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기업 보호할 ‘기술임치制’의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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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호 대·중소기업·농어업협력재단 사무총장

4차 산업혁명 시대로 접어들면서 기술 보호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첨단 기술의 융·복합으로 인해 기술의 응용 분야가 다양화하고 제조업의 경계도 모호해지면서, 기업들이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기보다는 복제나 기술 탈취의 유혹에 빠지기 쉬운 환경으로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를 고려해 전문가들은 4차 산업혁명 시대가 임박할수록 특허와 영업비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사후 분쟁이 발생하기 전에는 특허와 영업 비밀의 중요성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기술 보호 장치를 마련한다고 해서 당장 매출이 증가하거나 생산 효율이 제고(提高)되는 등의 효용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보험사고가 발생하기 전에는 보험료가 보험 가입자에게 단지 부담으로만 느껴지는 것처럼, 기업에 지식재산권 및 영업비밀 보호 장치는 불필요한 비용으로 여겨지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기술 유출 사고는 결코 멀리 떨어져 있는 남의 일이 아니다. 실제 통계가 잘 말해준다. 2016년 중소기업청의 ‘중소기업 기술보호 역량 및 수준 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 3년 동안 중소기업의 3.5%가 기술 유출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1건당 피해액은 약 18억9000만 원(총 1097억 원)에 이른 것으로 집계됐다. 모든 기업은 언제든지 피해 당사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기술임치제도(escrow)는 핵심 기술을 포함한 영업비밀을 보호함으로써 기술 유출 피해를 예방할 수 있는 객관적이고 명확한 수단이 될 수 있다. 국내에서 기술 보호를 위해 임치(任置)제도를 잘 활용한 사례도 있다. 방사선 필름을 100% 수입하던 시절, 한 기업이 필름 대신 모든 영상을 디지털화하여 통합 관리하는 의료영상저장전송시스템(PACS)을 개발했다. 이 기업은 내부적으로 기술 유출을 방지하고, 주 고객사인 병원의 중요한 의료 정보를 보호하기 위해 꾸준히 기술임치를 해왔으며, 현재까지 180여 건에 이른다.

이처럼 기술 보호에 만전을 기하며 전 직원의 50%를 개발인력으로 배치하고 끊임없이 기술 개발에 주력해 온 결과, 현재는 국내 시장의 70%를 점유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대기업과 협력사 간 거래 등에서 사업을 제안할 때 중소기업이 핵심 기술 정보를 공개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대기업의 투자를 받기 위해 기술 시연(試演)을 했다가 핵심 기술을 탈취당하는 사례들도 발생하고 있다. 기술 개발과 동시에 기술을 임치하면, 추후 기술 탈취 소송을 하더라도 기술 개발 사실과 개발 시점을 확인하는 가장 핵심적인 증거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기술임치는 기술 탈취를 방지하고 기업 경영의 안정성을 보장받을 수 있는 필수 수단이다.

최근 일부 대기업은 협력사를 대상으로 기술 보호 및 기술임치의 중요성에 대해 교육하고 기술임치 비용을 적극적으로 지원함으로써 협력사의 기술을 보호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이것은 협력사의 기술 경쟁력이 모기업의 경쟁력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대기업이 인식한 결과라고 하겠다. 이런 사례가 확산돼야 대·중소기업 상생 협력의 문화가 정착될 수 있을 것이다.

산업이 고도화할수록 개발 기술, 마케팅, 제조 정보 등의 영업비밀 보호가 기업의 안정적 경영 및 경쟁력 강화와 더욱 직결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잠자는 권리는 보호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정부 및 공공기관, 대기업뿐만 아니라 중소기업에도 임치제도 등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기술 보호 노력이 요구되는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