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달 26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제이액터스에서 시니어모델 소은영(왼쪽) 씨와 천황성 씨가 런웨이를 걷고 있다. 이 학원 수강생 평균 나이는 60대 중·후반, 최고령은 73세다. 수강생들은 한목소리로 “모델 교육을 받고 나서 삶의 질이 나아졌다”고 말했다. 김낙중 기자 sanjoong@
시니어모델 소은영·천황성 씨
‘최고령 모델’ 73세 소은영 씨
어릴적 영화배우 꿈, 엄격한 집안 탓에 접어
2016년 모델수업 접하며 새로운 삶에 도전
“나이가 가장 많다는 말에 그만둘까 고민도”
지난해 ‘서울패션위크’서 당당하게 캣워크
‘굴곡 인생’ 61세 천황성 씨
육군장교 예편 무역·요식업 등 다양한 삶
어렸을 적 ‘맵시난다’칭찬에 잠재된 열망
아내 반대 탓 비밀수업 받으며 ‘인생 2막’
“남편 멋있다는 말에 이젠 든든한 조력자”
지난달 26일 오후 서울 지하철 3호선 남부터미널역 인근 한 빌딩 지하 1층. 어림잡아 330㎡(약 100평) 넓이의 공간에는 모델들이 길을 걷는 런웨이(Runway·패션쇼를 할 때 모델들이 관객에게 옷을 선보이기 위하여 걸어가는 길)가 설치돼 있었다. 사진기자가 다양한 포즈를 주문하자 남성 모델 천황성(61·서울 중랑구 상봉동) 씨와 여성 모델 소은영(73·서울 종로구 평창동) 씨는 익숙하다는 듯 손을 잡고 런웨이를 걸었다. 홀로 런웨이를 걸을 때도 절도 있는 걸음으로 카리스마 있게, 때로는 우아하면서도 도도하게 ‘캣워크’(모델의 걸음걸이)를 선보였다. 이들의 모델경력은 2년 남짓. 무대 옆 벽면에는 ‘열정이 없는 자! 집으로 돌아가라’라는 문구가 걸려 있었다.
50~70대 모델들이 제2의 인생을 꽃피우는 이곳은 2014년 설립된 시니어모델 전문육성학원인 ‘제이액터스’. 매달 소정의 수강료를 받고 고령 세대에게 모델 강습을 한다.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70여 명 교육생의 나이는 평균 60세 중·후반이다. 공무원·사업가·직장인 등 출신도 다양하다. 그중 육군 장교 출신인 천황성 씨는 남자 모델 중 가장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시니어모델 중 한 명이다.
천 씨는 롤러코스터처럼 굴곡진 인생을 살았다. 최전방에서 육군 장교로 근무하다 예편한 뒤 다양한 사업을 시도했던 그는 여느 가장들처럼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때 직격탄을 맞고 큰 시련을 겪었다. 천 씨는 “당시 목재를 수입해 판매했는데, 1998년 IMF 사태 여파로 목재 한 장 가격이 8000원에서 2만4000원으로 폭등하면서 더는 사업을 지탱할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며 “이후 재기를 꿈꾸고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사업도 진행했지만, 쓰나미와 폭탄 테러 여파로 그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고 회상했다. 이후 요식업과 무역업 등 다양한 사업을 통해 자신을 하얗게 불태운 천 씨는 은퇴 후 뭔가 허전한 마음에 사로잡혔다. 이대로 시간을 축낼 수 없다고 다짐한 그는 무작정 서울 광화문과 압구정동 일대를 배회하기 시작했다.
“어느 책에서 영국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 ‘우물쭈물하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라는 것을 읽었는데, 그 글귀는 나의 폐부 깊숙이 박혀 심장을 울렁이게 했습니다. 나를 가슴 뛰게 하는 일은 무엇일까? 화려한 조명과 리듬에 맞춰 관객들 앞에서 멋진 포즈를 취하는 모델이 제일 먼저 떠올랐습니다. 어쩌면 청소년기부터 줄곧 ‘옷맵시 난다’는 칭찬을 받아 온 터라 내 안에 막연히 잠재된 열망이 그 순간 터진 듯합니다. 생각을 바로 행동으로 옮겼죠. 당시 모델이 되는 길을 몰라 무작정 캐스팅이 잘 된다는 광화문과 압구정동 일대를 나가 배회했던 겁니다.”
