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영화 ‘서편제’에서 유봉과 송화·동호 남매가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춤추고 내려오는 장면(아래 사진)은 전남 완도군 청산도(위)에서 촬영했다. ‘원 신 원 컷’으로 5분이 넘게 찍은 이 장면은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으로 꼽힌다. 자료사진
(78) 영화 ‘서편제’속 남도 소릿길
멀리서 ‘진도아리랑’을 주고받으며 송화와 유봉이 걸어온다. 동호도 흥이 나서 메고 있던 북을 친다. “사람이 살면은 몇백 년을 사나, 개똥 같은 세상이나마 둥글둥글 사세.”(유봉) “문경새재는 웬 고갠가. 구부야 구부구부가 눈물이 난다.”(송화) “소리 따라 흐르는 떠돌이 인생, 첩첩이 쌓인 한을 풀어나 보세.”(유봉)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 이내 가슴속엔 수심도 많다.”(송화)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중략) 만경창파에 둥둥둥 뜬 배 어기여차 어야 디어라 노를 저어라.”(합창)
영화 ‘서편제’의 공간은 길이다. 유난히 길이 많다. 등장 인물들은 길에서 노래를 부르고 북을 치고 춤을 춘다. 그런데 거의 남도 길이다. 마치 소리 ‘서편제’가 섬진강의 서쪽에 자리한 광주·나주·보성·강진·해남 등지에서 불렸던 것처럼 떠돌이 소리꾼 유봉(김명곤)과 송화(오정해)·동호(김규철) 남매는 고집스럽게 서쪽 땅만을 다닌다. 경기 벽제 세트장을 빼곤 전남 완도군 청산도를 비롯해 해남군 대흥사, 화원면, 간척지와 영광군 염전 등 대부분 남도의 풍광을 담았다. 서편제 소리꾼의 한과 설움이 남도의 그것과 다름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같은 ‘서편제’의 공간은 감독의 말에서도 엿볼 수 있다. 전남 장성에서 태어난 임권택 감독은 “원작 소설은 우리 판소리의 정서를 잘 담아내고 있다. 원작을 바탕으로 남도의 아름다운 자연, 한을 맺고 푸는 사람들의 삶, 우리 소리의 느낌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영상을 그리고자 했다”며 ‘서편제’의 공간이 남도임을 밝혔다.
◇청산도(靑山島) = 사시사철 섬이 푸르다고 해서 청산도라 불렸지만 영화 속 해방 직후 청산도는 황량하기 그지없다. 11월 추수가 끝난 잿빛 들판이다. 유봉과 송화·동호 남매가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춤추고 내려오는 언덕길 역시 비포장도로에 비스듬히 누워 있다. 바람이 불면 흙먼지가 일기도 한다. 길 양옆 땅은 매우 천박해 보이고 돌이 많은 계단식 밭뿐이다. 영화는 비스듬한 언덕길을 ‘원 신 원 컷’으로 오래 찍었다. 5분이 넘는다. 유봉과 송화·동호는 진도아리랑을 온전히 들려주면서 떠돌이 소리꾼들의 체념과 달관의 심정을 잘 보여준다. 이 장면은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으로 손꼽힌다. 영화 속 청산도는 소리꾼의 고단한 삶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들의 미래 역시 그리 밝지 못함을 점치게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영화 속에서 이들 소리꾼 가족이 길을 나선 이유는 장터 약장수에게 쫓겨나 떠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여인숙에서 동호의 북장단을 나무라던 유봉은 약장수에게 “너희들 따라다니며 소리 팔아먹고 사는 게 지겹다”며 울분을 토하자 약장수는 “지겨우면 그만두면 될 것 아냐”라며 이들 가족을 쫓아낸 것이다. 짐을 챙겨 나선 길이 이 길이다. 영화적인 공간으로서의 이 길은 떠돌이 유봉 가족의 한(恨)이 한데 모인 곳이다. 유봉은 목적지가 없다. 다른 콘텐츠들의 인물들이 항용 갖고 있는 이상향이나 안식처를 찾아가지 않는다. 그저 정처 없이 떠나는 길이다. 떠돌이다. 그것은 세상이 변해 생명이 다한 소리의 운명과 맞닿아 있다. 이 길은 ‘소리의 마스터’이며 가부장인 유봉에겐 유일한 지배의 공간이다. 비록 가족으로 구성된 작은 공연단이지만 우두머리며, 남매의 인생은 물론 생사까지도 쥐락펴락하는 아버지다. 하지만 이 길은 송화와 동호에게는 벗어날 수 없는 억압의 공간이다. 급기야 동호는 유봉의 지배를 벗어나 도회지로 도망치고, 동호의 이탈로 위협을 느낀 유봉은 송화에게 극약을 먹이고 눈을 멀게 해 자신의 지배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잡아둔다.
