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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명작의 공간 게재 일자 : 2017년 07월 14일(金)
이방인과의 共存… 낯선 세계를 껴안는 ‘성장의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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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차이나타운의 화려한 거리. 소설 속 중국인 거리는 1884년 설치된 청국 조계에서 비롯된 공간이다. 이 일대가 지금은 차이나타운 등의 관광지로 조성돼 많은 국내외 관광객의 사랑을 받고 있다. 뉴시스

87 오정희 소설 ‘중국인 거리’의 배경 인천

오정희의 ‘중국인 거리’(‘문학과지성’, 1979년 봄호)는 6·25전쟁 직후 인천의 해안촌에서 아홉 살부터 열세 살까지 살아가는 한 소녀의 성장 체험을 다룬 소설이다. ‘중국인 거리’라는 제목으로 인해 흔히 차이나타운이라 불리는 중국인 거리만이 등장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 작품에는 경인철도, 제분 공장, 저탄장, 축항선, 공원, 맥아더 장군의 동상, 중국인 상점, 화차, 항만과 같은 인천역 부근의 풍경이 비교적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소녀는 가족과 함께 인천의 해안촌으로 이사를 온다. 도시에 대한 소녀의 기대와는 달리, 해안촌은 같은 모양의 목조 이층집들이 늘어선 초라하고 지저분한 곳이다. 역의 저탄장에서 날아오는 석탄가루 때문에 빨래도 말릴 수 없고 공기 중에는 해인초 끓이는 냄새가 가득하다. 실제로 작가 오정희는 1955년 조양석유㈜ 인천출장소 소장으로 취직한 아버지를 따라 충남 홍성에서 인천으로 이사하여 약 4년간 인천에 살았다. 작가의 증언에 따르면 작가가 살던 집은 청·일 조계지 경계 계단을 기준으로 일본 조계의 초입에, 중국인이 운영하던 푸줏간은 청국 조계의 초입에 위치해 있었다고 한다. 그곳들은 현재 각각 복림원과 청화원이라는 중국집이 영업을 하고 있다.

이 해안촌을 지배하는 가장 큰 힘은 전쟁이다. 소녀가 해안촌까지 흘러온 이유부터가 6·25전쟁 때문이고 이곳에는 소녀의 집만을 제외한 적산 가옥 모두가 양공주에게 세를 주었을 정도로 미군 상대의 성매매가 널려 있다. 거리에는 드문드문 포격에 무너진 건물이 방치돼 있고 시의 공설운동장에서는 유엔중립국 감시위원회 철수를 요구하는 관제데모가 열린다. 미군 병사는 부대 안의 테니스 코트에서 칼 던지기를 하다가 갑자기 고양이에게 칼을 던져 죽인다. 그러고는 “킬킬대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나중에 양공주 매기 언니를 살해한 미군도 “낄낄대며” 미군 지프차에 실려 간다.

해안촌의 또 다른 지배자는 가난이다. 가난은 순수의 마지막 성채여야 할 아이들마저 속악한 현실에 그대로 노출시킨다. 소녀를 포함한 아이들은 제분공장에서 밀을 훔쳐 먹고 화차에서 석탄을 훔쳐서 상인들에게 판다. 해안촌의 아이들은 어른들의 말과 노래를 능청스럽게 따라 하며 너무 빨리 영악한 어른이 되어 가는 것이다. 소녀의 친구 치옥이는 부모의 관심과 애정이 결핍된 상태로 자라는데 위층에 세 들어 사는 매기 언니의 화려한 겉모습에 빠져 양공주가 되기를 꿈꾼다. 사회로부터 별다른 보호 없이 방치된 아이들의 모습은 당대의 피폐한 모습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  소녀가 해안촌을 내려다보곤 하던 자유공원의 맥아더 동상.
무엇보다 해안촌의 가장 특이한 점은 이곳이 각지에서 이주해 온 다양한 인종으로 가득한 혼종적 공간이라는 사실이다. 해안촌에는 한국인, 중국인, 미국인, 혼혈아 등이 한데 어우러져 살고 있다. 전후 한국소설 중에서 미국인과 혼혈아를 그린 소설이 적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중국인 거리’에 등장하는 중국인 거리와 중국인이야말로 이 작품의 고유한 특성이다. ‘중국인 거리’에서 중국인 거리는 여타의 해안촌과는 구분되는 독특한 곳으로 표상된다. 중국인들이 사는 “언덕은 섬처럼 멀리 외따로” 자리 잡고 있으며 그들의 집은 “일종의 적의로 냉담하고 무관심하게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며 서 있”다. 1882년의 개항과 더불어 인천에는 잇달아 외국인들의 치외법권적 지역인 조계들이 생겨났는데 중국인 거리는 1884년 설치된 청국 조계에서 비롯된 공간이다. 구한말에는 청국 조계 이외에도 지금의 자유공원 자리에 각국 조계가, 청국 조계 바로 옆 동쪽에 일본 조계가 설치되었다. 이후 일본인 등은 거의 본국으로 돌아갔지만 중국인들은 소설이 쓰인 당시까지도 적지 않은 인구가 중국인 거리에 남아 있었다. ‘중국인 거리’의 시간적 배경인 1957년에도 1807명의 화교가 인천의 중국인 거리에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고립된 삶을 사는 중국인을 대하는 어른들의 태도는 참으로 폭력적이다. 중국인을 향한 어른들의 태도는 경멸하는 어조로 내뱉는 “뙤놈들”이라는 단어에 압축되어 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아이들은 중국인을 “밀수업자, 아편쟁이, 누더기의 바늘땀마다 금을 넣는 쿨리, 그리고 말발굽을 울리며 언 땅을 휘몰아치는 마적단, 원수의 생간을 내어 형님도 한 점, 아우도 한 점 씹어 먹는 오랑캐, 사람 고기로 만두를 빚는 백정, 뒷일을 보면서 바지도 올리기 전 꼿꼿이 언 채 서 있다는 북만주 벌판의 똥덩어리”로 상상한다.

