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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His Story 게재 일자 : 2017년 11월 22일(水)
“‘갱제’로 말하던 초짜가 ‘600만불 사나이’ 될 줄 누가 알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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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년간 다양한 인물의 목소리를 연기하며 시청자와 청취자를 울리고 웃겼던 성우 양지운 씨는 “나 스스로 만족할 만큼 최선을 다했고, 정말 행복했다”며 “웃으면서 떠나는 것 또한 행복하다”고 말했다. 김구철 기자
‘48년 성우인생’ 은퇴한 양지운

데뷔할 땐 라디오 전성시대
성우들 인기 직종으로 각광

서울 친구들에 표준말 배울땐
사투리 쓰는 사람과 말도 안해

‘제2공화국’으로 인기 끌면서
주요 배역들 꼬리물며 이어져

목소리 연기로 울고 웃긴 세월
박수칠 때 떠나는 게 좋다 생각

아버지·남편 노릇 못해 미안
가족과 함께하려 은퇴 결심

파킨슨병으로 고통스럽지만
이웃과 함께하며 열심히 생활


1969년 동양방송(TBC) 공채 5기 성우로 입사한 양지운(69) 씨는 지난 10월 30일 SBS ‘생활의 달인’ 녹음을 마지막으로 48년 성우인생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날 방송은 2007년 시작한 이 프로그램의 내레이션을 10년간 맡아온 양 씨의 505번째 녹음이었다. 양 씨는 이날 “웃으면서 이 길을 떠나는 것 또한 행복하다”며 “‘회자정리’라 언젠가는 또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은퇴 소감을 전한 뒤 제작진과 포옹한 후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반세기 긴 세월을 중후하면서도 경쾌한 목소리로 시청자와 청취자를 울리고 웃겼던 그와 추색(秋色)이 완연한 17일 경기 하남시청 옆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수년간 무지외반증(엄지발가락이 새끼발가락 쪽으로 기울어져 통증을 유발하는 질환)에 시달려왔고, 2015년에는 파킨슨병 초기 진단까지 받아 조금 불편한 걸음걸이로 약속장소에 나온 양지운 씨에게 “은퇴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느냐”는 말을 건넸다. 그는 손끝을 살짝 떨면서도 밝은 표정으로 자신의 근황을 전했다.

“여유 있고, 자유롭게 지내다 보니 시간이 빨리 가네요. 일에 대한 부담 없이 24시간을 제 마음대로 디자인한다는 게 굉장한 매력이에요. 게으름 피우며 늦잠을 자고, 이런저런 책도 읽으며 지내고 있어요. 알츠하이머병 때문에 5년간 요양원에 계시던 장모님의 병세가 심해져서 집으로 모시기 위해 얼마 전에 하남시 내 조금 큰 집으로 이사를 했어요. 이사를 하며 서재를 정리하다 보니 사다 놓고 손도 안 댄 책과 앞부분만 읽다가 그만둔 책이 많고, 버려야 할 책들도 꽤 있더라고요. 그거 정리하며 시간을 보냈고, 음식을 잘 못 드시는 장모님 식사도 도와드리며 하루를 보내요. 아내와도 많은 얘기를 나누고요.”

그는 오래전부터 은퇴를 계획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늦둥이 아들이 태어나며 뒤로 미뤘고, 3일 열린 ‘2017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시상식에서 대통령 표창을 받으며 결심을 굳혔다고 설명했다.

“박수 칠 때 떠나는 게 좋다는 생각을 했어요. 대통령 표창을 받으며 떠나는 게 타이밍이 좋잖아요(웃음). 사실 40대 때 ‘50이 되면 일을 끝내자’는 계획을 세웠고, 아내와도 그렇게 약속을 했어요. 성우로 살며 제 개인 생활은 전혀 못 했거든요. 주변 사람들이 설악산에 갔던 얘기를 하는데 저는 가본 적이 없더라고요. 설악산뿐 아니라 여행 자체를 가보지 못했어요. 그래서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 그만두기로 한 거죠. 근데 1992년에 막내아들이 태어났어요. 그 아이가 독립할 수 있는 나이까지는 일을 더 해야 되는데 계산해 보니 일흔까지 해야겠더라고요. 뭐 다른 방법이 없잖아요. 그래서 성우인생이 20년 연장됐죠. 그러던 중 양쪽 발에 무지외반증이 생겼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파킨슨병까지 얻어 고통스러웠어요. 파킨슨병은 고칠 방법이 없으니 운동 열심히 하고, 약물치료 하며 짊어지고 가야죠. 무지외반증은 수술을 받기로 했고요.”

