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간 숲을 관찰하다… ‘인생 2막’을 발견하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영국 고생물학자 리처드 포티가 은퇴 이후 사들인, 런던 교외의 너도밤나무 숲에서 변화하는 숲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소소의 책 제공

- 나무에서 숲을 보다 / 리처드 포티 지음, 조은영 옮김 / 소소의책

런던자연사박물관 은퇴 과학자
5000평 숲 사들여 4계절 관찰
이끼류·곤충 등 빠짐없이 기록

생물·역사·고고학에서 시작해
미식·가구 제작법까지 확장 돼
행복한 제2의 삶 아이디어 선사

영국의 런던자연사박물관에서 평생 고생대 화석과 씨름하던 선임 고생물학자가 어느 날 은퇴한다. 평생 박물관 안에서만 일해오다 마침내 건물 밖으로 나가 바깥 공기를 마시며 살 수 있게 된 그는, 부인과 의기투합해 런던 교외에 있는 1만6500㎡(약 5000평) 너도밤나무 숲을 사들였다. 이 책은 그가 사들인 숲이 품고 있는 ‘거의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다. 누구에게는 재테크의 수단인 토지일 뿐이고, 누구에게는 벌목을 전제한 경제적 자산인 숲과 땅이, 그 숲을 가진 자의 시선과 관심사에 따라 얼마나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가진 매혹적인 공간이 되는지를 이 책은 유감없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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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숲을 사들인 뒤에 시작했던 건 일지(日誌) 쓰기다. 그는 작은 수첩에 숲에 사는 동식물을 기록하고 숲의 분위기와 계절에 따른 변화를 적었다. 관찰과 기록은 과학자인 그가 평생 해온 습관과도 같은 일이었겠지만, 은퇴 이후 그가 적은 것은 박물관 유물의 안부가 아니라 자신이 사들인 숲과 자연, 그리고 그 숲이 지나온 시간과 맞이할 시간에 대한 것들이었다.

그는 자신의 숲에 들어 이끼류와 풀, 곤충, 버섯 등에 이르기까지 숲에 있는 모든 것들을 채집했고, 나무를 모조리 조사했다. 결론은 ‘똑같은 나무는 하나도 없다’는 것. 그는 숲에서 호두나무의 색이 얼마나 다채로우며 물푸레나무는 얼마나 창백한 색감을 가졌는지, 벚나무는 또 얼마나 따듯한 색조를 가졌는지를 알게 됐다.

이런 것들을 기록하게 만든 동력은 호기심이었다. 저자는 ‘호기심이야말로 가장 의미 있는 인간의 본성’이라고 강조한다. 그가 말하는 호기심이란 타자에 대한 관심과 너그러운 이해를 말하는 듯하다. 이런 호기심에 힘입어 그의 기록은 확장된다. 숲에서 자라는 너도밤나무의 생태를 기록하다가 관심사는 철기시대부터 달라져 온 너도밤나무의 쓰임새로 이어졌고, 급기야 중세의 가구 제작법에 대한 얘기며 그때 쓰인 목재 도구, 심지어 오래전의 산림기술과 당시의 무역까지로 이야기는 확대됐다.

저자는 숲의 얘기를 월별로 나눠 차근차근 끌고 나간다. 숲의 첫 장면은 1월이 아닌 4월이다. 짐작하다시피 생명이 약동하는, 그래서 ‘숲의 처음’이라고 할 수 있는 때가 4월이기 때문이다. 양벚나무 화사하게 핀 4월, 비가 내린 5월의 숲, 6월에 너도밤나무숲에서 돋는 새싹, 숲이 무성해지면서 햇볕이 닿지 않아 어둡고 침울해진 7월…. 이런 식으로 4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숲에 대한 1년의 기록이 정리돼 있다.

저자의 이야기는 특정한 학문 분야에 국한하지 않는다. 생물학에 역사와 고고학이 끼어들고, 미식과 문학이 곁들여진다. 그가 말하는 숲 이야기는 풍부한 지식뿐만 아니라 노학자의 깊은 통찰력에서 나온다. 이 책에서 또 눈여겨볼 만한 건 저자의 세심한 관찰과 꼼꼼한 기록이 학자의 연구나 생계를 위한 노동이 아니라 은퇴한 학자의 순수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즐거움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나날이 변화하는 숲을 들여다보고 기록해가며 그는, 자신이 사들인 작은 숲을 은퇴 이후의 ‘삶의 프로젝트’로 삼은 셈이다.

책 제목 ‘나무에서 숲을 보다’는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한다’는 격언에서 착안해 지은 것이다. 책은 줄곧 숲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이 책에서 숲이 아니라 은퇴 후에 즐거운 삶을 누리는 방법을 읽을 수도 있겠다. 저자의 의도와는 다른 엉뚱한 책 읽기가 될 지 모르지만 말이다. 즐거움이 묻어나는 관찰의 기록, 순수한 호기심과 목적 없는 연구. 그의 글을 읽다 보면 문득 부러워진다. 우리도 은퇴 이후에 이렇게 즐겁게 공부하며 살 수 있을까. 책장을 넘기며 한 번 가늠해보자. 399쪽, 2만5000원.

박경일 기자 parking@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