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공존하는 ‘두 개의 西洋’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은 사라진 삼일고가(왼쪽)와 세운상가(오른쪽)도 번안의 대표적 사례다. 삼일고가는 도쿄고가를, 세운상가는 조선총독부와 신궁을 연결하는 남북축을 연상시킨다. 자료사진

- 번안 사회 / 백욱인 지음 / 휴머니스트

日은 개항기에 서양문물 ‘번안’
그 결과를 식민지 조선에 쌓아
해방뒤 ‘새로운 미국풍’ 들어와
문화·환경 안가리고 ‘혼종 싸움’

국민교육헌장·삼일고가도로 등
日 모델로 삼은 사례들로 꼽으며
번안 넘어서는 터전 만들기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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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가 각종 문화 콘텐츠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K-팝이 전 세계 팬들을 사로잡는가 하면, 한국에서는 북유럽 스타일을 입에 올려야 ‘뭐 좀 아는 사람’으로 통하던 때도 있었다. 일방적으로 문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때도 있었다. 우리에게는 일제강점기가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백욱인 서울과학기술대 교수는 ‘번안 사회’에서 “한국에는 두 개의 서양이 공존한다”면서, 서양의 ‘것’들이 어떻게 우리 사회를 지배하게 됐는지 설명한다. 두 개의 서양이란 “일본이 번안한 서양”과 “한국이 번안한 서양”이다.

‘번안’은 “특정 장르의 작품을 다른 장르의 작품으로 바꾸거나 배경과 인물을 바꿔 시공간의 차이를 적극적으로 전유해 현실에 맞는 배경과 형태를 갖추는 작업”이다. 일본은 개항과 더불어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번안 작업을 마쳤는데, 그 결과물을 식민지 조선에 차곡차곡 쌓았다. 이후 미군이 진주한 남한에는 “일제의 양풍(洋風)과 새롭게 들어온 미국풍이 공존”하게 됐다. 저자는 이 시기에 “왜곡된 근대, 진행 중인 근대 그리고 전근대가 뒤섞이면서 혼종 간 싸움이 벌어졌다”고 진단한다. 이 혼종 간 싸움은 소설·미술·영화·음악의 예술 영역, 언어·기술·학문·교육·종교 영역, 주거·오락·음식·패션·도시환경·미디어 영역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진행됐는데, 1960년대 근대화 시기까지 광범위하게 이뤄졌다.

일제강점기 번안의 폐해가 가장 오래 드리운 것은 ‘국민교육헌장’이다. 일본은 1890년 천황의 이름으로 ‘교육칙어’를 발표했다. 저자는 일본 교육칙어는 “충효로 이뤄진 일본식 근대 교육의 일그러진 봉건성”이라고 일갈하는데, 이 땅에서는 1968년 국민교육헌장으로 되살아났다. 박정희는 일본의 교육칙어와 군인칙유를 흉내 내어 국민교육헌장과 군인복무규율을 “자신의 이름으로 제정”했다. 연이은 1971년 비상사태 선포와 1972년 유신 체제도 “일제가 내건 군국주의화의 길”을 번안한 것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박정희는 교육에 대한 국가 개입과 국민 생활에 대한 일상적 규제를 강화하면서 “종신 지배 체제”를 꿈꾼 셈이다.

한국의 음식은 애초에 표준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집집이 다른 ‘장맛’ 때문인데, 이런 이유로 ‘왜(일본)간장’은 식민지 시대에도 조선을 장악하지 못했다. 상황이 역전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해방 이후다. “간장을 담글 경제적·시간적 여유가 없는 계층을 중심으로 공장제 간장이 시장을 확대”해 나갔다. “균질한 맛을 만들어 내는 식품공업”은 소비자의 입맛을 길들였고, 이후 소비 취향이 고급화되면서 조선식 발효 간장이 시중에 나오기에 이른다. 한편 서양의 다양한 소스가 수입되면서 한국은 “일본적인 것, 서구적인 것, 미국적인 것을 넘어 ‘전 지구적’인 것”의, 즉 번안의 각축장이 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은 사라진 삼일고가도로도 번안의 대표적 사례다. 일본은 식민지 경영을 위해 전국 각지에 병영을 세웠고, 신궁 또한 곳곳에 만들었다. 이렇게 형성된 “식민 도시 경성은 1960년대를 거치면서 근대도시 서울”로 거듭난다.

하지만 저간의 상황에는 착취와 배제의 아픔이 배어 있다. 빈민층은 “위험한 계급”이었고, 그들이 삶을 지탱하던 공간은 “불건전한 가옥”으로 치부되며 “도심에서 추방하는 일”을 국가는 서슴지 않았다. 그렇게 “청계천 변 판잣집을 일소”했고, 그 위로 삼일고가도로를 건설하기에 이른다. 1969년 개통된 삼일고가도로의 모델은 1959년 개통했던 도쿄고가도로였다. 삼일고가도로가 서울의 동서를 잇는 축이라면 남북을 연결하는 거대한 건물은 ‘세운상가’였다. 도심의 남북을 공중 보도로 연결한 이 거대한 건물은 1960년대 도시 근대화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이 역시 “1920년대 조선총독부와 신궁을 연결하는 남북축을 연상”시키는 번안의 결과물이다.

일본 번안물의 위력은 생각보다 오래 지속됐고 그 범위도 넓었다. 저자는 “일상생활 영역에서 일본식 번안물을 밝히기란 친일 반민족주의자를 드러내고 정리하는 일보다 훨씬 어렵다”고 말한다. 실제로 어떤 것이 번안되고 착종(錯綜)됐는지 알 수 없는 일들이 우리 주변에 수두룩하다. 그럼에도 저자는 일제 번안물을 벗어나기 위해 “그것을 직시하고 의도적으로 폐기하는 수준을 넘어 더 이상 그것이 필요 없는 근거와 터전을 만드는 길”만이 해답이라고 강조한다. 익숙한 것과 결별하는 아픔 따위는 생각지도 말아야 한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토대가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철저히 버려야 할 것이 있다면, 지금이 바로 그때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364쪽, 1만9000원.

장동석 출판평론가·‘뉴필로소퍼’ 편집장