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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지식카페 게재 일자 : 2018년 04월 10일(火)
독특한 색채와 풍자… 탐미주의로 일군 ‘조선회화 革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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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하정인, 종이에 채색, 28.2×35.8㎝, 18세기. 간송미술관
▲  연소답청, 종이에 채색, 28.2×35.8㎝, 18세기. 간송미술관

■ 전준엽이 만난 한국의 美感 - ⑤신윤복의 독창적 畵風과 천재성

도화서서 쫓겨난 기록 있을뿐
행적 수수께끼 속에 묻힌 화가
蕙園 연구 현대에도 초보 수준

색상 사용 천하게 여기던 시대
탁월한 색채 운용 능력 드러내
일상 스냅사진 찍듯 한 장면에

내용 면에서도 파격적인 시도
서양 인상주의보다 50년 빨리
저잣거리·기생집 등 소재 삼아

남녀 애정행각 과감하게 그려
대부분 사대부와 기생들 유희
에로티시즘·풍자 진수 보여줘


역사는 말한다. 이념이 번성하는 시대의 예술은 피폐하다고. 파시즘과 나치즘, 마르크시즘 광풍이 몰아친 20세기 유럽과 아시아 지역에서 예술은 이념의 나팔수였다. 이런 시대는 예술가에게 투사적 삶을 요구한다. 그러나 예술가는 투사가 아니다. 지난 세기 우리는 이념의 이름으로 예술의 본 모습을 왜곡시켜 왔다. 그런 시절을 견뎌야 했던 윤동주는 지사적 삶을 실천하지 못하는 자신이 밉다고 노래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살고 싶었던 그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여린 감성의 시인이었지만 오늘의 한국은 그를 ‘민족시인’으로 부른다. 이념 전쟁으로 전후 피폐했던 시대에 감성의 불씨를 지폈던 모더니스트 박인환은 ‘감상주의 시인’으로 역사 속에 묻혔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받느니보다 행복하다’며 에메랄드빛 하늘이 보이는 우체국 창문 앞에서 연인에게 편지를 썼던 순정주의자 유치환은 ‘이념의 표시 대’를 높이 치켜드는 ‘깃발’의 시인으로 더 유명해져 있다.

시인이자 소설가 이응준은 ‘모더니스트 김수영은 이 해괴망측한 한국에서 정치적으로 오용되고 악용돼 모욕받아왔다. 그는 정치 투사가 아니었고 그의 문학은 자유였지 정치 이데올로기가 아니다’라며, ‘혁명이란 그것이 천금의 값어치를 지닌 것일지라도 인간과 세상의 환희 속에서 금방 상해버리기 쉬운 생선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한국문학사의 유일한 진보지식인’이라고 우리가 현재까지도 범하고 있는 오류에 일침을 가한다.

조선시대에도 그랬다. 이념이 번성했고 실천은 미약했다. 백성이 근본이고, 사람이 먼저이며 하늘이라고까지 치켜세웠지만, 그런 세상은 오지 않았다. 유학 이념 논쟁이 통치 철학으로 500여 년을 관통하는 동안 인간의 솔직한 감정 표현은 말라버렸고, 예술은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그런 이념의 표시 대 꼭대기에 감성의 깃발을 매단 이가 혜원 신윤복이다. 그는 우리가 지녔던 탐미적 미감을 불러내 조선 회화의 혁명을 일궜다. 그래서 혜원 회화는 당대 이념에서는 이단이었다.

그런 이유에선지 혜원에 대한 연구는 당대는 물론이고 현재에도 미흡하다. 기록이 거의 없어 수수께끼 속에 묻혀 있다. 신윤복 정도의 솜씨를 지녔으면 그의 활약상이 한 번쯤 있을 법도 한데, 당시 어느 문헌에도 그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단지 구한말 서예가 오세창이 정리한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1928년 간행된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에 정조 초상을 그리는 일에 김홍도와 함께 참여했던 화원 신한평의 아들로 1758년에 태어났고, 도화서 화원이 돼 첨절제사라는 벼슬을 지냈으며, 속화를 그렸다가 도화서에서 쫓겨났다는 기록이 전할 뿐이다.