2017년 봄, 청산도 ‘진도아리랑 길’은 사뭇 다르다. 많은 관광객들의 발길 때문인지 소리꾼의 애환이 서린 청산도의 원형은 사라졌다. 대신 여유와 힐링을 체험할 수 있는 관광명소가 됐다. 아름다운 주변 풍경에 취해 절로 발걸음이 느려진다는 ‘슬로길’로 단장됐으며 푸른 청보리밭과 만발한 노란 유채꽃이 갈 길 바쁜 현대인을 호객하고 있다. 2011년엔 국제슬로시티연맹 공식인증 세계 슬로길 1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이뿐만 아니라 청산도는 드라마 ‘봄의 왈츠’ ‘여인의 향기’와 예능 프로 ‘1박 2일’이 말해 주듯이 엔터테인먼트 콘텐츠의 생산지로 변했다. 이 같은 청산도의 상전벽해(桑田碧海)는 한 편의 영화 콘텐츠가 어떻게 지역 경제에 기여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전남 영광군 염전지대와 남산 영화진흥공사 세트장 = 영화의 클라이맥스인 남매의 상봉이 이뤄진 술집은 전남 영광군 백수면 근처 염전지대에 있다. 영화 종반부, 뿌연 먼지가 날리는 황량한 비포장도로로 시외버스 한 대가 들어온다. 버스에서 내린 동호가 주위를 돌아보면 그 시선에 걸리는 집 한 채. 소리를 하는 여인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은 술집이다. 술집은 남매의 상봉이 이뤄지는 공간이자 이별의 공간이다. 송화를 찾겠다는 지향점이 있는 동호의 동선이 그저 발길 닿는 대로 정처 없이 떠도는 송화의 동선과 만나는 공간이기도 하다. 비록 짧은 만남이지만 동호에겐 송화에 대한 그리움과 집을 뛰쳐나온 죄책감을 속죄하는 고해성사의 공간이고, 동생을 마주한 송화에겐 동생에게 소리꾼으로서 완성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밤새 남매의 신명 난 북장단과 천년의 한을 풀어내는 듯한 소리를 지켜본 술집 주인은 “나도 밤새워 들었는디 자네 소리하고 저 사람 북장단이 어우러졌을 때 서로 몸을 대지 않고도 상대편을 희롱하고 어떨 때는 서로 몸을 보듬고 운우지정을 나누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네”라고 말한다.
동호가 송화를 만나는 술집으로 둔갑한 이곳 일대는 천일염전으로 유명하다. 햇볕은 갯물을 다독이고 바람은 결정을 북돋워 소금을 만들어 내는 염전엔 오늘도 염부가 나와 고무래로 대파질을 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바둑판처럼 반듯하게 펼쳐진 염전 옆으로 뻗은 신작로 위로 회색 시멘트 전봇대가 도열해 있는 풍경이 고즈넉하다. 그 뒤로 큰 바람개비 같은 멈춰 선 풍력발전기만이 세월의 무상함을 얘기하는 듯하다.
술집 내부는 서울 남산 밑 영화진흥공사(현 영화진흥위원회) 세트장에서 촬영했다. 지금은 종합편성채널, 광고 관련 프로덕션들이 입주해 있는 이 건물 세트장은 영화진흥위원회 종합촬영소가 경기 남양주로 이사하기 전인 1970년부터 1990년대까지 한국 영화 대부분이 촬영됐던 국내의 대표적인 세트장이다. 1990년대 당시는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촬영이 있었고 영화를 처음으로 소개하는 시사회도 같은 건물에서 열려 기자와 영화팬들에게는 서울 가까이에서 유명 스타를 볼 수 있는 장소였다.
영광군 염전 사택의 입구에 붙은 빨간색과 초록색의 조악한 꽃 그림을 그대로 그려 재현하고, 술집 안 창문 너머로 보이는 염전을 그려 넣은 세트장 안에선 남매 상봉 장면을 두 차례 촬영했다. 먼저 찍은 부분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로선 약하다는 판단 아래 오정해가 부르는 심청가 뒷부분인 심 봉사가 눈 뜨는 대목만 다시 찍었다. 중간에 오정해의 소리 대신 묵음(silence)과 김수철의 음악으로 바꿨다. 이로써 오정해는 소리에 신경 쓰지 않아 연기가 한결 자연스러워졌고, 그 결과 이 장면에서 많은 관객들이 눈물을 훔쳐 대박을 터뜨리게 됐다. 영화 엔딩크레디트가 뜨는 가운데 송화가 어린 소녀를 앞세우고 길을 떠나는 마지막 장면도 영광군 염전지대 근처 사잇길이다.
◇경기 벽제 세트장 = 해방 직후 유봉이 어린 송화와 동호에게 “소리 귀 좀 뚫어 준다”며 나온 장터 주막, 가설무대, 약장수 판과 악극단 공연장, 가두선전대의 영화 공간은 경기 벽제 오픈세트장이다. 이곳은 태흥영화사가 ‘장군의 아들’을 찍을 당시 건립한 장소로, 1990년대 ‘장군의 아들’ 시리즈와 ‘태백산맥’ ‘축제’ ‘노는 계집 창’ 등이 촬영됐다.
풍물패를 앞세운 창극단과 외국 번안곡 ‘베사메무초’가 흐르던 장터는 소리꾼 세계에서조차 인정 못 받는 유봉이 루저(loser)의 신세임을 드러낸 공간이다. “한물간 소리를 배워 봤자 앞길이 막막할 거야”라는 친구 낙산의 말에 유봉은 “두고 봐라 이놈아, 판소리가 판을 치는 세상이 오고야 말 테니까”라고 응수하지만 그의 마음엔 초조함이 가득하다. 더욱이 송화가 소리하는 소리판(약장수에 고용된)이 ‘베사메무초’를 연주하는 가두선전대에 쫓겨 판을 접어야 하는 대목에서 유봉의 위기감은 극에 달한다. 하지만 장터는 남매에겐 바깥 세상과 접할 수 있는 유일한 해방구이다. 특히 평소 유봉에게 불만이 많은 동호에게 장터의 새로운 풍경은 가출의 계기로 작동한다.
김병재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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