결국 수소문 끝에 제이액터스를 찾은 천 씨는 전직 모델 겸 배우 출신인 정경훈(44) 대표의 말을 듣고 자신감을 얻었다.
“학원 등록을 하기 전 가장 망설인 부분은 바로 신체조건이었습니다. 누구나 신체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당시 정 대표는 제게 ‘모델 캐릭터는 매우 다양하다. 열심히 배우고 기량을 닦다 보면 자신이 가진 장점을 최대한 잘 표현하고 표출할 수 있다. 신체조건은 필수가 아니다’라고 조언해 줬습니다. 제가 활동할 수 있게 해준 고마운 사람입니다.”
모델 수업을 받는 데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은 다름 아닌 가족이었다. 가족의 반대가 예상됐던 터라 천 씨는 오랜 기간 비밀리에 매주 한 번씩 수업을 받았다. 그러다 그의 ‘소소한 일탈’은 방송을 통해 들통이 났다.
“처음 아내는 크게 반대했습니다. 젊은 나이도 아니고 나이 들어 모델 일을 하는 게 무슨 비전이 있느냐며 볼멘소리를 하더군요. 들통이 난 이후 주변에서 ‘남편 멋있다’라는 반응이 나오면서 지금은 저의 든든한 조력자가 됐어요.”
시니어모델 중 최고령인 소은영 씨는 소싯적 영화배우를 꿈꿨지만, 엄격한 집안 분위기 탓에 ‘끼’를 감추고 남편을 내조하며 지난 몇십 년을 보냈다. 그러던 중 2016년 시니어 모델 수업을 접하면서 새로운 삶이 시작됐다. 소 씨는 “수강생 중 나이가 제일 많아 수업을 들을지 말지 고민을 많이 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했던가, 소 씨는 수강생 중 가장 열정적으로 모델 수업에 참여했다. 더 많이 배우고 싶다는 욕심에 백화점에서 하는 시니어모델 클래스도 추가로 수강했다.
“솔직히 제 나이에 이렇게 열정적인 사람이 없을 것 같아요. 좋아하는 일을 해 즐거우면서도 마음이 밝아지고 젊어지는 느낌이 들어요.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시니어모델이 목표입니다. 기회가 되면 해외진출도 도전해보고 싶고요.”
무엇보다도 모델 활동을 하면서 되찾게 된 건강이 가장 큰 수확이다. 시니어모델들은 이구동성으로 모델의 기본은 ‘올바른 자세’를 배우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통해 구부정한 자세를 바로잡고 덩달아 활력을 찾는 일거양득의 기회가 되고 있다고 소개했다. 시니어모델들은 단순히 취미에 그치지 않고 유명 패션쇼에도 참가하고 있다. 일례로 소 씨는 지난해 열린 ‘서울패션위크’에서 디자이너 박종철 씨의 옷을 입고 당당히 캣워크를 선보여 찬사를 받았다.
시니어모델들은 제대로 된 교육기관을 찾는 게 매우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현재 수업을 받는 시니어모델들은 수업료만 내고 모두 자신의 의상으로 최대한 멋있게 연출해 런웨이를 수놓고 있다. 한 시니어모델은 “다른 곳에서 모델 수업을 받으려 했더니 고가의 의상 구매를 강요받았다”며 “노인을 상대로 잘못된 상술을 펼치는 곳이 있기에 잘 알아보고 수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 번 사는 인생 멋있게 살자고 외친 시니어모델들은 ‘인생 2막’을 꿈꾸는 노년층에게 “용기를 내라”고 응원했다. 인터뷰에 참여한 시니어모델들은 “머뭇거리지 말고 정말 자기를 위해 도전하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며 “나이를 먹었으니 안 된다고 생각하지 말고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도전했으면 좋겠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당신이 어둡고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면 당신에게는 어둡고 부정적인 일만 일어날 것”이라며 “당신이 긍정적으로 가슴 뛰는 일을 해야 비로소 행복한 노후를 맞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
이해완 기자 paras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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