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2013년 4월 완공된 벽화 ‘염원, 소록의 꿈’은 소록도의 과거, 현재, 미래를 보여준다. 과거의 인권 유린은 ‘피 흘리는 아기사슴’으로, 현재는 소록도 주민과 국립소록도병원 임직원, 자원봉사자 등의 얼굴로, 한센병이 사라진 소록도의 아름답고 평화로운 미래는 구라탑 아래 한가로이 풀을 뜯는 아기사슴으로 형상화했다.
(92) 이청준 ‘당신들의 천국’의 배경, 소록도
섬은 이제 섬이 아니다. 2009년 3월, 어린 사슴을 닮은 섬과 뭍을 연결하는 크고 튼튼한 다리가 놓였다. 다리 덕분에 이제 우리가 무시로 들고 날 수 있는 섬은 더 이상 금단의 땅도 천형의 땅도 아니다. 그 섬을 찾아가는 날, 아침부터 내리던 비는 소록대교를 건널 때도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는 이청준을 ‘한국 현대문학의 뜨거운 상징’이라고 했다. 태작(태作)이 거의 없는 이 소설가는 생전에 ‘당신들의 천국’을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으로 꼽았다.
‘당신들의 천국’은 1966년 10월 ‘사상계’에 실린 이규태의 논픽션 ‘소록도의 반란’에서 촉발된 작품이다. 이청준은 ‘땅에서 못 사는 恨’이라는 부제가 붙은 ‘소록도의 반란’을 읽고 소록도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소설을 쓰기로 결심했다. 이규태의 글은 ‘한 미숙한 문학청년에게 제법 야심적인 창작욕의 발단을 마련해 주었’다.
소록도는 이청준의 고향인 전남 장흥군 대덕면과도 관련이 깊다. 대덕면에서 벌어졌던 대규모 간척지 사업은 ‘당신들의 천국’에서 오마도 간척사업의 본보기로 제시된다. 작가는 여러 글에서 어린 시절 소록도로 나들이 간 경험과 간척지 사업에 대해 쓰고 있다.
소록도에 들어서자마자 반드시 거쳐야 되는 곳이 ‘수탄장(愁嘆場)’이라는 소나무 길이다. 바다와 가까운 이 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가슴 저린 장면이 펼쳐졌다. 이청준은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이날은 마침 미감아 보육소 아동들의 부모 면회가 있는 날이었다. (중략) 면회 행사는 곧 시작되었다. 철조망을 기준으로 병사 지대 쪽 어른들이 먼저 2미터의 거리를 물러섰다. 군데군데 감시 직원이 배치되고, 이쪽 아이들이 제각기 자기 육친을 찾아 철조망 앞으로 다가섰다. 아이들 역시 철조망을 기준해서 2미터 거리를 표시한 직선 위에 일정하게 발을 머물러 섰다. 그리고 이때부터 이 섬이 생긴 후로 수많은 애화와 비원을 남긴 그들의 오랜 풍속이 다시 한 번 반복되기 시작했다. / 면회 시간은 5분간이었다. 하지만 그 5분간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보다도 많은 이야기와 사연이 오가는 시간이었다.”(이청준, ‘당신들의 천국’ 중)
‘수탄장’이라는 기묘하고 비장한 이름은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장소와 어울리지 않았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한센인을 대상으로 시체 해부를 했던 아픈 역사를 지닌 검시실. 등록문화재 제66호.
이청준이 1976년 1년여 동안 한 잡지에 연재했던 ‘당신들의 천국’은 현역 군인이자 의사인 조백헌 대령이 소록도 한센인 병원 원장으로 부임하면서 시작된다. 3부로 구성된 이 소설의 중심에 ‘지배’라는 단어가 있다. 조백헌은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지배 권력이 임명한 사람답게 ‘시퍼런 유니폼에 권총까지 꿰찬’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난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등에 업은 조 원장은 한센인들의 낙원을 만들겠다는 신념으로 오마도 간척사업을 벌이지만 결국 실패한다. 그가 떠나자 한센인들이 목숨을 바쳐가며 이룩한 간척지도 외부 세력에게 넘어간다. 하지만 7년 후, 일반인으로 소록도에 돌아온 조백헌은 여전히 낙원을 향한 신념을 버리지 못한다. 이청준이 소설에서 동상, 거인증으로 부르는 이 신념은 오로지 자신만이 섬을 연결하는 주체이자 간척지를 온전히 완성하는 사람이 되고 말겠다는 오만하고 부정적인 의지의 표출이다. 그런 조백헌을, 예전에도 그에게서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던 보건과장 이상욱이 회의에 찬 시선으로 지켜본다.
