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태조의 오른쪽 눈썹 위에 작은 혹(화살표)이 보인다. 신화화하기 마련인 개국 군주의 얼굴을 그리면서 저런 흠집을 남기려면, 태조가 동의하지 않고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국보 제317호 ‘태조 어진’부분. 전주 경기전 소장. 자료사진
- 초상화, 그려진 선비정신 / 이성낙 지음 / 눌와
‘한가닥 털도 달리 그리면 안돼’
조선 대대로 전해 내려온 원칙
‘꾸밈없이 정교한 작품’ 만들어
피부과 전문의 저자 상세분석
268점서 피부병변 20種 발견
당대 질병역학연구에 큰 도움
홍진 딸기코는 콧병 앓은 증거
오명항, 천연두 흉터에 肝경변
송창명‘백반증’의미있는 기록
조선 건국 초인 14세기 말에 그려지고 1872년의 모사본으로 남아 있는 태조 이성계의 어진(御眞·왕의 초상화)에는 오른쪽 눈썹 위에 작은 혹이 보인다. 0.7∼0.8㎝의 사마귀다. 개국 군주의 어진을 그리는 일은 건국 초기에 최고의 국사(國事) 중 하나였다. 이마의 혹까지 표현한 것은 임금은 물론 감독관, 화가 자신까지 별다른 이의가 없었기에 가능했다. 여러 차례 모사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시기부터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라는 조선 시대 초상화의 제작 원칙이 확립돼 있었다는 걸 말해준다. 실제 숙종 14년(1688) ‘승정원일기’에는 왕과 신하들이 태조의 영정을 봉안하는 문제를 논하는 와중에 “한 가닥의 털(一毛), 한 올의 머리카락(一髮)이라도 달리 그리면 안 된다”는 초상화 제작 지침이 언급된다.
미술사학자 이태호는 “조선 시대는 초상화의 시대”라고 규정했다. 그만큼 한국미술사에서 가장 많은 초상화가 그려졌고 예술성 높은 명작들이 쏟아져 나왔다. 국내 박물관들은 조선 시대 초상화 전시를 자주 열며, 관련 도록이나 연구서도 적지 않다. 조선 초상화는 중국과 일본, 서구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특징이 있는데, ‘꾸밈없이 정교하게’ 그려졌다는 점이다.
이 책의 저자는 독일에서 의학박사와 피부과 전문의·교수 자격을 취득했으며 아주대 의대 초대학장을 지낸 이성낙(80) 박사다. 그는 조선 초상화의 이런 특징에 기대어 관심을 두고 연구하다 1982년 독일 피부과학 전문학술지에 ‘역사적 초상화에 나타난 백반증’이란 논문을 발표했고, 국내 미술전문지에 ‘조선 시대 초상화에 나타난 피부 증상’을 연재해 큰 관심을 모았다. 저자는 현직에서 물러난 뒤, 그동안 모아온 관련 자료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등 지인들이 ‘대학원에 입학해 학위논문으로 정리해 보라’는 권유를 받고 일흔이 넘어 명지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박사과정을 밟아 미술 분야에서도 박사학위를 받았다. 의학은 물론 미술에도 일가견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지만, 그 열정은 혀를 내두를 만하다. 박사학위 논문을 대중적으로 펴낸 이 책은 초상화에 나타난 피부병변을 통해 당대 유행한 질환뿐 아니라 선비들의 철학과 시대정신까지 진단한다.
저자는 진단의 공정성을 높이기 위해 피부과학 전문가인 연세대 방동식 교수, 아주대 이은소 교수와 함께 519점의 초상화 중 보존상태가 양호한 368점을 대상으로 임상 진단해 무려 4분의 3에 달하는 268점에서 20종의 피부병변을 밝혀냈다. 점(후천성멜라닌세포모반점) 113점, 검버섯(노인성 흑색점) 85점, 천연두 흉터 73점, 지루각화증 37점 등 지금도 흔한 피부병변이었다. 천연두 흉터가 많은 것은 조선 시대에 천연두가 얼마나 창궐했는지를 보여주며, 흑색황달이 9점이나 관찰된 것도 만성간질환 환자가 지금보다 많았다고 추정하게 하는 등 당대 질병역학(疾病疫學) 연구에도 도움이 될 만하다.
예컨대,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보필했던 홍진(洪進)의 초상은 코가 유난히 비대하게 부풀어 오른 모습으로 그려졌다. 흔히 ‘딸기코’로 부르는 비류(鼻瘤)를 앓았다는 걸 보여준다. 선조실록에도 홍진이 왕에게 콧병이 심하니 벼슬에서 물러나게 해달라는 청을 올리지만 거절당하는 기록이 있다. 조선 후기 숙종∼영조대의 문신 오명항(吳命恒)의 초상은 온통 천연두 흉터로 덮여 있을 뿐 아니라 얼굴빛이 아주 검다. 간경변증의 말기 증상인 흑색황달이다. 그런데 같은 해 그려진 다른 초상은 피부색에 황달 증상은 보이지만 검지는 않다. 간경변 증상이 악화하는 과정을 담은 것이다. 영조 때 문신 송창명(宋昌明)의 초상은 지금도 고치기 어려울뿐더러 외모상 큰 고통을 주는 백반증(白班症)을 보여준다. 저자가 독일 피부과학 전문학술지 논문에 소개하면서 ‘송창명 초상’은 백반증에 관한 세계 최초의 그림 기록으로 세계 유수의 의학 학술지에 인용됐다.
서양에서 왕족, 귀족, 성직자, 전쟁 영웅 같은 인물들을 그린 초상화는 수없이 많지만, 업적과 공로를 드러내기 위해 미화하는 과시성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고, 피부병변 같은 오점은 묻혔다. 르네상스 이후 진정한 의미의 초상화가 등장하고, 19세기 미술사의 사실주의도 유행했지만 피부병변 등까지 묘사한 초상은 드물고 그 세밀함에서도 조선의 초상화에 미치지 못한다고 저자는 평가한다. 중국 역시 과시와 과장, 일본은 정형화돼 있어 조선의 초상과 비교 대상이 안 된다.
‘있는 그대로’ 그려진 조선 초상화의 바탕에는 물론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남겨 효를 실천하려는 유교 사상이 깔려 있다. 여기에 더해 저자는 “숨기고 싶었을 자기의 흠집이 그대로 그려진 건 초상의 주인공이 담담하게 묵인, 동의한 결과이기도 하다”며 “조선 선비들의 정직함, 바로 선비정신의 발현이다”라고 말한다. 224쪽, 1만8000원.
엄주엽 선임기자 ejyeob@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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