이토록 부정적으로 의미화 된 중국인들의 모습은 한국 근대사에서 그리 낯선 것은 아니다. 최초의 신소설인 이인직의 ‘혈의 누’(‘만세보’, 1906)에서 청일전쟁 당시의 청군들은 강도와 겁탈을 일삼고 심지어 그들의 총알에는 독이 묻어 있어 민간인에게 더 큰 피해를 입힌다. 청군들은 일본군들과는 달리 조선인의 “원수”이다. 김동인의 ‘감자’(‘조선문단’, 1925)에서 왕서방은 최소한의 의리도 없이 물욕과 성욕에만 가득 찬 인간으로 복녀를 파멸로 이끌며 최서해의 ‘홍염’(‘조선문단’, 1927)에서 문서방의 딸을 뺏어가고 문서방의 아내를 죽게 한 중국인 지주 인가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다. ‘눈물 젖은 두만강’(1936)의 국민가수 김정구가 불러 대박을 터뜨린 ‘왕서방 연서’(1938)에서 명월이한테 반해 ‘띵호와, 띵호와’를 외쳐대는 왕서방은 참으로 주책맞은 호색한이다.

이러한 부정적 인식은 나름의 역사적 배경을 지니고 있다. 한국의 화교는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처음 들어와 그 세력을 키워나갔으며 특히 인천은 산둥반도와 인천항 사이에 정기적으로 배가 운행되었기에 화교의 주요 거점이 되었다. 1931년 만보산 사건(1931년 7월 2일 중국 지린(吉林)성 창춘(長春)현 만보산 지역에서 한인 농민과 중국 농민 사이에 일어났던 충돌 사건)이 계기가 되어 한반도 전역에서 발생한 화교배척폭동(중국 측 자료에 따르면 화교 142명 사망, 546명 부상, 91명 행방불명)이 보여주듯이 중국인과 조선인들은 일제강점기 내내 긴장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러한 갈등은 오랜 기간 지속되어 온 역사문화적 이유(대표적으로 병자호란 당시 청으로부터 받은 조선의 극심한 피해 등을 들 수 있다)와 더불어 “한국인 노동자와 중국인 노동자의 일자리 다툼”(김태웅, ‘이주노동자, 그들은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왔나’, 아카넷, 2017, 9면)과 같은 사회경제적인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1948년 한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한국인과 화교의 갈등은 계속 심화되었다. 화교가 한국경제에서 차지하는 지나친 비중이 불러온 위기의식과 화상들의 밀무역 부정거래 등으로 인하여 화교들에 대한 인식은 더욱 부정적으로 변해 갔던 것이다. 이후 한국 정부는 화교 활동 규제책을 취해 나갔고 이에 따라 한국을 떠나는 화교들도 늘어갔다. 오정희의 ‘중국인 거리’에는 중국인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1950년대 한국인들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특히 소녀의 할머니는 중국인들을 향해서뿐만 아니라 흑인병사를 향해서도 배타적 시선을 결코 감추지 않는다. 혼혈아이자 장애아인 매기 언니의 딸 제니를 볼 때는 “털 가진 짐승을 볼 때의 혐오의 눈”이 되며 “짐승의 새끼”라는 말을 서슴없이 한다. 나중에 할머니가 비참하게 죽고 소녀가 굳이 그 할머니의 유품들을 땅에 묻기까지 하는 것은 이방의 것들을 철저히 부정하는 할머니에 대한 소녀의 거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무관심과 경멸로 일관하는 어른들과 달리 소녀는 유일하게 중국인과 교감을 나눈다. 중국인 거리의 이층집에 사는 젊은 남자는 늘 “창백한 얼굴”을 하고서는 자신이 사는 이층집이나 이발소에서 “알 수 없는 시선”을 소녀에게 던진다. 중국인 남자는 보통의 상식이나 경험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그야말로 미지의 타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소녀는 중국 남자의 창백한 얼굴에서 나오는 시선을 보며 “알지 못할 슬픔이, 비애라고나 말해야 할 아픔이 가슴에서부터 파상을 이루며 전신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경험한다. 