화상이 이미 300여 년 전부터 거래된 모든 작품에 대해 소장이력을 밝혀놓았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가 약탈했던 미술품들이 원 소장가들에게 돌아갈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서류가 있었기 때문이다.
국립미술품감정연구원 설립에 대해서도 반대 의견이 많다. 미술평론가 정준모(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 씨는 “미술 분야에서 가장 공신력이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미인도를 진품이라고 해도 안 믿는 판에 국가 감정원이 감정한다고 공신력을 인정받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고 오히려 정부에서 잘못 감정해 위작을 진작이라고 해 문제가 생길 경우 국민의 혈세로 ‘위작 사기’ 피해보상을 해주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며 “위작 근절과 미술시장의 투명·공정을 위해 가장 우선돼야 할 것은 ‘미술품 및 문화재 유통관리법’을 통해 등록된 화랑에 ‘미술품 및 문화재 전문 중개사’를 의무적으로 두고 거래 시 필수적인 서류들을 첨부하도록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경택 기자 ktlee@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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