뛰어난 예술가의 빈약한 역사적 사실에는 상상력이 비집고 들어갈 틈새가 그만큼 크다. 그래서일까. 혜원을 여자로 만든 한 작가(이정명 작 ‘바람의 화원’ 2007년)의 발칙한 상상력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어느 전문가는 ‘상상력의 소산이라고 얘기하기도 낯부끄러울 만큼 말도 안 되는 설정’이라고 비판했지만, 영화와 TV드라마로 제작되면서 혜원의 대중적 인지도를 높이는 긍정적 효과를 낳았다.

이처럼 상상력은 논쟁이 되고, 논쟁은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기 위한 노력으로 번진다. 노력의 결과가 증명되면 역사에 새로운 사실이 추가되고, 그만큼 세상은 넓어진다.

그래서 신윤복이 정말 여자였다면 얼마나 통쾌할까 하고 상상해본다. 서슬 퍼런 유교 사회 질서에 대한 엄청난 예외 규정이 역사에 첨가될 것이다. 여성의 예술적 재능에 대한 편견도 여지없이 무너져 내릴 것이다. 우리는 조선 역사 속에서 이런 가능성을 보면서도 놓치고 있다. 허난설헌이나 신사임당의 예술성을 심도 있게 연구하고 평가하지 않는 것이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신윤복 성 정체성의 유쾌한 상상을 제쳐 두고 보더라도 그의 예술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초보 수준에 불과하다. 혜원의 예술은 기법과 내용 면에서 당시 사회 가치의 파격이라 할 수 있다. 화가를 천대했던 조선시대에 그림으로 삶을 꾸렸다는 것 자체가 놀랍다. 더구나 색채 쓰는 것을 지극히 속되고 비천하게 여긴 당시 정서에서 놀라운 색채 감각을 확립했다는 것에서도 그의 예술적 신념을 읽을 수 있다. 조선시대를 통틀어도 혜원만큼 색채 운용에 탁월한 재능을 보여준 화가는 찾아볼 수 없다.

화면 구성에서도 서양미술에서는 100년 후 인상주의자들이 담아냈던 일상성을 솜씨 좋게 다루었다. 평범한 인물들의 일상사를 배경과 함께 스냅 사진처럼 한 장면에 담아낼 줄 알았던 천재적 조형 감각이 빛난다.

그림 내용도 당시엔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을 세련된 형식으로 끌어올려 풍자와 에로티시즘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거기에 시적 서정성까지 더했으니 맛깔스러운 그림이 될 수밖에. 그러나 무엇보다도 혜원 그림에서 가장 두드러진 점은 고급스러운 우리 미감을 보여주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한국미술사 최고 탐미주의자라 칭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  미인도, 비단에 채색,114.2×45.7㎝, 18세기. 간송미술관


그러면 혜원의 천재성을 확인해 보자.

그리 크지 않고 갸름한 눈, 높지 않은 작은 코, 조그맣고 얇은 입술, 반듯한 이마, 통통하고 둥근 얼굴, 좁은 어깨, 7등신 몸매. 지금 여러분은 200여 년 전 우리나라 미인을 보고 있다. 오늘날 길거리에서 마주친다면 그다지 눈길이 가지 않을 평범한 모습이다. 혜원 그림 중 가장 많이 알려진 ‘미인도’다. 서양 취향으로 다듬어진 오늘날 미인의 기준으로 본다면 ‘보통녀’라고 제목을 바꾸어야 할 판이다. 하지만 이 그림의 미인은 순수한 우리 미감이다.

스무 살도 되지 않을 듯한 앳된 얼굴의 이 여인은 당시 유행의 첨단을 달리는 치장을 했다. ‘트레머리’로 불리는 가발 크기도 적당하고, 옅은 화장의 얼굴에서는 청순함이 보인다.

꼭 끼는 저고리는 지금 입는다 해도 디자인에서 결코 뒤지지 않을 듯이 세련돼 보인다. 동정 옆과 겨드랑이 부분의 검은색, 자색이나 노리개의 청홍색이 아기자기하게 어우러져 있다.