그가 데뷔할 때는 라디오 전성시대로 성우가 인기직종이었다. 그에게 “어느 정도였느냐”고 묻자 그는 엄지를 들어 보이며 입사시험 보던 때를 회상했다.

“최고였죠. 지금이야 여러 분야의 연예인들이 왕성한 활동을 펼치지만 그때는 김승호, 허장강, 신성일 등 영화배우들과 몇몇 탤런트들밖에 없었으니까요. 성우의 인기가 대단했어요. 당시 고은정, 구민, 이창환, 주상현, 유기현 이런 분들이 인기 성우였죠. 웬만한 집엔 라디오가 없어서 연속극 나올 때면 삼삼오오 모여 들으며 울고 웃고 했어요. 그래서 저도 성우 시험을 봤고요. 25명 뽑는데 1500명이 왔어요. 저처럼 라디오를 들으며 꿈을 키운 사람들이 너도나도 응시한 거죠. 시험은 드라마 대본을 읽고 즉흥 연기를 하는 거였어요. 또 내레이션도 하게 하고, 인물도 그리게 하며 목소리와 연기력을 검증한 거예요.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고등학교에서 방송반 활동을 했지만 큰 스튜디오 마이크 앞에 서니 얼이 빠졌죠.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떤 연기를 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다행히 3차까지 합격을 했어요.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죠. ‘삼성맨’이 됐으니까요(웃음).”

그렇게 성우의 길로 들어섰지만 2년 동안 ‘소음부대’로 불리는 엑스트라 역할만 맡아야 했고, 퇴출의 불안감에 시달려야 했다.

“영화 보조출연자들은 의상도 주고, 분장도 해주지만 엑스트라 성우는 스튜디오 구석에 서서 웅성거리는 역할만 하는 거예요. 배경 소음을 담당하는 거죠. 그래서 ‘소음부대’라고 불렀어요(웃음). 그것도 잘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어요. 6개월마다 능력 발휘를 못 해 사용가치가 없는 신입들을 퇴출시켰거든요. 시장바닥이 배경이면 ‘멸치 사세요’ ‘뻥이오’ 등 왁자지껄한 소리를 내야 했고, 술집이면 주정을 부려야 했고, 고급 레스토랑이면 거기에 맞게 적당한 말을 해야 했어요. 근데 튀면 안 돼요. 혼자 웃거나 분위기에 안 맞는 소음을 내면 바로 불벼락이 떨어지죠. 저도 야단 많이 맞았어요. 연출자에게 혼나고, 선배한테 깨지고, 그래도 재미있었어요.”

그러다가 정치드라마 ‘광복 20년-제2공화국’에서 처음으로 주요 배역을 맡아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핸디캡’으로 여겼던 경상도 사투리가 배역을 맡는 데 도움이 됐다.

“제가 경남 통영 출신이라 사투리를 심하게 썼어요. 엑스트라 때는 ‘네, 갑니다’ ‘알겠습니다’ 이 정도 대사만 하면 돼서 별 상관이 없었지만 대사가 많은 배역은 맡을 수 없었죠. 저는 ‘경제’라고 분명하게 발음해도 다른 사람은 ‘갱제’로 들으니까요(웃음). 아마 전국 사투리 중 경상도 사투리가 가장 고치기 힘들 거예요. 그런데 ‘제2공화국’에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인물이 등장해 제게 기회가 왔어요. 담당 PD가 고민을 하다가 제게 그 배역을 맡겼죠. 이승만 대통령 저격 음모 사건의 주범인 김시현 역이었어요. 돈키호테 같은 경상도 사람인데 저는 따로 연습할 필요 없이 리얼하게 사투리를 구사했죠. 당시 TBC는 경상도와 전라도, 중부지방 등에서 방송이 됐는데 이 드라마가 경상도에서 뜨거운 반응이 나왔어요. 그 덕에 방송이 두 달 연장됐고, 저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죠. 그때부터 일이 많아졌어요. ‘이때다’ 싶어 기회를 잡기 위해 표준말을 열심히 연습했어요. 경상도 사투리 쓰는 사람들과는 아예 말을 안 섞었죠(웃음). 서울 친구들 밥 사주며 음악 공부하듯 표준말을 익혔어요. 말을 시켜놓고, 듣다가 따라 하는 방식이죠. 그렇게 사투리를 극복하니 주요 배역이 들어오기 시작하더라고요. 경상도 사투리에 표준말까지 되는 데다 목소리도 괜찮다고 소문이 나 일이 많아졌어요.”