어쩌면 중국인 남자는 오직 소녀만을 향해 시선을 던진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는 한국 사회의 이방인으로서 누군가를 향해 소통하고자 하는 신호를 고립된 중국인 거리의 이층집 덧문에서 늘 보내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그 창백한 얼굴의 시선을 향해 자신을 열어놓은 존재가 열 살 무렵의 소녀뿐이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마지막에 중국인 남자가 빵과 과자 등이 담긴 종이꾸러미를 선물로 주고 소녀가 그것을 빈 항아리에 담는 모습은 둘의 교감과 소통이 가장 환하게 빛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불가사의한 신의 얼굴을 한 중국 남자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소녀 역시도 중국인 남자와 마찬가지로 외지에서 밀려온 이주민이었기에 아마도 가능했을 것이다. 또한 외국인과 아이는 한 사회의 공통규칙을 내면화하지 못한 타자의 대표적 형상들이기도 하다.

작품 속의 중국 청년은 소녀의 성장을 이끄는 긍정적인 매개자로서 기능한다. 전쟁과 빈곤의 상처가 가득한 이 해안촌에서 그나마 소녀가 “차가운 공기 속에 연한 봄의 숨결”을 느끼고 “따스한 핏속에서 돋아오르는 순”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중국 청년의 “창백한 얼굴”을 보았을 때이다. 중국인 남성은 전후의 척박한 현실에서 소녀를 생명력 가득한 한 명의 어른으로 성장하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남는 문제는, 소녀에게 선물을 주는 순간에도 중국인 청년의 미소는 “여전히 알 수 없”는 것으로 진술된다는 사실이다. 그는 종이꾸러미를 던지고는 한마디 말도 없이 자신의 집으로 들어간다. 중국인 젊은 남자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신비롭고 묘한 눈빛의 존재로만 남겨지는 것이다. 이러한 중국인의 모습은 “뙤놈”이라는 단어로 규정되는 어른들의 폭력적인 중국인상과는 분명히 구분되는 것이지만 그들을 우리와 같은 구체적인 인간으로 사유하지 못하게 만드는 측면도 분명 존재한다. 그렇다면 중국인 젊은 남자는 어린 소녀를 통해 “뙤놈”과는 다른 방식으로 타자화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중국인 청년이 준 선물을 담아둔 빈 항아리에 “금이 가” 있었다는 점은 뭔가 상징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21세기 한국 사회는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여러 인종과 민족이 어우러지는 다문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 어느새 200만에 육박하는 외국인이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들과 어떠한 관계를 맺어 나가느냐는 한국사회의 윤리감각을 시험하는 하나의 잣대가 되어 가고 있다. 이와 관련해 오정희의 ‘중국인 거리’는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주는 작품이다. 이방인들을 특정한 시각으로 재단하여 경멸의 벽 속에 가둬서도 안 되며(어른들이 중국인들에게 그러했듯이), 동시에 이방인들을 미지의 대상으로 신비화하여 허공의 창 속에 방치해도(소녀가 중국 남성에게 그러했듯이) 안 된다는 것이 시사점의 구체적인 내용일 것이다. 오정희의 ‘중국인 거리’는 전후의 해안촌이라는 과거와 21세기 다문화 사회라는 미래로 활짝 열린 명작이다.

이경재 문학평론가·

숭실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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