폭 좁은 소매와 짧은 저고리 선이 매혹적으로 보인다. 그에 비해 유려한 선으로 처리한 치마는 풍성하고 여유 있는 멋을 풍긴다. 배꼽티처럼 짧고 착 달라붙는 저고리에 풍성한 항아리 모양의 긴 치마는 200년 전에 유행했던 아방가르드 패션인 것이다. 다소곳이 숙인 얼굴에 왼쪽 발을 살짝 내밀고 약간 비껴 선 포즈를 선택한 혜원의 섬세한 구성이 놀랍다. 고요함 속에 작은 움직임으로 생동감을 주기 때문이다.

혜원은 조선시대 연인들의 사랑도 실감나게 보여준다. ‘月下情人/달빛 속의 연인’이라는 낭만적인 제목의 그림은 화제도 혜원답다.

‘달은 기울어 한밤중인데 두 사람 마음은 두 사람만이 알뿐(月沈沈夜三更 兩人心事兩人知)’.

두 사람 사이에만 통하는 마음, 사랑의 감정일 게다. 그런데 어스름 달빛 속에 숨어 있는 사랑이다. 사랑은 그만큼 은밀해야 제격이겠지. 도덕을 국가 기본 이념으로 삼고 윤리 서슬로써 나라를 운영해왔던 조선시대 남녀의 사랑은 이처럼 내밀해야만 실감이 났을 게다.

혜원이 즐겨 다룬 주제는 요즘으로 치면 대중문화다. 당시 도회지 저잣거리 인물들의 다양한 모습을 그림에 담았다. 그래서 유희 문화의 장면이나 기생집 등이 주요 소재로 등장한다. 이런 시도는 서양의 인상주의 미술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혜원이 50년 이상 먼저 그려냈다는 점이 예사롭지 않다.

그는 특히 남녀의 사랑을 과감하고 솔직하게 표현하는 데 능했다. 노골적이기까지 하다. 표현 대상은 대부분 사대부와 기생들의 유희적 이미지들이다. 일종의 사회풍자인 셈이다.

그런데 이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서는 퇴폐적 분위기가 보이지 않는다. 애절하다. 여염집 뒤뜰, 후미진 담장 아래 야심한 시각에 만난 여인들의 표정에는 사랑의 갈증이 담겨있는 듯하다. 사내는 안타까운 눈으로 여인을 바라보며, 차마 입으로는 전할 수 없는 가슴속 말을 하려는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마음을 담은 절절한 사연이겠지. 그 심정을 눈치챈 여인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감추려는 듯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두 사람 심정은 사내가 들고 있는 초롱의 과장된 붉은색으로 표현했다.

봄 이미지로 젊은이의 사랑놀음도 그렸다. 지금으로 치면 홍대 거리를 누비는 신세대의 사랑 풍속을 담은 ‘年少踏靑/청춘의 봄나들이’다. 기녀와 한량들이 상춘 놀이를 위해 약속 장소로 모이는 장면을 그렸다. 이미 당도한 한 쌍은 장죽에 담배까지 피우는 여유를 즐긴다. 그 뒤 막 도착한 커플의 표정이 재미있다. 아마도 기녀가 파트너에게 담배 한 대 청한 모양이다. 한량은 두 손으로 공손히 장죽을 바치고 있다. 기녀가 겸연쩍은 듯 머리를 매만지며 어색하게 웃는다.

이 광경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며 걸어오는 한량은 짝이 없다. 행색도 다소 처지고 얼굴도 꽃미남과가 아니다. 맨 앞 한량의 하인으로 보인다. 주인이 자신의 초립까지 쓰고 기녀의 말몰이꾼(지금으로 치면 자가용 기사) 흉내를 내는 장난을 친 것이다. 감히 양반의 갓을 쓰지는 못하고 들고 오고 있다.

화면 아래쪽 부리나케 달려오는 한 쌍은 봄바람에 옷이 나부껴 역동적이다. 기녀는 쓰개치마에 말몰이 시종까지 부리는 모양새가 예사롭지 않다. 파트너가 대갓집 외동아들쯤 되는 품이다.

이 그림으로 우리는 18세기 젊은 세대의 개방적 유희 문화를 들여다볼 수 있다. 정분나기 좋은 봄날, 젊음의 쌍쌍파티는 생각만으로도 핑크빛이다. 이런 주제가 혜원의 단골 메뉴였다. 그래서 그는 조선시대 회화의 이단아로 통한다. (문화일보 3월 13일자 23면 4회 참조)

전준엽 화가·미술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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