그를 인기 성우 반열에 올려놓은 작품은 1976년 TBC에서 방영된 ‘600만불의 사나이’다. 그는 이 드라마의 주인공인 스티브 오스틴(리 메이저스) 역을 맡아 스타로 떠올랐다.

“리 메이저스가 제게 밥을 사야 해요. 제 목소리를 통해 한국에서 스타가 됐으니까요(웃음). 그 드라마가 아이들 다리를 많이 부러뜨렸죠. 전자 장치로 만들어진 두 다리로 빠르게 달리고, 건물 위로도 훌쩍 뛰어오르는 인물이잖아요. 한쪽 팔의 힘도 세서 자동차도 번쩍 들어 올리고요. 또 한쪽 눈은 줌으로 멀리 있는 물체도 당겨서 보죠. 아이들이 이 드라마 보고 많이 따라 했어요. 어느 날 점심 먹고 방송국으로 들어가는데 입구에 한 아주머니가 저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저를 보고 피식 웃더니 ‘내가 주책 맞은 얘기를 할 건데 들어달라’며 ‘600만불의 사나이’ 팬인 그 집 아들이 스티브 오스틴 흉내 낸다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다가 다리를 다쳤다고 얘기하더라고요. 그러면서 그 장면을 안 나오게 해달라는 부탁도 했고요. 그래서 담당 PD와 의논해 뛰어오르거나 높은 데서 내려오는 장면 전체를 보여주지 않기로 결정했어요. 뛰려는 모습만 보여주고, 중간을 자른 후 착지 장면으로 연결하는 거죠. 지금이야 컴퓨터로 작업하면 되지만 당시에는 필름을 잘라 붙여야 하는 힘든 작업이었어요.”

이후 TBC 2기 선배인 배한성 씨와 함께 형사물 ‘스타스키와 허치’의 녹음을 했고, 할리우드 배우 해리슨 포드와 로버트 드 니로, 멜 깁슨의 목소리 연기를 도맡아 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배 선배와는 연습을 따로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호흡이 척척 맞았어요. 그분이 맡은 스타스키가 옆에서 ‘쿵’ 하면 허치인 제가 ‘딱’ 하고 바로 맞췄죠. 배 선배가 제 은퇴 소식을 기사를 통해 봤다고 연락을 하셨어요. ‘왜 얘기 안 했느냐’고 하시길래 ‘요란하게 할 게 뭐 있느냐’고 말했어요. 할리우드 영화를 더빙할 때는 여러 번 봤어요. 배우들과 호흡을 맞추는 작업이 필요하거든요. 단순히 입 모양에 맞춰 말을 입히는 게 아니고, 그들의 눈빛과 표정 등을 보며 함께 연기한다는 생각으로 했어요. 멜 깁슨이 100% 했다면 저는 120% 해줘야 시청자들에게 감정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어요.”

그에게 “지난날을 돌아보면 후회되는 일이 있느냐”는 질문을 던지자 “직업과 관련해서는 전혀 후회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성우로 살아오며 정말 행복했어요.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하면 교만해 보일 수도 있지만 제 스스로 만족할 만큼 최선을 다했어요. 어떤 작품을 만나든 제가 감동할 수 있도록 노력했죠. 그런 마음으로 50년을 살아왔어요. 자연인으로는 아버지 노릇을 잘 못한 게 후회돼요. 가장으로서 생활비를 벌고, 가족부양의 책임은 다했지만 3남 2녀의 자식들이 자라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지 못했죠. 아내도 훌륭한 성우였는데 저 때문에 희생을 한 거예요. 아내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미안해요.”

그는 “아직도 할 일이 많다”며 앞으로의 계획을 소개했다.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요즘 정말 바빠요. 여호와의 증인 신자로 아픔을 겪는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고 있어요. 성서 계몽활동이죠. 부부간의 문제로 가정이 위기에 처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해결할 길을 함께 알아봐 주는 가이드 역할이에요. 제 나이가 70이니 앞으로 20년 정도 더 할 수 있겠죠. 그때까지 사람들을 만나러 다닐 수 있는 건강과 말을 할 수 있는 정신이 유지되면 정말 감사하죠.”

인터뷰 = 김구철 부장(문화부) kckim@munhwa.com
e-mail 김구철 기자 / 문화부 / 부장 김구철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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