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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지식카페 게재 일자 : 2017년 09월 13일(水)
宮터에 세워진 르네상스 양식…‘영욕의 금융 100년史’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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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은행(오른쪽)과 신세계백화점 등이 자리 잡은 남대문로 전경. 일제강점기에는 식민 자본주의의 심장부 역할을 했던 곳이다. 안창모 제공

안창모의 도시 건축으로 보는 서울 - ⑦ 한국은행과 남대문로 은행가의 형성

조선이 개국한 이래로 종로에서 남대문에 이르는 길(남대문로)은 서울 최고의 번화가였다. 시대에 따라 남대문로의 성격이 바뀌기는 했지만, 오늘날에도 도심에서 남대문로 상권의 위상은 여전하다. 조선조 500여 년간 남대문로가 최고의 상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남대문로가 도성의 관문인 남대문에서 조선 상권의 중심인 육의전(六矣廛)이 위치한 종로까지 연결됐기 때문이다. 1897년 대한제국의 출범과 함께 경복궁에서 덕수궁 대한문 앞을 거쳐 남대문으로 연결되는 현재의 도로체계가 정비되면서 남대문로의 중요성이 약화됐지만 상업 거리로서 남대문로의 중요성에는 변함이 없다.

남대문로의 성격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긴 것은 일제강점기였다. 남산을 배경으로 식민지배체제를 구축한 일제는 남산의 북사면 자락에 위치한 총독부와 일인거류지를 배경으로 상권을 확대했고, 일본 상권은 현 충무로와 을지로 사이에 집중적으로 형성됐다. 이로 인해 을지로에서 충무로에 이르는 남대문로 구간이 빠르게 일제의 공권력과 일본 자본에 의해 잠식되었다. 일본세력 성장의 도심 내 거점은 조선은행(현 한국은행)과 일본영사관(현 신세계백화점과 SC제일은행 터)이었다.

남산의 총독부가 정치적 지배의 상징이라면, 조선은행은 식민지 조선경제 지배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은행을 중심으로 남대문로 변에는 각종 금융기관이 위치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조선은행 주변에는 경성우편국, 미쓰코시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조선상업은행과 조선저축은행(현 SC제일은행)이 모여, 식민자본주의의 심장부가 됐다.

▲  이탈리아 도시귀족의 저택을 연상시키는 한국은행(현 화폐박물관)의 중앙홀.
▲  SC제일은행 외관.

1912년 완공된 조선은행으로 시작된 경관의 변화는 1935년 조선저축은행이 건축되고, 1937년 로터리가 건설되면서 일제강점기 식민자본주의의 도시경관이 완성됐다. 6·25전쟁으로 파괴된 중앙우체국이 거듭 새로 지어진 것 외에는 한국은행과 SC제일은행 그리고 신세계백화점은 고전주의 건축의 면모를 유지하며 옛 경관을 유지하고 있다. 오늘은 한국은행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한국은행은 1909년 ‘한국은행 조례’에 의해 설립됐지만, 일제강점으로 식민지 중앙은행으로 전락했다. 한국은행이 설립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차현진의 ‘중앙은행 별곡’에 잘 설명돼 있다. 한국은행 설립 배경에는 대한제국의 운명을 가른 러일전쟁이 있다. 러일전쟁으로 한반도에서 힘의 우위를 점한 일본은 을사늑약을 강제한 후 한국에 통감부를 설치했다. 책임자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였다.

힘의 우위를 배경으로 경제를 장악하려던 당시 일본제일은행장 시부사와 에이이치(澁澤榮一)는 통감이었던 이토를 만나 중앙은행의 필요성을 이야기하고, 자신의 회사가 조선의 중앙은행이 되고자 했다. 그러나 시부사와의 계획은 이토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토가 새 중앙은행을 설립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토의 의지에 따라 시부사와의 계획은 무산되고, 시부사와가 추진하던 은행은 1912년 조선은행의 건축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지어진 조선은행은 조선시대 선조의 사위였던 ‘달성위’가 살던 집이었고, 1895년에는 선교사 윌리엄 스크랜턴이 교회를 지었던 곳이다. 스크랜턴은 1895년 정동에 있던 병원을 상동병원으로 통합한 후 현 남대문 상동교회 자리로 병원을 옮기고, 달성위궁(達成慰宮) 터를 매입하여 교회를 지었다. 1900년 상동병원이 세브란스병원과 통합된 후 상동병원 터에는 상동교회가 지어졌다. 그러나 스크랜턴이 1907년 친일파인 감리교 선교부의 메리먼 해리스 감독과의 불화 뒤 성공회로 옮긴 후, 스크랜턴의 어머니가 거처했던 교회 터(구 달성위궁)는 일본 제일은행에 매각됐고, 이곳에 구 한국은행(현 화폐박물관)이 지어졌다.

▲  1935년에 조선저축은행으로 지어진 SC제일은행의 영업장 내부.

한편 현 한국은행 터에는 또 다른 ‘궁’이 있었다. 달성위궁 북쪽의 저경궁(儲慶宮)이다. 저경궁은 인조가 즉위하기 전에 살았던 잠저다. 회현방 송현에 위치한 까닭에 송현궁으로 불렸으나 1755년 인조의 조모인 인빈김씨의 위패가 봉안된 후 저경궁이 되었다. 한국은행 공사가 시작된 후인 1908년 인빈의 위패가 육상궁으로 옮겨졌으며, 저경궁 건물은 1927년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가 건축되면서 철거되었다. 이곳에 현 한국은행 신본관이 지어졌다.