‘당신들의 천국’은 ‘보이는 세계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힘과 그 힘의 질서’에 대한 이야기로,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의 역학관계가 자유와 사랑과 배반 등의 개념을 매개로 펼쳐진다. 표제에 있는 ‘당신들’은 소설 속 주정수 원장과 조백헌 원장이 속한 외부세력을 말하고, 그에 대비되는 ‘우리들’은 피지배계층인 소록도 한센인 공동체를 뜻한다.
이 소설은 모든 지배 권력이 공유하는 한결같은 논리를 보여준다. 외부에서 온 지배자가 고난에 찬 운명공동체에 곧 눈앞에 나타날 낙원을 약속한다. 영원히 오지 않을 장밋빛 미래는 허구에 불과한 ‘당신들의 천국’일 뿐인데, 그로 인해 가불해 누린 은총만 가득한 현재는 사역과 반목이 팽배한 ‘우리들의 지옥’이 되고 만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한센인 인권 탄압의 상징인 감금실. 등록문화재 제67호.
사실 조백헌 원장은 한센인들에게 우리들의 천국을 만들어주겠다는 선한 의지로 가득 차 있다. 조 원장의 선의와 약속을 믿은 한센인들은 자신들이 살 천국을 얻기 위해 오마도 간척사업에 헌신했다. 외부인들의 땅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내는 땅, 그 공간은 마땅히 그들의 것이어야 했다. 그런데 온갖 고난과 시련과 방해를 무릅쓰고 얻은 새 땅은 그들의 것이 아니었다.
외부에서 온 지배자가 아무리 선의를 가졌더라도 그는 결국 외부인일 뿐이다. 조백헌 원장이라고 다를 수 없었다. 결과는 일제강점기 주정수 원장 때와 마찬가지가 된다. 소록도공동체는 자신들의 손으로 만든 중앙공원을 고스란히 ‘당신들’에게 바쳤던 주 원장 시절의 경험을 다시 한 번 겪는다. 이번에는 한낱 공원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땅, 그들만의 젖과 꿀이 흐를 낙원이 될 땅을 외부인들에게 뺏긴다. 한센인들은 구원자란 결코 외부에서, 지배세력에게서 올 수 없다는 뼈저린 경험을 한다. 그 경험은 지금, 여기에 구현된 천국만 우리들의 천국임을 깨닫게 한다. 그래서 ‘당신들의 천국’이라는 표제는 시공을 모두 포함한다.
엄밀히 말해 ‘천국’이라는 단어에는 한정적인 수식어가 붙을 수 없다. 모든 보편적인 사람의 천국이 아닌 그 어떤 한정적인 천국도 천국이 아니다. 울타리가 쳐진 천국은 천국이 아니라 감옥이다. 소록도에 ‘한센인들의’라는 울타리가 쳐진 ‘천국’을 건설하려는 조백헌 원장의 야심 찬 계획은 처음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의 천국 건설에는 실천적 힘인 사랑과 자유도 부족하다. 지배자인 조백헌이 사랑을 바탕으로 천국을 구상해야 한다면, 피지배자인 한센인들은 자유의지에 따라 그 천국을 실제로 건설해야 한다.
이청준이 말하는 사랑의 전제조건은 베푸는 사람이 운명공동체의 일원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당신들의 천국’에서 소록도에 상주하는 주 인물 중 태생이 한센인과 관계없는 유일한 사람이 조백헌이다. 정상인인 줄 알았던 보건과장 이상욱과 서미연도 미감아(未感兒·나환자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병에 감염되지 않은 아이) 출신이다. 이상욱은 섬을 떠나 뭍에서 살 때조차 자신이 섬의 일원임을 잊지 않는다. 소록도공동체의 기본조건은 한센인이면서 인간이라는 이중성이다. 그들의 천국은 한센인이라는 공동체의 천국인 동시에 인간이라는 독립인격체의 천국이기도 해야 한다.