1912년 고전주의 건축양식의 한국은행은 일본의 1세대 건축가인 다쓰노 긴고(辰野金吾)의 설계로 지어졌다. 원형계단실 상부 지붕의 독특한 모습으로 인해 프랑스 성곽풍 르네상스건축으로 불리기도 한다. 외관상 2층 건물이지만, 내용적으로는 1층이다. 이는 내부공간 구성의 특이성 때문이다.

중앙에 위치한 돌출된 현관은 자동차의 접근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졌다. 이는 고위 관리가 자동차에서 내려, 곧바로 현관으로 진입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설계다. 현관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커다란 홀을 만나게 된다. 지금은 화폐박물관의 전시장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예전에는 은행 영업장으로 사용됐다. 그런데 홀의 한복판에 서서 주변을 돌아보면 주변의 풍경이 이채롭다.

2층 높이의 중앙홀은 반원형 아치로 둘러싸였는데, 이는 마치 이탈리아 도시귀족의 저택인 팔라초(Palazzo)의 중정을 연상시킨다. 2층에는 영업장을 내려다볼 수 있는 난간이 있다. 2층에 위치한 갤러리와 전시공간을 둘러본 후 중앙홀 주변의 회랑을 거닐며 중앙홀을 둘러보면 이 땅의 근대건축 어디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독특한 구 한국은행의 내부공간을 체험할 수 있다. 대리석으로 마감된 중앙홀에서 식민지 중앙은행에 공을 들인 일본의 저의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넓은 중앙홀의 채광은 벽체의 창호뿐 아니라 중앙홀의 천장에서도 가능하도록 설계됐다. 이러한 대공간의 구성은 1912년 한국은행 건축 당시의 건축기술을 잘 보여준다. 근대적 금융기관인 은행은 넓은 영업공간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넓은 공간은 동시에 높은 천장고를 필요로 하는데, 1910년 당시 일본에서는 대공간을 자유롭게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방법이 2층의 건물로 ‘□’자 중정을 만들고, 중정에 지붕을 씌우는 방법이었다.

이 방법으로 건물 중앙에 이탈리아 팔라초의 중정을 닮은 대공간이 마련됐고, 넓은 공간에도 불구하고 천창 채광을 통해 밝은 공간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간구성은 뚜렷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기둥이 없는 넓은 공간을 밝게 만들기 위해 천장에 채광창을 설치했기 때문에 중앙홀의 상부에는 건물을 올릴 수가 없다.

상부구조를 지탱할 기둥이 바닥에 없을 뿐 아니라, 상부에 건물을 얹을 경우 천창 채광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구 한국은행 본관이 2층으로 지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이러한 공간구성은 구 한국은행 건너편에 위치한 SC제일은행에서 극복된다.

1935년에 조선저축은행으로 지어진 SC제일은행은 철근콘크리트로 지어졌기에 높은 층고를 가진 넓은 영업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영업공간 위에 건물을 얹을 수 있었다. SC제일은행이 구 한국은행 본관 건물과 달리 4층으로 지어질 수 있었던 이유다.

SC제일은행은 외관에서도 구 한국은행 본관과 구별된다. 4개 층을 관통하는 4개의 자이언트 기둥으로 구성된 전면은 그리스풍의 고전주의건축에 기초하고 있지만 동시에 도시적 맥락에 대응하기 위해 건물 규모에 비해 과도하게 큰 기둥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바로크건축의 성격을 갖고 있다. SC제일은행의 전신인 조선저축은행은 한국산업은행의 전신인 조선식산은행의 저축업무를 떼어내어 설립된 은행이다. 식민지 국책은행이지만 민간을 대상으로 영업하는 저축은행의 성격을 반영하여 설계공모를 통해 건물이 지어진 것이 특징이다.

현재 종로네거리에서 남대문에 이르는 남대문로와 주변에는 SC제일은행 본점, 신한은행 본점, 국민은행 본점, 한국은행 본점, 우리은행 본점 등이 위치해 있다. 비록 을지로 입구의 산업은행이 여의도로 이사 갔지만, 한국은행을 시작으로 조성된 남대문로는 금융가의 명맥을 100년 넘게 유지하고 있다. 100여 년이 넘는 금융거리로서의 남대문로는 명동과 함께 식민지의 오욕과 경제개발의 중추적 역할 그리고 지하경제의 온상이라는 명암이 교차하는 가운데, 한류의 중심이 되고 있다.

한국경제의 성장은 금융가로서 남대문의 명성을 많이 퇴색시켰지만, 조선조 500년을 안고 세계도시로 성장한 서울의 역사 거리로서의 위상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그 중심에 위치한 한국은행의 명칭 변화에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09년 7월에 공포된 ‘한국은행조례’에 따라 1909년 11월 ‘한국은행’으로 설립됐다가 1911년 8월 15일에 시행된 ‘조선은행법’에 의해 ‘조선은행’이 되었고, 1950년 5월 공포된 ‘한국은행법’에 따라 오늘의 ‘한국은행’이 태어났다.

정치적 변화와 맥을 함께했을 ‘한국은행’이라는 이름의 생성과 소멸 시점이 미묘하게 정치적 사건과 맞물려 있다. 대한제국의 멸망으로 우리의 기억 속에서 지워져야 했던 ‘한국’이라는 국호를 마지막까지 사용했을 ‘한국은행’이 해방된 후 그 이름을 되찾았지만, 오늘날 일본이 세운 은행이라는 이유로 ‘한국은행’의 뿌리로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이 우리 앞에 있다.(문화일보 8월 23일자 28면 6 회 참조)

안창모 경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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