수탄장을 지나 바다를 끼고 걷다 보면 붉은 벽돌건물들이 보인다. 일제강점기 한센인들이 겪은 모진 고난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갱생원 검시실과 감금실이다. 그 가슴 아픈 건물들 앞 언덕에 중앙공원이 있다. 중앙공원은 수탄장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아름답다. 그런데 중앙이 끝이다. 외부 사람이 갈 수 있는 곳은 거기까지다. 섬 대부분은 여전히 일반인 출입금지구역이다. 곳곳의 표지판이 알려주듯, 섬의 정체성이 무엇보다 소록도 국립병원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낙토(樂土)’를 찾을 방법은 없을까. 그 길은 어떤 운명공동체 내부에서 자생적으로 나온 지배자가 곧 구원자가 될 때, 그러니까 수직적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 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소록도라는 공간에서 전개되는 ‘당신들의 천국’의 주인공은 조백헌 원장이 아니다.
이청준이 초고에서 ‘보건과장(주인공)’이라고 명시하기도 했지만, 이 소설의 진정한 주인공은 이상욱이 속한 한센인 운명공동체이다. 이청준이 초고에 ‘주제: 탈출(의 윤리)’라고 적은 것도 이상욱의 정체성을 알아야 납득이 가능하다. 그는 낙토가 한창 건설되고 있는 소록도에서 두 번 탈출한다. 주정수와 조백헌, 다른 듯 매우 닮은 두 원장이 만들고 있는 낙원에서 이상욱이 나가버리는 것이다. 왜? 미감아인 이상욱은 ‘그를 낳은 한 쌍의 사내와 여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섬 전체가 마음을 합해 함께 길러’낸, ‘모든 원생들의 두려운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한센인의 천국’에서 그가 감행하는 ‘탈출’은 자신이 한센인인 동시에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임을 증언하는 것이다. 이상욱은 탈출을 통해, 당신들이 천국이라고 주장하는 섬은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나가야 하는 감옥이라는 것을 증언한다.
섬을 정상적으로 드나들 수 있는 우리는 이상욱이 탈출한 지점인 ‘돌뿌리’ 해안에 갈 수 없다. 중앙공원에서 아쉬운 마음을 접고 나오다 보면 벽화 ‘소록의 꿈’을 마주하게 된다. 낯설지만 새로운 벽화가 소설 속 ‘출소록’의 꿈을 떠오르게 했다. 이청준의 소설에서 섬은 종종 힘든 현실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이상향을 품고 있다. 제주도가 이어도를 꿈꾸고, 울릉도가 홀섬을 꿈꾸는 것처럼, 소록도는 오마도 간척지를 꿈꾼다. 그래서 출소록의 꿈은 이상향으로 가겠다는 소망이며, 세상에는 없는 우리 땅을 우리 힘으로 바다에서 건져내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이청준은 소설을 쓰기 전 이규태의 소개 편지를 들고 소록도 병원으로 조창원 원장을 만나러 갔다. ‘당신들의 천국’에는 ‘소록도의 반란’에서 차용한 부분이 있다. 예를 들어 12절에 나오는 축구 시합 장면은 ‘소록도의 반란’ 1장을, 단어를 바꾸고 문장을 손질해 옮겨놓은 것이다. 논픽션의 조창원, 이규태, 황시백은 소설에서 조백헌, 이정태, 황희백이 된다. 작가의 시선을 가장 많이 공유하는 보건과장 이상욱은 순수하게 창조된 인물이다. 그의 후일담이 궁금하다면, 소록도가 다시 등장하고, 또 다른 한센인 부모를 둔 미감아 정요선이 나오는 ‘신화를 삼킨 섬’을 읽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돌아오는 발길은 수탄장에서 다시 멈췄다. 종일 흩뿌리던 비가 거짓말처럼 그치고 하늘에서 빛나는 무지개가 수탄장으로 내려왔다. 무지개를 타고 온 신비한 기운이 햇살과 그림자가 어우러진 울창한 소나무 숲에 어렸다. 그러자 그쯤 어디에 현실과 꿈을 잇는 문,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이 하나 있을 법도 했다.
이윤옥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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